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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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깥세상에 내보이는 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허울이에요. 대부분의 사교적 만남에서는 가식적 대화만이 오가죠. 자신의 본모습, 뿌리 깊은 두려움, 숨어 있는 욕망까지 드러낼 만큼 누군가를 신뢰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친밀한 관계가 탄생한답니다. 당신은 오늘 나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였어요, 제시카.

당신의 비밀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예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죠.   p.105

 

'뉴욕 시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가 진행하는 윤리 및 도덕성에 대한 연구에 참여할 18~32세 여성을 찾고 있습니다. 고액의 사례금 지급. 익명 보장.' , 당신이라면 이 실험에 참가할 의사가 있을까. 그럴 생각이 없다면, 돈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 가장 사적인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심리 실험에 참여하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 여덟 제시카 패리스는 방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그 날도 예약 고객을 만나 메이크업을 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설문조사에 참여할 학생들을 모집했고, 설문지 작성 만으로 5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금액이면 제시카가 열 건을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고, 그녀는 형편이 어려웠다. 게다가 부모님 몰래 꽤 오랫 동안 여동생의 상담 치료 비용을 대고 있는 중이었다. 여동생은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지 능력과 신체 능력에 문제가 생겨 치료가 필요했다. 결국 제시카는익명 보장사례금 지급이라는 조건에 이끌려 뉴욕대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실즈 박사가 진행하는 심리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의 설문 조사는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당신의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살면서 어떤 부정행위를 해봤는지 이야기해보세요. 안전한 대답을 하거나 겉핥기 식으로 대충 대답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없다. 아끼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어떤 일을 비밀에 부친 적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한 적은 언제였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사적인 비밀을 나누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은 제시카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계속 몰아넣게 된다.

 

 

 

 

누구나 비밀스러운 회한을 안고 살아가지요. 거리에서 보는 타인들, 이웃들, 동료들, 친구들,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어떤 선택은 사소하지만, 어떤 선택은 인생을 바꿔놓기도 하죠.

...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년 후에도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선택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그때가 언제일지를 궁금해하지요.    p.326~327

 

도덕성을 시험하는 문제는 사실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받아야 할 금액보다 더 많이 받았을 때 당신은 그것을 되돌려 주는가. 버스에서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적어서 사람들에게 돌리며 돈을 구걸하는 이가 있을 때, 당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가. 급박한 현장에서 만약 나 하나만 희생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극 중 실즈 박사는 '돈과 도덕성이 교차할 때 인격에 관한 흥미진진한 진실이 밝혀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원초적 이유로 도덕적 기준을 어기곤 한다. 생존, 증오, 사랑, 시기심, 치정, 그리고 돈. 제시카의 솔직한 답변은 실즈 박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급기야 ‘52번 피험자가 아닌제시카한 명을 위한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실즈 박사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지시들이 이어지고, 그와 비례해 보상과 선물, 자상한 심리적 배려도 점점 커져가지만 제시카의 일상은 점점 그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실험과 현실의 경계는 흐려지고, 제시카는 점점 더 실즈 박사에게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 사이의 그녀>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그리어 헨드릭스와 세라 페카넨의 신작이다. 영화화가 확정된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도 출간 전에 드라마 판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시종일관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유발시키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 내며 거듭되는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던 전작만큼이나 <익명의 소녀>도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이다. 제시카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실즈 박사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어 독자 역시 극중 제시카처럼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중반 즈음 드디어 실즈 박사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지만, 동기를 알았음에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점점 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불안하고 외롭고 의문에 시달리는 제시카의 복잡한 심리 묘사와 교차로 진행되는 실즈 박사의 감정 묘사가 굉장히 섬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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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조스 레터 -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 주주 서한에서 밝힌 일과 성공의 14가지 원칙
스티브 앤더슨 지음, 한정훈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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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회사들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에만 살아남는다. 뭔가가 잘못되면 금세 현금흐름이 느려지고 자금이 빠듯해지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회사들이감기쯤으로 받아들일 일에 그들은 거의 퇴출 위기로 내몰린다.

반면에 아마존은 예산에실패항목을 배정함으로써 실패가 예견되는 많은 일에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유연성을 발휘한다. 몇 번의 성공으로 여러 번의 실패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실패에서 배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시도를 한다. 그리고 결국 성공으로 이끈다.      p.63

제프 베조스는 아마존을 비즈니스 역사상 가장 빠르게 매출 1,000억 달러를 달성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아마존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작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을 창업할 당시 제프 베조스는 서른 살이었다. 아마존닷컴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는 거창한 홍보 문구를 내세웠고,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아마존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시가총액 기준) 중 하나로 빠르게 성장했다. 아마존의 직원 수는 룩셈부르크, 아이슬란드, 바하마 등 여러 나라의 인구보다도 많은 64 7,000명에 달하며, 2018년 아마존의 기업 가치는 무려 1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브 앤더슨은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가 22년간 주주들에게 보낸 21통의 연례 주주 서한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그 속에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성장 사이클' '14가지 성장원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멀찍이 따돌리고 압도적인 세계 1등 부자가 된 베조스는 1년에 한 번 아마존 주주들에게 주주 서한을 보냈다. 일명 '베조스 레터'라 불리는 편지에는 1년간 아마존이 일군 실패와 성공에 대한 분석을 비롯해 앞으로의 비전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1997년과 2018년 사이에 작성된 21통의 베조스 레터를 분석했고, 그 기간 동안 아마존의 운영 방식과 경이적인 성장을 이끈 요인과 그 비결을 파악했다. 일과 성장의 14가지 원칙은 개인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거대 IT 비즈니스에까지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과 성장,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그 요소는 바로 사람이다. 헨리 포드, 토머스 에디슨, 스티브 잡스, J.K.롤링 등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인물들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핵심은 베조스와 여러 사람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위험과 성장의 마인드를 갖게 되면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중요한 것은 '위험과 성장의 마인드'.   p.269

아마존의 창업자이자 CEO인 제프 베조스를 당신의 비즈니스 코치로 초빙했다고 상상해보자. 누구나 그의 통찰력과 경험을 배워서 자신의 비즈니스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계기로 삼고 싶을 것이다. 이 책이 바로 그 제프 베조스의 경영 철학에 대한 가이드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마치 아마존 밀림 깊은 곳을 탐험하는 고고학자처럼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존의 성장 원칙은 크게 테스트, 구축, 성장 가속화, 확장이라는 카테고리로 정리해볼 수 있다. 전략적 테스트를 통해 아마존이 성장하는 데 기여한 세 가지 원칙은 성공적인 실패를 장려하고, 큰 아이디어에 배팅하고, 역동적인 발명과 혁신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미래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세 가지 원칙은 고객에 집착하고, 장기적 사고를 적용하고, 플라이훨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한 네 가지 원칙은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고,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기술로 시간을 단축하며, 주인의식을 고취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마존의 확장에 기여한 네 가지 원칙은 기업문화를 유지하고, 높인 기준에 집중하며, 중요한 것을 측정하고, 그것을 의심하고, 직감을 신뢰하고, 항상 '데이원'이라고 믿으라는 것이다. , '테스트하라-구축하라-가속화하라-확장하라, 그리고 이를 반복하라'로 이어지는 성장을 위한 4단계와 14가지 원칙이 실제 제프 베조스가 직접 쓴 베조스 레터들을 소개하면서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멀찍이 따돌리고 압도적인 세계 1등 부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제프 베조스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면, 성장을 위한 최고의 코칭이자 지침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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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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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 재능이 신의 섭리로 주어진 것인지, 엄마의 강철 같은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득한 것인지, 아빠의 호신술 교육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내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자연적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터에서 위용을 떨치는 장군들의 자질과 유사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고, 복수심을 품고, 차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재능.    p.19

열여섯 소녀 리사는 어느 날 학교에 가던 길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된다. 그녀는 현재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상태로, 부모님은 그 동안 까맣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변호사인 엄마는 지난 몇 달간 재판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 남부지법에서 보냈고, 해군 특수부대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빠는 유방암 치료에 관한 책을 의뢰 받아 한창 집필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리사는 부모의 무관심을 탓할 생각도,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에 대해 실수로 치부할 마음도 없었고, 임신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 당당한 소녀였다. 하지만 산부인과 진료 예약을 하루 앞둔 월요일,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고, 그들은 돈이나 리사가 아니라, 아기를 원했다. 몸값을 요구하는 흔한 유괴범으로 보이던 일당은 사실 임신한 소녀들을 납치해 출산 후 아기를 팔아넘기고 산모는 죽이는 인신매매범이자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리사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공포에 빠지는 대신 분노한다. 그리고 철저한 계산과 준비 하에 과학적으로 탈출 작전을 세우고, 그들에 대한 복수 계획을 치밀하게 짜기 시작한다. 보통 밀실에 혼자 갇혀 지내다 보면 무서워하고, 공황상태에 빠져 자포자기하거나, 두려움에 넋을 잃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것도 성인이 아니라 열여섯 소녀라는 점 때문에 리사라는 캐릭터는 더욱 놀랍다. 사실 리사는 평범한 십대 소녀는 아니었다. 소시오 패스로 불릴 정도의 감정 절제력과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는 고도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감금되어 있는 시간 동안의 여정을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처럼 세밀히 거익에 저장해두고, 감금 생활 내내 빠짐없이 돌려보면서 매분, 매초, 매 장면을 분석하고, 그 안에 어떤 실마리나 도구가 있는지 찾는다. 이 작품의 원제인 ‘Method 15/33’은 리사가 연필깎이에 붙여준 번호 ‘15’와 납치 33일째를 조합한, 리사만의 작전명이기도 하다.

십칠 년이 지난 지금, 내겐 좌우명이 생겼다. "무언가를 기다릴 땐 만반의 준비를 하라." 무언가 기다릴 때는 정말로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벽돌 한 장, 모르타르 한 겹, 또 벽돌 한 장, 이렇게 차근차근 피라미드를 쌓아가면서 목표물이 내게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요즘 나는 그 좌우명을 되새기면서, 내가 기다리는 목표는 반드시 실현된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 어떤 의심이나 물리학 법칙, 심지어는 시간이 나를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p.124

현직 변호사인 섀넌 커크는 자신의 법적 지식을 활용, 합법적이면서도 잔인한 피해자의 복수 방식을 서술하며 위협적인 남성 가해자와 연약한 여성 피해자라는 범죄 소설의 틀을 과감하게 비틀었다. 덕분에 그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신기원을 마련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무엇보다 스릴러 장르에서 전무후무한, 아주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점에 있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리사는 초등학교 1학년때 반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울지도, 펄쩍 뛰지도, 비명이나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침입자가 총을 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패닉에 빠진 선생님 대신 침착하게 경보를 울렸다. 그녀는 기쁨이나 무서움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닥쳐오면 마음속에 있는 스위치로 그것을 끄거나 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납치당한 순간에도 이동시간을 계산하고, 지극히 한정된 풍경과 냄새, 소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감금된 곳에 있는 몇 안 되는 도구들로 탈출 작전을 짜는 소녀 캐릭터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연필깎이, 뜨개바늘, 담요 등등의 평범한 도구들이 어떻게 무기가 될 지를 지켜보는 과정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뀌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여타의 납치 스릴러의 공식을 깨버리는 작품이라 인상적이었다. 열여섯 살 소녀의 완벽한 복수극이 궁금하다면, 납치 스릴러의 온갖 클리셰를 부수고 전복하는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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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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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진짜 나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지?”

“당연히 알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나를 닮은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욕실에 들어가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도 하고 거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그게 나라는 걸 미양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다시 물었다.    p.58

아내는 처음에 남편에게 단순한 건망증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잊어 버리거나, 약속을 잊고 다른 약속을 잡는다거나 하는 등 자주 무언가를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외출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 아무리 찾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데리고 산책을 나가려고 했는데 '우리 개'가 보이지 않는다며 혹시 당신이 데리고 나간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개라니, 어떻게 그걸 잃어버렸다는 걸까. 애당초 키운 적도 없는 그것을 남편은 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걸까. 게다가 아내는 종종 자신의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얼마 전 시내에서 그를 마주친 날 아내는 집에서 남편에게 종일 연구실에만 있었냐고 묻지만, 그는 당연한 듯이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남편을 믿고 있다고 자신했던 아내는 점점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홀수 장이 아내의 시선으로 남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짝수 장은 남편의 시선으로 아내의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물론 교차 진행되는 이 이야기 속 부부는 서로 완전히 다른 커플이다. 소설가인 나는 아내와 취향도 성격도 달라 자주 다투곤 한다. 별 것 아닌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금세 미안해하고 화해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다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며 나에게 보여준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실린 남편을 찾는다는 게시글이었는데, 그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여기저기에서 목격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려니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내가 있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면, 어딘가에 정말 나를 닮은, 혹은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쓰는 나와 어딘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럼에도 결국 나와는 다른 타인이었다.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떤 곳으로 그들을 보내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지, 무엇을 바라는지 등을 오래 추론하고 고민해보았다. 그들을 이해해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그럼에도 그것도 다 소설이지 않나. 픽션, 허구, 거짓말이라고, 그거 어차피 다 지어낸 거라고.    p.111~112

아내는 개를 잃어 버렸다고 믿고 있는 남편을 위해 강아지를 새로 구해 집으로 데려오지만, 남편은 이건 우리 개가 아니라며, 대체 우리 개는 어디 있냐고,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처음부터 그들은 개를 키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내는 낮에 연구실로 전화를 했는데, 왜 거기 사람들이 아무도 당신을 모르냐고,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왜 약을 먹지 않느냐고, 당신은 아픈 사람이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모두 다 소설 속 이야기일 뿐, 그냥 당신이 그렇다고 믿는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말이다. 대체 어느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편 소설가인 나는 게시판에 올려진 글의 내용이 자신이 쓴 소설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라, 그 여자에게 연락해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정작 찾아간 여자의 집에서 나를 남편처럼 대하는 여자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지고 만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증명해내야 하는 것일까.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벌써 열아홉 번째 작품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2019년 『현대문학』 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것으로,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이후 임현이 두 번째로 발표하는 책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무너져가는 결혼생활과 마침내 내가 아닌 나의 삶과 만나는 순간 겪게 되는 정체성의 붕괴를 촘촘히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짧은 분량이지만 여러 번 다시 되돌아가 읽게 만든다. 삶과 허구,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신빙성의 우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서로 경계를 모르고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은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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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이 설계한 사소하고 위대한 과학 - 슈퍼 히어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세바스찬 알바라도 지음, 박지웅 옮김 / 하이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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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등장하는 개미는 크기가 작다는 이점을 이용해 감시 카메라를 무력화하는 잠입 요원으로 활동하거나, 비밀 서류를 숨기거나, 함정에 빠진 앤트맨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행크 핌은 이러한 장점을 이용하는 대신 일부 개미를 선별하여 거대화 한 다음 개미 보병으로 활용했다. <앤트맨> 그리고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파란색 핌 입자를 이용하여 크기가 커진 개미를 볼 수 있다.    p.54~55

수많은 마블 영화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과학적 기술이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언젠가는 저런 기술들이 실제로 가능해질까?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호기심을 해소해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정제 단백질을 이용한 웹 슈터로 거미줄을 쏠 수 있는 걸까? 묠니르를 휘둘러 번개를 불러낼 때 토르의 머리 주변에 작용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현실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영화 속 과학 기술들이 진짜라면 어떨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말한다. 놀랍게도 영화에 등장한 거의 모든 기술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 책은 마블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43개의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 마블의 과학 설정과 이에 대응하는 현실의 기술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절대 목표를 놓치지 않는 호크아이의 놀라운 궁술, 더듬이를 통해 다른 생명체의 감정 상태를 보고 제어할 수 있는 맨티스, 히드라 소속 과학자에게 세뇌 당해 기억이 말소된 버키, 병약한 스티브 로저스가 단 몇 분만에 완벽한 신체를 가진 강력한 캡틴 아메리카로 변하게 되는 원리 등 마블 영화에 숨어 있는 과학 상식을 파헤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브루스 배너는 감마선을 조사하는 실험에 실패하면서 헐크가 된다. 무기나 슈퍼 솔저를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단지 방사선에 대한 세포의 회복력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장비의 오작동으로 감마선이 배너의 체세포에 영구적인 변형을 일으켰다.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사무엘 스턴스 박사는 헐크 변신이 배너의 편도선에서 나오는 감마선 펄스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여기까지 보면 감마선은 마치 일반인을 화가 잔뜩 난 괴물로 바꾸는 촉매 역할을 하는 듯하다.    p.254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스티브와 버키는 오랜 기간 냉동 상태로 있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늙지 않은 채 소생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람이 캡틴 아메리카나 윈터 솔저처럼 단 하루도 늙지 않고 수십 년을 살 수 있을까? 슈퍼 히어로인 이들과는 다르게 사람은 당장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장기가 기능을 멈추고 호흡 부전과 심부전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추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 이들에게 적용되었던 상상의 냉동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현실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오랜 소망이다. 실제로 의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못 고치는 병이 없는 시대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냉동 인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몇 군데 있다. 현재 다양한 동물을 대상으로 동면 시작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전임상 연구가 진행 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현존하는 과학과 영화 속 상상력의 유사도를 비교해보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기도 한다. 저자는 과학자의 눈으로 마블의 각종 설정을 바라보며 리얼한 현실 과학을 풀어놓는다. 히어로가 된 블랙 팬서와 빌런이 된 킬몽거에게서 유전학을,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져에게서 냉동 인간 기술을, 타노스의 리얼리티 스톤에서 광학을 찾아 낸다. 저자는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엑스맨의 초능력을 형성하는 유전 원리를 이해하고 싶다는 거였다고 말한다. 초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과학자가 되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니,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명확히 보인다. 과학은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 상상력 속에 미래가 담겨 있다. 마블의 매력적인 영화들을 보면서 한 번쯤 슈퍼 히어로들의 능력과 탄생 배경에 호기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영화적 상상력에서 출발해 현실의 과학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 마블의 영화들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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