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김윤아 지음 / 일지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보고 있던 어느 도서 한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이다. 예전에 내가 은근히 생각해보고 영상관련 학문 도서 및 애니메이션 관련자료에서 조금 연계된 내용이 있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국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평소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적는 입장에서는 이 말은 상당히 인상이 깊다. 이른바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존재들은 현실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에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문제는 실제 존재들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문제로 인해 삶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실사영상으로 통해 삶의 모습과 더불어 죽어있을 그들을 불려오는 하나의 환영소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사 안에 찍혀 있는 피사체에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무의 공간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죽어있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른바 죽음의 각인을 새겨주는 영화와 달리 영원성을 부여한다. 

원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원래 없어질 수가 있다는 소멸의 현상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상에서는 빈 공간조차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존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런가?
 

죽음이 원래 없던 이들을 탄생하는 것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TV나 영화관에서 보이는 유치하고 저속한 수준의 미디어로 비추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편견과 오류와 자만에 불과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우리가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오락과 재미로 부여하기 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살펴본 도서에서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높은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지 기술한 도서가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이다. 이 도서의 큰 특징은 이른바 장인-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다룬다는 점과 상업적인 요소를 지닌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제작방식보다는 1인 내지 소주정예로 이루어진 개인 중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작방식이 대규모 노동보다는 감독이 직접 모든 것을 구상하고 그리고 제작하므로 애니메이션이 모두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작품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편의 미학강의를 받는 것과 같다. 미학은 미(美)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내적인 가치와 담론을 어떻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예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의 억압 내지 표현욕구가 타인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가에서 미학의 가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학은 예술에 대해 철학이란 칼로서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처럼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미적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고정된 관념보다는 그 이상의 이상과 사유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 고정된 관념과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아도르노는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각종 이야기를 가진 서사구조에서는 평화로운 세계 내지 혹은 원만한 공간에서 하나의 침입자 및 원인제공자가 그 세계와 공간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공간이 위태롭게 됨에 따라 불안정한 구조로 빠지고, 이에 대해 영웅이나 대항조직이 생기며 이들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보통 narrative의 정해진 간단한 패턴공식이다.
 

보통 이런 공식들은 자기반성보다는 외부의 인자를 찾아오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발점이 정말 외부의 존재들이 의도적으로 했는지 아니라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게 했는지가 알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 중에서 베트남전쟁 영화가 있다. 거기서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갖은 음모와 위협을 제공하고, 미국군은 여기에 대해 매우 어렵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오고가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도모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맞이함에서 영화는 안정된 공간을 찾고 세상은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세상 베트남전쟁은 통킹만 사건으로 통한 첩보자작극이란 폭로로 통해 베트남전쟁은 정말 세계 평화의 - 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 위협을 저지함에서 모든 것이 마친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 혹은 영화관에 보러 가면서 미리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관객의 틀이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고정된 인식이나 일반 대중들의 사고를 가진 관객의 생각들을 오히려 전복시킨다.
 

영화로 통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인 강조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기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가 참 좋다는 것보다는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준다. 정해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연출로는 기존 사고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무조건적으로 이런 과격하고 전도적인 방식으로만 관객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리데릭 벡이란 감독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제작기간이 5년이란 시간을 소요되었는데, 막상 상영시간은 단 30분 내외이다. 그는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작화작업을 하였으며, 작품 내의 마치 몽상의 세계를 꾸미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펜이 묶은 셀을 닦음으로서 한쪽 눈을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감독이 주지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치가 그대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에 우리는 과연 예술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대로 넘기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이런 작품적 가치를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예술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애니메이션인지 혹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예술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위한다고 하여도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풀어가서 철학적인 사유로 논한다면 애니메이션 과연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ps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이 책을 저술한 김윤아 교수님에게 직접 서명을 받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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