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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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의 구시가는 동화 속처럼 아름다웠다. 좁은 운하가 구불거리며 구시가를 감싸고 있었다. 운하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비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동그란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다 보니 어느새 구시가의 한복판에 있는 마르크트 광장이 나왔다. 이 광장에 면한 골목길에 페르메이르 기념관이 있다. 여행지에서 길을 찾는 데는 영 젬병인 내가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닿을 정도로 델프트는 작은 도시, 아니, 마을에 가까웠다. 저 투명한 물빛과 하늘빛을 화가도 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마음속에서 적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p.90~91

 

클래식 클라우드 그 스물 한 번째 작품은 바로 '페르메이르'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 <우유를 따르는 하녀> 등의 작품으로 너무도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화가이기도 하다. 200년이 넘도록 기억에서 잊힌 채 그저 델프트의 화가로만 남아 있었고, 사후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그의 작품들이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지만, 동시대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약 2,000점의 작품을 남긴데 비해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단 30여 점 정도만 남아 있다. 그렇다면 1675년 사망한 후 200년 넘게 망각 속에 가라앉아 있던, 베일에 싸인 페르메이르의 삶과 내밀한 작품 세계가 어떨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클래식 클라우드는 수백 년간 우리 곁에 존재하며 '클래식'으로 남은 세계적 명작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들에 좀 더 쉽게 다가가 지금 여기, 우리의 눈으로 공감하며 체험할 수는 없을까. 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문학, 예술, 철학,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국내 최대 인문기행 프로젝트는 12개국 154개 도시를 우리 시대 대표 작가 100인을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셰익스피어, 니체, 클림트로 시작되었던 여정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작된 지 이 년이 넘었고 어느 새 스물 한 번째 작품에 이르렀다. 이번 '페르메이르' 편은 초반에 '클림트' 편을 함께 했던 전원경 작가가 다시 여정을 함께 해 더 반가웠다.

 

 

우리가 희미한 과거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그 모습은 아마도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이 보여주는 세계와 엇비슷할 것이다. 한때 우리는 그토록 맑고 온화하며 신실한 세계에 속해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 〈진주 귀고리 소녀〉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이 주는 깊은 아름다움과 아련한 슬픔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제 다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지나간 날들에 대한 우리의 영원한 그리움이다.     p.276

 

이번 클래식 클라우드의 여정은 페르메이르가 태어나 자라고 평생 활동했던 델프트에서 시작해 그의 작품 <골목길>과 <우유를 따르는 하녀>가 있는 암스테르담, <진주 귀고리 소녀>, <델프트 풍경>이 있는 헤이그를 거쳐 <회화의 기술>이 있는 빈, 그리고 만년의 그림들이 있는 런던에 이르기까지 거장의 흔적을 따라나선다. 뿐만 아니라 페르메이르의 모든 작품을 수록했고, 전원경 작가가 세심하고, 깊이 있게 그림들을 읽어 내고 있어 그야말로 페르메이르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책이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 대해 흔히들 '그림이 반짝거린다'는 식의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 광채 뒤에 숨어 있는 화가의 치밀한 연구와 색 배합, 빛의 효과를 사용하는 방법 등을 전원경 작가가 심도있게 설명해주고 있어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그림의 기법을 알려주고, 그림 속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의미를 해석해주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는 방식이라 마치 전문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여름날 아침의 풍경에서 천국을 끄집어낼 수 있는 화가가 페르메이르'라면,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 버리는, 그래서 놓치고 마는 그림 속 비밀들을 전원경 작가가 짚어내 주고 있는 진짜 여행 가이드인 셈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매번 거듭될수록 더 깊이 있어지고, 원숙해지고 있다. 덕분에 앞으로 계속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 작품들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을 만나 보자. 왜 <진주 귀고리 소녀>가 보는 이를 대번에 매혹시키는지, 평범한 풍경에 어떻게 놀라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인지, 이름은 잊히고 작품은 흩어진 화가의 진가가 되살아난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수수께끼로 가득한 페르메이르의 삶과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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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개정증보 2판) - 복잡한 세상 명쾌한 과학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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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되는 일보다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더 나은 상황이란 언제든지 있게 마련이니까. 일이 안 될 때마다 우리는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나는 굉장히 재수가 없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로버트 매슈스의 계산은 그것이 '재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머피의 법칙은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말해주는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법칙이었던 것이다.     p.47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라는 케빈 베이컨 게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왜 하필 토스트는 버터 바른 쪽으로 떨어질까? 과연 머피의 법칙은 우리의 착각이었던 걸까?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뇌를 15퍼센트밖에 못 쓰고 죽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바흐에서 비틀스까지, 히트한 음악에는 프랙털이라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  복잡한 도로에선 차선을 바꾸지 않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정체 현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이다? 등등..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복잡한 사회현상 뒷면에 감춰진 과학적 진실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웃음의 사회학부터 쇼핑의 과학까지, 크리스마스의 물리학에서 복잡계 경제학까지' 과학이 인문, 심리, 사회, 경제, 미학, 의학 등을 만나 유쾌한 한 편의 교향악을 만들어 낸다. 과학 책은 따분하고 어렵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일상과 과학의 만남을 주선한 대단히 흥미진진한 책이다. 저자는 물리학자는 뭘 하는 사람들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신경세포 하나에서부터 도시 문명에 이르기까지, 작은 원자 하나에서 거대한 우주까지,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호기심의 촉수를 평생 뻗고 있는 못 말리는 탐험가들' 이라고. 그리고 이 책이 바로 그 증거이다.

 

 

빅토르 위고는 이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 알갱이들의 패턴이 혹시 우주 탄생에 대한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는 이미 100여 년 전에 모래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 속에 수많은 물리 법칙들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그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물리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증명됐으며, 최근 우주 성운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p.230~231

 

'콘서트'라는 제목답게, 구성 또한 전체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악장, '매우 빠르고 경쾌하게'에서는 조금 가볍게 일상생활 속에서 유행했던 게임, 법칙, 뉴스 등으로 시작된다. 2악장, '느리게'에서는 현대 미술, 대중 가요 등 문화 전반적인 곳에 숨겨져 있는 과학법칙들을 살펴보고, 3악장, '느리고 장중하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에서는 심리학, 경제학, 주식, 교통 등 사회의 이곳 저곳에서 과학을 읽어 낸다. 마지막으로 4악장, '점차 빠르게'에서는 소리, 리듬, 뇌파에 관한 공학과 함께 산타클로스의 진실을 밝혀주는 크리스마스 물리학이 등장해 대미를 멋지게 장식해준다. 그렇게 복잡한 세상에 관한 과학자들의 길고 긴 연주가 끝이 나면, 두 번의 커튼콜이 이어진다. 책이 출간되고 10년이 지난 시점에 쓴 커튼콜과 20년이 된 이번에 쓰여진 커튼콜이다. 이 책의 커튼콜은 단순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한 작가의 말 정도가 아니라,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하나의 챕터를 구성해도 될 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지금부터 다시 10년 후 저자의 세 번째 커튼콜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국내 과학책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가 출간된 지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이번에 출간 20년을 기념해 개정증보 2판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게 되어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왜 이 책이 '가장 사랑 받은 국내 과학책 1위’로 손꼽힐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학창 시절 이후에는 딱히 접할 수 없었던 과학의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데, 일반 독자들이 과학 교양서로 읽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책이다. 특히 이번 개정증보 2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바로잡고 새로 수록된 원고지 100매 분량의 ‘두 번째 커튼콜’을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된 내용들을 대거 보완했다. 생생한 과학 도판과 풍부한 설명을 추가했고, 새로운 표지와 판형, 완전히 달라진 편집 체제로 출간이 되었으니 그 동안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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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
김현 외 28인 지음 / 알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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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심들도 쉽사리 맺히지 않는 이상한 시간이었다. 무기력함 속에서 이 세계를 빠르고 확실하게 실감하는 일이 필요했다. 다가갈 다음이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가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것이기에 시간이 물려주는 청바지를 입고, 유행이 지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약속 없는 저녁에 홀로 먹을 맛있는 레몬크림케이크를 사 가지고 돌아온다. 써야 할 글들이 넘쳐나고, 읽을 것은 더 이상 쌓일 수 없어서 고독을 놔두지 않는다. 고독이 고독으로 향하게 하는 환한 터널을 짓는다.     p.57

 

이 작품은  '팬데믹 블루의 시간을 견디는 독자들을 위한 특별한 책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17명, 그림 작가 12명 등 모두 29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가 탄생했다. 이 책에는 13편의 에세이, 12편의 시 그리고 18점의 드로잉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판형도 작고,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니 새삼 감탄하면서 읽었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양방향에서 시작되는 구성인데, 에세이로 시작하는 표지와 시로 시작하는 표지가 각각 다르다. 앞표지와 뒷표지는 거꾸로 되어 있으며, 책 하단의 쪽수도 에세이, 드로잉, 시를 각각 E, D, P로 각각 쪽수 앞에 두어 쉽게 장르를 구분하고, 찾을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다. 시와 에세이, 그리고 드로잉을 한 책에 담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히 신선한 느낌이었는데, 그것들이 이렇게 독특한 구성과 또 너무나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수록되어 있는 작품 중에 에세이 한 편과 드로잉 작품 몇몇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신작이라 작가들이 바로 지금의 일상을 우리와 함께 겪으면서 써 내려간 글들이라 더욱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에세이를 읽다가 중간에 드로잉 작품들을 거쳐 시를 읽고, 위아래가 자연스레 뒤집히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선물 같은 책이기도 했다.

 

 

사태가 사고를 배반할 때, 즉 일어난 일이 떠오른 이유를 무효로 만들 때 언어가 먼저 부러진다. 이야기를 잃고 단어들로, 원초적 외마디 비명들로 흩어진다. 문명이 무너져 벌거벗은 대지로 돌아간 자리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은 좌절된 언어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호명할까? 어둠을 밝히던 언어의 호롱불이 홀연 꺼졌다. '이제까지'가 '앞으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폭풍에 부서진 배들은 떠나온 항구로 되돌아가려고 하지만 엔진은 고장 나고 나침반은 망가졌다. 이로부터 하나의 세계가 소진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p.80

 

작년 말 갑자기 출현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단 몇 개월 만에 전 세계의 일상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느새 올 해도 반이 훌쩍 지나 버렸지만, 여전히 세계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상황이 아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각종 모임이며 공연들은 물론 여행을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되었으며, 집 안에 갇혀버린 채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학교들이 개학이 연기되고, 직장인들의 재택 근무가 이어지던 몇 개월 전보다는 분위기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확진자로 인한 뉴스 가 연일 보도되고 있으니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과 우울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작가들의 안부와 위로, 그리고 응원의 메세지이다.

 

작가들 역시 우리들처럼 코로나로 인해 방콕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 또한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찹쌀가루와 메줏가루, 엿기름을 사와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고추장을 담그느라 씨름하고, 코로나로 인해 자주 가던 대학교 도서관이 폐쇄되어 글을 쓰기 위한 카페를 찾아 다니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강제된 고독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 간다. '악몽을 나눠 갖는 사이'를 가족이라 부른다는 문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코로나가 언제 끝이 날지, 백신이 언제쯤 나올지 알 수 없고, 당분간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시기에 '서로에게 기꺼이 일상의 안녕과 평온한 기쁨을 건네는 집'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살만한 거 아닐까. 카프카는 말했다. 집을 나갈 필요가 없다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저절로 찾아올 거라고. 집에서 나가지 않고 세상을 기다려보는 동안, 이 책과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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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 과도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아름다운 지적 여정
나탈리 크납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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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시기는 저만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미래의 결과로 측정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순간들에 삶이 우리에게 예비해준 것을 포착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맞게 변화시켜서 다시금 내주는가가 중요하다. 아이가 아이인 것은 성공적인 직장인이나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로 세상을 경험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는 우리를 밝아지게 한다. 아이들의 웃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량할까.    p.32

 

과도기란 누구나 겪는 과정이면서,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시기이다. 내가 잘 알던 삶에서 낯선 세계로 발을 내딛을 때,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으로 변화를 겪게 될 때 우리는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나가야 할 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과도기가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이 책은 과도기에 대한 깊은 탐색과 빛나는 통찰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과도기를 보내기 위해 어떤 조건과 전제가 필요할까. 저자는 이 책에서 공간적, 계절적 변화에 대처하는 자연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 어떤 어두운 때에도 희망을 품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탄생에서 사춘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겪게 되는 불확실한 시기들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의 모든 시기는 바로 그 순간에만 취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계획이 빗나갈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할 때, 그렇게 인생길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순간, 삶은 새로워진다.

 

 

위기의 시기, 살아 있음을 향한 동경은 고통 또는 공허감으로 느껴지고 때로는 중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통은 우리에게 뭔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공허감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준다... 철학자 아리아드네 폰 시라흐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자아와 욕구를 넘어서는 것들이다"라고 말한다. 공동체, 모험, 열정, 헌신, 용기, 사랑. "그냥 경직된 채 여기서 모든 것이 어떻게 나빠져가고 있는지를 응시하는 대신,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내야 한다."     p.341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이런 책을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탈리 크납이라는 저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저자인 나탈리 크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독일 철학자인데, 현재 독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동안 철학의 역사나 이론, 그 외에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이렇게 재미있고, 공감되고, 우아한 철학 책은 처음이다. 철학을 이런 방식으로 소개할 수도 있구나 라는 놀라운 깨달음과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 순간 철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되어 위로 받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삶에서 과도기적 순간들을 읽어 내고, 존 윌리엄스의 소설《스토너》,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미하엘 엔데의 《모모》 등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과도기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어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철학적 사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개인적인 변화의 시기와 사회적인 변화의 시기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자 나름의 삶에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함께 극복해 나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위기 앞에 서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코로나 사태라는 대미문의 팬데믹으로 문명의 근간이 흔들리는 요즘이니 말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불안한 시기들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를 깨닫고 이런 시기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시기들을 다른 태도로 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지금 같은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에 정말 딱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행복과 절망이 종종 서로 한 뼘 거리에 있음'을 알려주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과도기를 인생 중에 만나는 시적인 지대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시기를 불안하고, 불안정한 시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무척이나 달라질 테니 말이다.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과도기를 창조적 전환기로 만들어내고 싶다면, 정신적 면역력을 키우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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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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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리 결정한 것이 없었고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결정한 것이 없고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 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p.51~52

 

강상호는 1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형 강영호의 유고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열다섯 군데를 소개하는 책을 쓰던 중이었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강상호는 형의 유품들을 정리하다 여러 장의 사진이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을 발견하고, 형이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상호는 출판사 직원과 함께 형이 취재한 여행지들을 답사하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외진 산 속에 있던 천산 수도원을 찾게 된다. 해발 890미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으며, 건물 안에는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긴 복도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둡고 습한 지하방에서 벽에 빼곡히 옮겨진 성경 구절들을 발견한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젊은 강사가 천산에서 발견된 벽서를 중세 유럽 책 중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히는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기고문을 신문에 수록한다. 그런데 켈스와 천산의 필사자들은 왜 글자에 장식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혔을까.

 

열네 살 소년 후는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는 어둑한 밤, 200년 된 키 큰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해안 초소에 근무하는 박 중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밝으면 박 중위가 마을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획한 일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는 품 속에 칼을 움켜쥔 채 사촌 누나 연희의 복수를 하려는 참이다. 박 중위는 온 동네를 떠들고 다니며 연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는데, 정작 연희가 사랑을 받아 주고 나니 그녀를 버렸다. 결국 연희는 괴로워하다 집을 나갔고, 아무도 그녀가 왜 마을을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후는 복수를 위해 박 중위에게 칼을 휘둘렀고, 후의 아버지는 그를 산꼭대기에 있는 천산 수도원으로 대피시킨다. 후는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쓰는 일을 몸에 익혔고, 점차 하늘집의 형제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후는 그곳 형제들의 독특한 믿음과 특이한 삶의 태도에 점차 익숙해졌고, 일종의 평안함 같은 것을 느끼며 그들 속으로 섞여 들었다.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난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사랑의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조절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사랑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사랑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행사된 폭력이 사랑에서 빠져 나왔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리에서 다시 행사된다.    p.125

 

72개의 지하 방으로 이루어진 천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벽서와 함께 시작된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형의 유고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출간된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를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 장의 이야기, 그 속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그리고 사촌 누나 연희를 능욕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게 되는 후의 이야기. 이렇게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섯 개의 이야기는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욕망과 권력, 비극과 정치 등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끼어들어, 어떤 영향력을 주는지를 들여다본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순간 (p.321)'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하게 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견디게 하고, 이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을 넘어서도록 한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종종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2012년 출간되어 201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작가가 십 수 년 전부터 구상했던 모티프가 마침내 실현된 작품으로, 욕망과 죄의식?신학과 실존?윤리와 정치 등 이승우 문학의 화두가 집약된 정점이자 정수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묵직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인데, 이번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 (작가의 말),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 산 자에게로 이어지며 서서히 드러나고, 이들의 '이어 쓰기'가 거듭되는 동안 (작품 해설) 펼쳐지는 신학과 윤리의 세계를 만나 보자. 이승우의 책을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그 한 권은 단연코 <지상의 노래>일 거라는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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