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는 미술관 - 나만의 감각으로 명작과 마주하는 시간
오시안 워드 지음, 이선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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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은 '유레카'의 순간처럼 갑자기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훑어 보고, 샅샅이 살펴보고, 골똘히 바라보아야 이해된다. 하지만 몇 단계를 거쳐 이해하고 나면 그 작품의 의미나 다른 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눈앞의 수수께끼를 풀었고, 몇 분 동안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그림 속 이야기나 인물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을 수도 있다. 어려운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누구, 무엇, 어디를 그렸는지 어느 정도 파악했을 수도 있다.    p.31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고, 집에 좋아하는 그림을 걸어두고 보기도 화며, 가끔은 미술과 그림 읽기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미술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명작'들이야 그다지 어렵지 않겠지만, 난해하고, 추상적인 그림들도 많으니, 사실 그런 작품들을 해석하는 것은 감상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림을 본다. 왜냐하면 그림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위로와 감동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주 사적이고도 특별한 그림 감상법을 제시하는 '고전 미술 가이드'이다. 저자가 큐레이터로 일하며 미술 평론가로 활동 중이라 매우 전문적이지만, 그만큼 신선하고 색다른 그림 읽기를 보여 준다. 저자는 인식론에서백지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인타불라 라사TABULA RASA’ 10가지 키워드로 풀어내 우리에게 하나의 감상법으로 제안한다. T 'Time(시간)', A 'Association(관계)', B 'Background(배경)', U 'Understand(이해하기)', L 'Look again(다시 보기)', A 'Assess(평가하기)이다. 그리고 나머지 'Rhythm(리듬)', 'Allegory(비유)', 'Structure(구도)', 'Atmosphere(분위기)'라는 뜻이다. 마주하는 시간Time, 작품과 나와의 관계Association, 작품을 이루는 배경Background, 이를 통해 이뤄지는 이해Understand까지 되고 나면 다시 보는 과정Look Again이 이어지고, 마침내 평가Assessment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는 식이다.

아름다움은 너무 케케묵은 개념 같아서 우리는 요즘 거의 입 밖에 내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 미술에서는 거의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조건이 되었지만, 고전 미술은 아름다움만으로 평가될 때가 너무 많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능수능란하게 묘사한 고전 미술 작품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고전 미술 전시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전원 풍경이나 멋있고 정교한 그림들이 넘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시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보통 평범하고 진부한 감상평밖에 말하지 못한다.    p.145

그렇게타불라 TABULA'에 해당하는 키워드까지 잘 따라가면, 이제 틀을 깨고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어지는 키워드는 '라사 RASA'에 해당되는 단계들이다. 그림의 역동성을 만드는 리듬Rhythm과 작가가 몰래 건네는 메시지를 담은 비유Allegory, 보이지 않는 액자인 구도Structure까지 살펴보고 나면 우리 앞에는 명작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Atmosphere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20세기 이전의 위대한 작가들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고전 미술 작품 앞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다른 시대와 장소로 건너가지 못한 채, 역사와 수수께끼, 이야기와 신앙과 우상으로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작품은 그저 알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니 말이다. 이 책은 적어도 그러한 작가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우리는 보통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말이나 글을 통해 정보를 어느 정도 얻고 나서 감상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정보를 얻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으로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술작품을 읽으려고 노력하기 전에 보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낯선 단어를 10가지 키워드로 풀어내어 설명하는 방식이 낯설거나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각각의 키워드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추상적이지도 않고, 어려운 용어들을 남발하지도 않으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쉽게 쓰여 있다. 그러니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당장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가 없어서 그림에 대해 모를수록 더 잘 보이고, 낯설수록 더 재미있다면.. 누구라도 정보나 선입견 없이 오롯하게 그림 그 자체를 스스로의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한 번쯤은 나도 미술을 '읽지 않고도 제대로 보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책이 놀라운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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