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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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유레카'의 순간처럼 갑자기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훑어 보고, 샅샅이 살펴보고, 골똘히 바라보아야 이해된다. 하지만 몇 단계를 거쳐 이해하고 나면 그 작품의 의미나 다른 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눈앞의 수수께끼를 풀었고, 몇 분 동안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그림 속 이야기나 인물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다. 어려운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누구, 무엇, 어디를 그렸는지 어느 정도 파악했을 수도 있다.    p.31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고, 집에 좋아하는 그림을 걸어두고 보기도 화며, 가끔은 미술과 그림 읽기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미술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명작'들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겠지만, 난해하고, 추상적인 그림들도 많으니, 사실 그런 작품들을 해석하는 것은 감상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림을 본다. 왜냐하면 그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위로와 감동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주 사적이고도 특별한 그림 감상법을 제시하는 '고전 미술 가이드'이다. 저자가 큐레이터로 일하며 미술 평론가로 활동 중이라 매우 전문적이지만, 그만큼 신선하고 색다른 그림 읽기를 보여 준다. 저자는 인식론에서백지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인타불라 라사TABULA RASA’ 10가지 키워드로 풀어내 우리에게 하나의 감상법으로 제안한다. T 'Time(시간)', A 'Association(관계)', B 'Background(배경)', U 'Understand(이해하기)', L 'Look again(다시 보기)', A 'Assess(평가하기)이다. 그리고 나머지 'Rhythm(리듬)', 'Allegory(비유)', 'Structure(구도)', 'Atmosphere(분위기)'라는 뜻이다. 마주하는 시간Time, 작품과 나와의 관계Association, 작품을 이루는 배경Background, 이를 통해 이뤄지는 이해Understand까지 되고 나면 다시 보는 과정Look Again이 이어지고, 마침내 평가Assessment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는 식이다.

아름다움은 너무 케케묵은 개념 같아서 우리는 요즘 거의 입 밖에 내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 미술에서는 거의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조건이 되었지만, 고전 미술은 아름다움만으로 평가될 때가 너무 많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능수능란하게 묘사한 고전 미술 작품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고전 미술 전시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전원 풍경이나 멋있고 정교한 그림들이 넘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시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보통 평범하고 진부한 감상평밖에 말하지 못한다.    p.145

그렇게타불라 TABULA'에 해당하는 키워드까지 잘 따라가면, 이제 틀을 깨고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어지는 키워드는 '라사 RASA'에 해당되는 단계들이다. 그림의 역동성을 만드는 리듬Rhythm과 작가가 몰래 건네는 메시지를 담은 비유Allegory, 보이지 않는 액자인 구도Structure까지 살펴보고 나면 우리 앞에는 명작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Atmosphere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20세기 이전의 위대한 작가들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고전 미술 작품 앞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다른 시대와 장소로 건너가지 못한 채, 역사와 수수께끼, 이야기와 신앙과 우상으로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작품은 그저 알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니 말이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러한 작가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우리는 보통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말이나 글을 통해 정보를 어느 정도 얻고 나서 감상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정보를 얻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으로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술작품을 읽으려고 노력하기 전에 보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낯선 단어를 10가지 키워드로 풀어내어 설명하는 방식이 낯설거나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각각의 키워드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어려운 용어들을 남발하지도 않으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쉽게 쓰여 있다. 그러니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당장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가 없어서 그림에 대해 모를수록 더 잘 보이고, 낯설수록 더 재미있다면.. 누구라도 정보나 선입견 없이 오롯하게 그림 그 자체를 스스로의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한 번쯤은 나도 미술을 '읽지 않고도 제대로 보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이 놀라운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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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마야의 모험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28
발데마르 본젤스 지음, 천은실 그림, 강민경 옮김 / 인디고(글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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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꿀벌 집보다 이곳 바깥세상이 훨씬 넓고 천 배는 더 아름답구나!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꿀이나 나르고 밀랍이나 만들 수는 없지.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꽃이 가득한 세상을 돌아다닐 거야. 나는 다른 벌들과는 달라. 내 마음은 즐거움과 놀라움, 그리고 경험과 모험을 원하고 있어. 나는 어떤 위험도 두렵지 않아. 나에게는 힘과 용기와 침이 있으니까."     p.21~22

이제 막 고치에서 깨어난 꿀벌 마야는 다른 모든 꿀벌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고, 겁이 없어 꽃과 다른 곤충들과 인간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금색과 녹색 햇살이 반짝이는 어느 날, 첫 비행을 나서게 된 마야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른다. 날아다니는 게 이렇게나 멋진 일이라니, 햇빛이란 이렇게 향기로운 것이구나, 오늘만큼 아름다운 날이 또 있을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라고 말이다. 그렇게 처음 마주한 세상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마야는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마야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방식대로 삶을 즐기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 세상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떤 일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야는 무례한 딱정벌레를 만나고, 그들의 식량을 가져가는 불량배 개미들을 만나고, 거대한 잠자리에게 잡혀가는 쇠파리를 만나고, 자신을 말벌과 혼동하는 메뚜기를 만난다. 그러다 거미줄에 붙들려 거미의 먹이가 될 뻔하는 하지만, 쇠똥구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한다. 마야는 생긴 것도 다르고 성격도 가지각색인 곤충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마침내 밖을 내다보자, 온 세상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보였다. 수천 개는 될 법한 은빛 진주알들이 잔디밭을 뒤덮은 채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저 멀리 보이는 풀밭은 부드러운 베일에 덮여 있었고, 자작나무 가지와 잠든 잎사귀들은 은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요하고 축복에 찬 먼 곳까지, 주변이 온통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든 상태였다.

"이게 바로 밤이구나. 오직 밤만이 이럴 수 있지."     p.167

이 작품은 꿀벌 마야를 비롯해 여러 곤충들을 의인화하여 자연의 신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 안에 인간의 모습을 녹여내고 있다. 곤충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먹이사슬부터 인간과 곤충의 관계, 서로 우정을 맺게 되는 과정,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동지가 되기도 하고.. 곤충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나 마야가 느끼는 감정처럼, 인간 역시 자신이 경험한 세계 밖에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마야가 모험 중에 '정말 상상도 못했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경험하기에는 삶이 너무 짧구나.'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도 그와 같다. 세상 바깥으로 나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으니 말이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스물여덟 번 째 책이다. <꿀벌 마야의 모험> 1912년 처음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고전으로 연극과 뮤지컬은 물론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며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새벽 공기를 머금은 숲 속의 신비로운 풍경,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 위를 행복하게 날아가는 마야의 비행,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날개를 지닌 나비의 모습,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밤의 숲 속 풍경까지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한 책이라 아이와 함께 읽어도, 어른들이 읽기에도 너무 예쁜 작품이다. 게다가 천은실 작가의 맑고 투명한 그림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수놓고 있는데, 너무도 사랑스럽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소장용으로도,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으로도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힐링 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해주고, 아이와 함께 페이지 가득한 숲 속의 마법을 느껴본다면 아마도 잊지 못할 순간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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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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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가까운 곳에서 저 먼 곳까지 커다란 검은 점들이 서서히 뜨거운 햇볕 아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셴 할아버지는 자기 집 밭머리에 섰다. 공허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나이 일흔둘의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의 마음이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 같은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연원일' 중에서, p.19

요우쓰댁은 열일곱의 나이에 시집을 와서 열여덟 살에 첫아이를 출산하고, 평균 한 해 반에 하나씩 딸들을 낳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세 딸이 모두 저능아였던 것이다. 게다가 몇 년 뒤에 낳은 아들마저 저능아로 확인되자, 저능아인 아이 넷과 평생을 살아가야 할 세월이 막막한 남편이 죽어 버리고, 요우쓰댁만 남겨진다. 세월이 흘러 첫째와 둘째는 지능이 낮긴 하지만 병만 발작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남편을 찾아 가정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한창 수확을 하고 있는 이 시기에 셋째 딸이 언니들처럼 남편을 갖고 싶어 해 요우쓰댁은 온전한 남자를 찾아 주기 위해 여러 마을을 찾아 다닌다. 어렵게 멀쩡한 사위를 구하게 된 요우쓰댁은 집안에 있는 양곡들을 다 퍼주며 셋째를 시집 보내는데, 이번엔 둘째 사위가 찾아와 임신한 둘째가 발작이 빈번해졌다며 걱정을 한다.

그는 꿈속에서 둘째의 발작 증세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데, 죽은 사람의 뼈를 고아서 마시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친척의 뼈일수록 좋다고 말이다. 그래서 요우쓰댁은 남편의 무덤을 파러 간다. 이 작품의 제목은 '골수'이다. 자식은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자라는 존재라는 것을 옌롄커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처해 있는 가혹한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너무 극단적이라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부조리 서사의 대가'로 불리는 작가답게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불합리한 현실 세계 속의 풍자와 해학으로 빚어져 있다.

남편이 죽었다. 앞으로의 세월에 놀라서 죽어버린 것이다. 남편이 죽자 일상 속의 빛이 휙 하고 어둠으로 바뀌었다. 농번기에 가래를 메고 곡괭이를 들 사람이 없어졌고, 농한기에 무료함을 달랠 이야기 상대가 없어졌다. 겨울에 물 항아리가 얼어서 갈라지면 철사로 동여매 그 틈을 막는 일도 요우쓰댁 스스로 해야 했다.   

-'골수' 중에서, p.166~167

옌롄커는 집필하는 작품마다 판매나 홍보가 금지되면서도 중국 평단과 대중은 물론, 세계 문학계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온 문제적 작가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 <딩씨 마을의 꿈>들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옌롄커가 지금까지 발표한 70여 편의 중·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 네 편을 직접 골라 한데 모은 것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국 농촌에서 악전고투하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의 절망과 고통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내용만 보자면 매우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웃음과 위트를 자아내고 있어 읽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

옌롄커는 가혹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을 섬세한 필치와 회화적인 시어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단한 삶의 굴레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거대한 서사가 완성된다. 시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묘사, 그리고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만남은 끝내 먹먹한 감동을 남긴다.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쓰는 작가 옌롄커, 그의 다음 작품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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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패시지 1~2 - 전2권 패시지 3부작
저스틴 크로닝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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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때가 왔어.'

그 순간 그레이는 마침내 모든 것이 기억났다. , 그리고 격납실에 앉아 제로를 바라보고, 제로의 목소리를 듣고, 제로의 이야기를 듣던 매일 밤이. 뉴욕도, 매일 밤 바뀌던 여학생들도 기억났고, 어둠이 자신의 몸속을 타고 움직이는 것, 그들을 덮칠 때 턱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쾌감도 기억났다. 그는 그레이인 동시에 그레이가 아니었고, 제로인 동시에 제로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곳에 있었고 아무 데도 없었다.     -1, p.297

앤서니 로이드 카터는 약물 주입 사형을 선고 받은 수감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잔디를 깎는 일을 시키던 고용주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레이철 우드를 살해한 죄로 지난 1332일간 교도소 격리관리구역에 수감되어 있었다. 사형 집행일은 머지않았고,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마음을 텅 비운 채 누워 있는 채로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를 면회하러 온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년 전 살해된 여자의 남편이 찾아왔던 뒤로 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를 찾아온 건 특수요원 울가스트와 도일이었다. 군에서는 '노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약물 실험 3단계에 참여할 10명에서 20명 정도의 사형수를 구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으로 형이 낮아진다. 이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프로젝트라 이들은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고, 이후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다.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커튼 뒤에 숨겨져 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 번째 선택지를 받아들이든지..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찾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사형수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비밀 시설로 옮겨진다. 한편 그럭저럭 임무를 해가던 울가스트에게 엄마로부터 버림받아 수녀원에 있는 여섯 살 소녀 에이미를 마지막 실험체로 데려오라는 연락이 온다. 그는 사형수가 아니라 일반인, 그것도 어린 소녀를 실험체로 사용한다는 것에 반발해 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이 소녀는 이후에 '천 년을 산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자'가 될 예정인,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자'가 있었다. 제로도, 트웰브도 아닌 '또 다른 자'. 같은 것인 동시에 다른 것. 자세히 보려고 정신을 집중할 때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새처럼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 뒤의 그림자. 그리고 그의 자손이자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동료인 '다수' 역시 그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가 끌어당기는 거센 힘을 느꼈다. 오래전 어린 시절, 담배의 발갛게 불타는 끝이 살에 짓눌리고 불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던 그 무력한 사랑처럼.    -2, p.304

만약 세상에 암도, 심장병도, 당뇨병도, 알츠하이머도 없다면 인간의 수명은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을까? 노화를 늦추고, 오래 살고자 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욕망이었다. 뱀파이어의 이빨, 피를 향한 굶주림, 어둠과의 영원한 결속. 만약 이런 것들이 단순히 판타지가 아니라 어두운 힘을 인간의 DNA에 아로새긴 영겁의 기억이라면? 다시금 깨워내고, 제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런 힘이라면 어떨까. 정부는 남아메리카의 희귀한 박쥐에게서 추출한 바이러스가 모든 질병에 맞서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아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노아 프로젝트'의 목표는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발견하는 거였다. 성경에 등장하는노아의 이름을 따노아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는 사형수들을 실험체로 모집해 약물 실험 3단계를 비밀리에 시행한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주입 받은 사형수들은 온 몸에서 녹색 빛을 발하며 사람이 바깥으로 풀려나게 되면서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다. 이는 하나의 세계가 죽고 다른 세계가 태어나게 되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 작품은 <패시지>, <트웰브>, <시티 오브 미러>로 구성된 '패시지 3부작' 1부에 해당된다.  1권이 528페이지, 2권이 576페이지인 작품이 1부이니, 2, 3부 역시 각각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일 것이다. 게다가 글자 크기가 작고 빽빽한 편이라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서사 자체도 여느 판타지 작품들에 비해 밀도 있게 꽉 채워져 있어 어느 한 단락 예사롭게 흘려 보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영화로 치면 한 두 장면이면 끝날 엑스트라 급의 캐릭터에게도 각각의 서사를 부여하고, 수십 페이지의 이야기를 만들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애초에 전체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간단히 몇 줄로 줄거리 요약을 하는 것이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흔히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장르를 예상했을 때의 그런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 굉장히 묵직하고, 깊이 있는 서사를 들려주고 있는 놀라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쉽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 인류를 구원할 소녀에이미가 떠나는 거대한 여정의 이제 첫 걸음이다. '패시지 3부작'의 다음 작품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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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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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일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괜찮다.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도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p.57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조그마한 섬 보라보라는 '태평양의 진주'라고 불리며 휴양지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신혼여행의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사파이어빛 바다, 형형색색의 산호초로 가득한 그곳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이미지만으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탄성부터 내지르게 된다. 이렇게 누구나 꿈꾸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지만, 사실 여행자로 그곳에 머무는 것과 현지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을 떠나 이곳의 외딴 바다 마을 섬에서 10여 년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어라운드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외딴 바다 마을에서의 간소하고 잔잔한 삶을 꿈꾸며 유유자적, 자급자족, 그러니까 '슬로우 앤드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로망을 안고 집을 떠나 섬에서의 생활을 해왔다. 이 책은 그녀가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9년간 생활하며 배운,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의 태도에 대한 에세이다. 그녀는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알게 되는 근사한 삶을 꿈꿨지만, 사실은 암막 커튼을 쳐놓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데,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다른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믿는 어른이 없는 것처럼, 바로 그 진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 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지금 같아서는 된장국에 밥 말아 먹는 더하기 하나를 꼭 받고 싶다. 음식에 대해 쓰고 나니 그 생각뿐이다 콩이라도 키워야 하나.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118~119

그곳에는 시장도, 극장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이스 라테를 파는 카페도 없다. 넓고 넓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보라보라섬의 각종 ''들은 저렴하지 않았고, 수입은 통장을 중간 경유지로 알고 금방 빠져나가 버린다. 모기떼의 습격을 받고는 보라보라의 진료실에 갔다가, 종합병원이 있는 타히티까지 무려 비행기로 응급 후송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답게, 마트에서도 물건이 자주 동나는 바람에 겨우 달걀 하나 사는데도 몇 주가 걸리고, 심심찮게 찾아오는 정전에 반사적으로 냉동실의 음식을 먹어 치우게 된다. 직항은커녕 경유 비행편도 며칠에 하나씩 있는 곳에서의 삶은 단조롭고 고립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별 수 있나' 하는 담담하고 단순한, 그리고 단단한 마음으로 그 모든 상황들을 그저 웃어넘긴다

세계 제일의 영화감독이 되어 칭찬받고 싶지만 영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사람. 아이를 갖고 싶다는 100퍼센트의 확신을 기다리다가도, 계속해서 달라지는 마음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비관으로 멋지게 추락할 줄 아는 사람. 열아홉 시간의 시차만큼이나 멀리 떠난 곳에서 심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시시콜콜한 오늘을 나누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들에 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일이 안겨주는 대책 없는 낭만과 행복의 조각들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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