데미안 / 지와 사랑 / 싯다르타 동서문화사 월드북 147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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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기 전에 나는 지성스러운 학자신부 나르치스와 끝없는 자기 안의 감정을 폭발하여 예술로서 승화하던 골드문트에 대해 적은 지와 사랑을 읽었다. 지와 사랑을 읽을 시에는 분명 작품 내의 서술하는 관점이 3인칭이었는데, 이번에 보인 데미안은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이런 데미안을 읽은 후에 잠시 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데미안이란 작품이 마치 헤르만 헤세의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감정과 기억들을 하나의 문학으로 탄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데미안을 읽으면서 작품 내의 언급된 어느 철학자의 이름이 많이 생각났다.

그 철학자 이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였다. 니체의 이름이 언급되고, 마치 니체가 주장하고픈 이야기처럼 작품 내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마치 헤르만 헤세가 니체에 심취한 부분을 살리지 않은가 했다.

작품 내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매우 착하고 순진한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아버지, 자신을 매우 사랑스럽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또한 자신을 정말 친한 친구처럼 귀여워해주는 누나가 있었다. 싱클레어라는 소년은 그 어떤 어린아이와 비교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잠시 뒤에 깨진다. 자신의 마을에 가난한 소년인 프란츠 크로머와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이른바 어른답게 보이려는 행동이 싱클레어에게 독으로 되었다. 우리는 흔히 어린 시절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에 뭔가 튀어 보이거나 위협적이거나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려 하고 그것이 마치 동경의 대상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른바 나쁘게 보이기가 어린 학생들에겐 하나의 권력으로 다가갔다. 그런 권력을 누빈 자가 바로 프란츠 크로머고, 그런 프란츠에게 동경과 공포를 가진 싱클레어가 거짓된 모험인 도둑질 이야기를 동네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때 프란츠는 싱클레어를 협박하게 2마르크를 내놓으라고 한다. 왜냐하면 싱클레어가 만든 거짓이야기가 실제 사건이 된 적이 있어서 그 도둑을 실제로 주인이 찾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싱클레어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 참이라고 맹세하는 바람에 프란츠에 의해 돈도 빼앗기고,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프란츠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싱클레어의 누나를 데리고 와서 그 누나에게 못된 장난을 하려고 하는 뉘앙스까지 풍겼다. 이때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전학온 막스 데미안에 의해 싱클레어는 위기에서 모면했다. 그 위기뿐만 아니라 프란츠라는 불량소년이 더 이상 싱클레어에게 관여조차 하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이런 사건이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경과 공포의 대상이 허물어지고 그 대신 들어갈 사람이 데미안이란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각인했으나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과 같았다. 자신은 언제나 순진한 부모님의 양인 반면 데미안은 논리적이고 사색적이면서 현실에 있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정식적인 크리스천도 아니라 오히려 신과 악마 중간을 믿는 이교도 냄새가 강한 존재였을 것이다.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에게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것과 동시에 뭔가 자신에게 큰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현실과 어울리지 않은 남자, 그리고 그 현실 이상으로 독특한 향기를 지닌 남자, 데미안이란 싱클레어에게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데미안을 어린 국민학교 졸업 후에 멀리 떠나보내게 되었는지 싱클레어는 다른 지역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싱클레어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부모님 말도 잘 듣던 그가 오히려 진학하게 되면서 반항적이면서 혹은 남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각인하지 못한 채 방황했을 것이다.

그런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그는 다른 계기를 맞아들였다. 어느 길가에서 그는 자신만의 그녀를 본 것이다. 그녀는 단테의 신곡에 나온 베아트리체 같은 여성을 길에서 우연히 관찰한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 베아트리체의 본명은 모르나 그는 자신만의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하며 흠모했다. 하지만 그 흠모는 이상하게도 다시 데미안의 기억으로 연결되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싱클레어는 그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한 어느 소녀보단 데미안의 모습이 생각나고, 이제는 데미안의 어머니가 싱클레어만의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데미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점차 알아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학교생활과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런 자신의 존재적인 본류에 계속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인이 되기를 포기한 어느 피아니스트와 같은 반의 어느 작은 몸집을 가진 청년과의 대화로 통해 그는 마치 정해진 틀과 남이 바라는 존재이기 보다는 자신만의 정체성에 큰 고민에 빠진다.

그런 고민에서 싱클레어는 전에 데미안에게 보낸 편지도 생각하고 왜 편지답장이 오지 않음에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 싱클레어는 방학을 이용하여 집에 갔을 때 데미안을 만나고 그와 만나면서 이제는 싱클레어의 베아트리체인 에바 부인도 만난다. 에바 부인! 그녀는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완벽한 여성이었다. 섬세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 아름다우면서 품위가 넘치는 어머니 에바 부인!

그렇지만 싱클레어에게 에바 부인이란 그저 흠모의 대상,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보다는 어머니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에바 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만지고 안고 싶어 했다. 그녀가 바로 데미안을 낳은 존재고 그녀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살아 있는 데미안의 존재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과 같이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가 모든 생명과 죽음의 시작인 어머니와 대지를 생각하는 듯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잠재적인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데미안에서 데미안의 어머니로 가는 듯했으나 마지막에서는 데미안이 그의 이상향이었던 것 같았다. 청년 데미안은 그 시절 러시아와 독일의 전쟁에서 장교로 출전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싱클레어도 전쟁에 참가한다. 그는 전쟁에서 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의문을 느끼지도 못한 채 생과 사를 넘나든다. 우연히 싱클레어는 보초를 쓰는 와중에 적군의 총알이 자기의 육체를 스쳐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옆 침대에 누워있는 데미안이 찾아와 키스를 하고 싱클레어의 모습은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으로 변했다. 그러나 다음날 싱클레어가 눈을 뜰 때에 옆 침대에는 데미안이 아니라 이름과 얼굴 모를 병사였다.

그렇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그늘 아래 있다가 자신이 데미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녕 데미안과 똑같은 생각이 아니라 데미안 못지않은 자신만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 머나먼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혹은 짧았다. 정말 신은 신으로만 존재하여야 신일까? 아니라면 신이 신과 악마의 중간에 있어도 좋지 아니한가? 모든 것은 정해진 안에서만 진리를 찾는 것일까? 그 진리가 꼭 맞다고 보는 것일까? 싱클레어는 이런 고민을 데미안에 의해 시작했다.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다가 어느새 그 거부를 타인에게 받았다.

자신만의 진리와 존재감을 찾는 싱클레어에서 헤르만 헤세는 자기가 어린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와 니체로 시작한 철학적 사유를 펼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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