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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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일이 아니어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괜찮다.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도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p.57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조그마한 섬 보라보라는 '태평양의 진주'라고 불리며 휴양지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신혼여행의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사파이어빛 바다, 형형색색의 산호초로 가득한 그곳은 인터넷으로 검색한 이미지만으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탄성부터 내지르게 된다. 이렇게 누구나 꿈꾸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지만, 사실 여행자로 그곳에 머무는 것과 현지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집을 떠나 이곳의 외딴 바다 마을 섬에서 10여 년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어라운드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외딴 바다 마을에서의 간소하고 잔잔한 삶을 꿈꾸며 유유자적, 자급자족, 그러니까 '슬로우 앤드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로망을 안고 집을 떠나 섬에서의 생활을 해왔다. 이 책은 그녀가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9년간 생활하며 배운,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의 태도에 대한 에세이다. 그녀는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알게 되는 근사한 삶을 꿈꿨지만, 사실은 암막 커튼을 쳐놓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데,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다른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믿는 어른이 없는 것처럼, 바로 그 진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 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지금 같아서는 된장국에 밥 말아 먹는 더하기 하나를 꼭 받고 싶다. 음식에 대해 쓰고 나니 그 생각뿐이다 콩이라도 키워야 하나.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118~119

그곳에는 시장도, 극장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이스 라테를 파는 카페도 없다. 넓고 넓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보라보라섬의 각종 ''들은 저렴하지 않았고, 수입은 통장을 중간 경유지로 알고 금방 빠져나가 버린다. 모기떼의 습격을 받고는 보라보라의 진료실에 갔다가, 종합병원이 있는 타히티까지 무려 비행기로 응급 후송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답게, 마트에서도 물건이 자주 동나는 바람에 겨우 달걀 하나 사는데도 몇 주가 걸리고, 심심찮게 찾아오는 정전에 반사적으로 냉동실의 음식을 먹어 치우게 된다. 직항은커녕 경유 비행편도 며칠에 하나씩 있는 곳에서의 삶은 단조롭고 고립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별 수 있나' 하는 담담하고 단순한, 그리고 단단한 마음으로 그 모든 상황들을 그저 웃어넘긴다

세계 제일의 영화감독이 되어 칭찬받고 싶지만 영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고백하는 사람. 아이를 갖고 싶다는 100퍼센트의 확신을 기다리다가도, 계속해서 달라지는 마음 하나하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사람.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비관으로 멋지게 추락할 줄 아는 사람. 열아홉 시간의 시차만큼이나 멀리 떠난 곳에서 심심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자신 있게 소개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시시콜콜한 오늘을 나누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들에 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일이 안겨주는 대책 없는 낭만과 행복의 조각들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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