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가까운 곳에서 저 먼 곳까지 커다란 검은 점들이 서서히 뜨거운 햇볕 아래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셴 할아버지는 자기 집 밭머리에 섰다. 공허한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나이 일흔둘의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의 마음이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 같은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연원일' 중에서, p.19

요우쓰댁은 열일곱의 나이에 시집을 와서 열여덟 살에 첫아이를 출산하고, 평균 한 해 반에 하나씩 딸들을 낳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세 딸이 모두 저능아였던 것이다. 게다가 몇 년 뒤에 낳은 아들마저 저능아로 확인되자, 저능아인 아이 넷과 평생을 살아가야 할 세월이 막막한 남편이 죽어 버리고, 요우쓰댁만 남겨진다. 세월이 흘러 첫째와 둘째는 지능이 낮긴 하지만 병만 발작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남편을 찾아 가정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한창 수확을 하고 있는 이 시기에 셋째 딸이 언니들처럼 남편을 갖고 싶어 해 요우쓰댁은 온전한 남자를 찾아 주기 위해 여러 마을을 찾아 다닌다. 어렵게 멀쩡한 사위를 구하게 된 요우쓰댁은 집안에 있는 양곡들을 다 퍼주며 셋째를 시집 보내는데, 이번엔 둘째 사위가 찾아와 임신한 둘째가 발작이 빈번해졌다며 걱정을 한다.

그는 꿈속에서 둘째의 발작 증세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데, 죽은 사람의 뼈를 고아서 마시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까운 친척의 뼈일수록 좋다고 말이다. 그래서 요우쓰댁은 남편의 무덤을 파러 간다. 이 작품의 제목은 '골수'이다. 자식은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자라는 존재라는 것을 옌롄커 식으로 해석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처해 있는 가혹한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너무 극단적이라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부조리 서사의 대가'로 불리는 작가답게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불합리한 현실 세계 속의 풍자와 해학으로 빚어져 있다.

남편이 죽었다. 앞으로의 세월에 놀라서 죽어버린 것이다. 남편이 죽자 일상 속의 빛이 휙 하고 어둠으로 바뀌었다. 농번기에 가래를 메고 곡괭이를 들 사람이 없어졌고, 농한기에 무료함을 달랠 이야기 상대가 없어졌다. 겨울에 물 항아리가 얼어서 갈라지면 철사로 동여매 그 틈을 막는 일도 요우쓰댁 스스로 해야 했다.   

-'골수' 중에서, p.166~167

옌롄커는 집필하는 작품마다 판매나 홍보가 금지되면서도 중국 평단과 대중은 물론, 세계 문학계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온 문제적 작가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사서>, <딩씨 마을의 꿈>들은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옌롄커가 지금까지 발표한 70여 편의 중·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 네 편을 직접 골라 한데 모은 것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중국 농촌에서 악전고투하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룬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의 절망과 고통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내용만 보자면 매우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색다른 웃음과 위트를 자아내고 있어 읽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다.

옌롄커는 가혹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을 섬세한 필치와 회화적인 시어로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단한 삶의 굴레 앞에선 인간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어느 순간 초현실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거대한 서사가 완성된다. 시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묘사, 그리고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만남은 끝내 먹먹한 감동을 남긴다.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쓰는 작가 옌롄커, 그의 다음 작품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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