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때가 왔어.'
그 순간 그레이는 마침내 모든 것이
기억났다. 꿈, 그리고
격납실에 앉아 제로를 바라보고, 제로의 목소리를 듣고, 제로의 이야기를 듣던 매일 밤이.
뉴욕도,
매일 밤 바뀌던 여학생들도 기억났고, 어둠이 자신의 몸속을 타고 움직이는 것, 그들을 덮칠 때 턱에 느껴지던 부드러운 쾌감도
기억났다. 그는 그레이인
동시에 그레이가 아니었고, 제로인 동시에 제로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곳에 있었고 아무 데도 없었다. -1권,
p.297
앤서니 로이드 카터는 약물 주입 사형을
선고 받은 수감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잔디를 깎는 일을 시키던 고용주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레이철 우드를 살해한 죄로 지난 1332일간 교도소 격리관리구역에 수감되어
있었다. 사형 집행일은
머지않았고,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마음을 텅 비운 채 누워 있는 채로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를 면회하러 온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년 전 살해된 여자의 남편이 찾아왔던 뒤로 그를 면회하러 온 사람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그를 찾아온
건 특수요원 울가스트와 도일이었다. 군에서는 '노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약물
실험 3단계에
참여할 10명에서 20명
정도의 사형수를 구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으로 형이 낮아진다.
이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프로젝트라 이들은 서류상으로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고, 이후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다.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커튼 뒤에 숨겨져 있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 번째 선택지를
받아들이든지..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찾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사형수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비밀 시설로 옮겨진다. 한편 그럭저럭 임무를 해가던 울가스트에게
엄마로부터 버림받아 수녀원에 있는 여섯 살 소녀 에이미를 마지막 실험체로 데려오라는 연락이 온다. 그는 사형수가 아니라 일반인, 그것도 어린 소녀를 실험체로 사용한다는 것에
반발해 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이 소녀는 이후에
'천 년을 산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자'가 될 예정인,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또 다른 자'가 있었다. 제로도, 트웰브도 아닌 '또 다른 자'. 같은 것인 동시에 다른 것. 자세히 보려고 정신을 집중할 때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새처럼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 뒤의 그림자. 그리고 그의 자손이자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동료인
'다수'
역시 그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가 끌어당기는 거센 힘을 느꼈다. 오래전 어린 시절, 담배의 발갛게 불타는 끝이 살에 짓눌리고 불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던 그
무력한 사랑처럼.
-2권, p.304
만약 세상에 암도, 심장병도, 당뇨병도, 알츠하이머도 없다면 인간의 수명은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을까? 노화를
늦추고, 오래 살고자 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욕망이었다. 뱀파이어의 이빨, 피를 향한 굶주림, 어둠과의 영원한 결속. 만약 이런 것들이 단순히 판타지가 아니라 어두운 힘을 인간의
DNA에 아로새긴 영겁의 기억이라면? 다시금 깨워내고, 제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그런 힘이라면 어떨까. 정부는 남아메리카의 희귀한 박쥐에게서 추출한 바이러스가 모든 질병에
맞서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아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노아 프로젝트'의 목표는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발견하는 거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이름을 따 ‘노아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이 프로젝트는 사형수들을 실험체로
모집해 약물 실험 3단계를
비밀리에 시행한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주입 받은 사형수들은 온 몸에서 녹색 빛을 발하며 사람이 바깥으로 풀려나게 되면서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다. 이는 하나의 세계가
죽고 다른 세계가 태어나게 되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 작품은
<패시지>,
<트웰브>,
<시티 오브 미러>로 구성된
'패시지
3부작'의
1부에 해당된다. 1권이
528페이지,
2권이
576페이지인 작품이
1부이니,
2부,
3부 역시 각각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일 것이다. 게다가 글자 크기가 작고 빽빽한 편이라 읽기에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서사
자체도 여느 판타지 작품들에 비해 밀도 있게 꽉 채워져 있어 어느 한 단락 예사롭게 흘려 보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영화로 치면 한 두 장면이면 끝날 엑스트라 급의
캐릭터에게도 각각의 서사를 부여하고, 수십 페이지의 이야기를 만들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애초에 전체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간단히 몇 줄로 줄거리 요약을 하는 것이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흔히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장르를 예상했을 때의 그런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 굉장히
묵직하고, 깊이 있는 서사를
들려주고 있는 놀라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쉽게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재미있다.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 앞에서 인류를 구원할 소녀 ‘에이미’가 떠나는 거대한 여정의 이제 첫
걸음이다. '패시지 3부작'의 다음
작품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