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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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 '작업실' 중에서, p.13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셔츠를 다림질하다 말고 남편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다고.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너무 허황된 소리가 아닌가, 잔뜩 제멋에 겨워 유난을 떠는, 같잖은 요구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쓰는 데는, 타자기나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에 책상과 의자만 있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데다 정원까지 있는 전망 좋고 넓은 집을 놔두고 굳이 글을 쓰기 위한 작업실이 필요했던 이유를, 아마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한 여성에게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바라보지 않는 시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가족들과 집안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숨 쉬고 사유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과 '작업실'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위엄 있고 안온한 분위기가 그녀에겐 필요했다. 물론 아직은 '작가'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습작을 하는 단계였지만 말이다.

 

남편의 반승낙을 받고 그녀는 타자기와 책상, 의자 등 꼭 있어야 할 가구만 갖추고 빈 사무실을 구한다. 하지만 집주인 남자가 매일 같이 찾아와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각종 선물을 가져 오면서, 작업실에 어물쩍 눌러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해서 구한 작업실인데, 그는 결국 그녀의 공간을 침해하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평범하게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의 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던 주부가 가정에만 얽매여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자아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과 혼자 있는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소설집에 수록된 제일 첫 번째 작품 <작업실>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얼굴 들고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겪은 불행이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내가 그것을 즐겼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한 소녀였고 그 사건이 동네방네 소문나면서 상당히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그 토요일 밤에 벌어진 사건들에 나는 매혹되었다. 파렴치하고 터무니없고 철저히 부서뜨리는 부조리를 살짝 맛보고 나서 소설은 아니어도, 삶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여 나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 '하룻강아지 치유법' 중에서, p.177~178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 받는 <런어웨이>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와중에 글을 쓰는 주부가 혼자만의 방을 꿈꾸는 <작업실>, 두 소녀의 동화 같은 스토리 <나비의 나날>,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소녀가 참석한 댄스파티 이야기 <붉은 드레스 - 1946>, 신도시의 주택단지를 배경으로 집값이 떨어지는 걸 걱정하는 지역주민들이 등장하는 <휘황찬란한 집>, 경제 공황의 영향으로 외판원 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등등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삶에서 마주치는 직관의 순간들'이 그려져 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사는 게 다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나 그렇게 먼로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읽어 내게 될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이야말로 내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들은 생생하고, 아름답게 가슴으로, 머리로, 귀로 삶을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먼로의 이야기들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마다, 낱말마다 마법처럼 많은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그래서 작가들이야말로 진정,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고, 더 깊어지며, 더 섬세하게 빛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노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심장을 쿡쿡 찌르는 문장들을 만나 보자. 왜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어떻게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단편소설을 가장 완벽하게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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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숨결
박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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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보이까, 후회를 안 하는 게 중요한 기라. 우리 동네 아들 이제 내 빼고 다 저세상 가 삐렸는데 금마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지가 다시 태어나믄 뭘 할 끼고, 이건 안 할 끼고 다들 이칸다 아이가. 그란데 그게 무슨 소용이고. 진작에 그랬어야재. 안 그러나?"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의 얼굴을 푸근한 미소가 데웠다.
"어르신은 후회하시는 거 없으세요?"
"내라꼬 와 없겠노. 그래도 이제는 마, 혜림이 이렇게 만나 봤으이 내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p.184~185

 

대학생 수아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로 실려 간다. 하필 그녀가 도착한 병원은 혜성대학교병원으로, 그곳은 다섯 달 전 아빠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곳이었다. 게다가 수아는 아빠가 뇌출혈로 죽은 게 아니라, 그 죽음의 배후에 엄마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수아의 병명은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다음달 수술 일정이 잡혔고, 그녀의 주치의로 외과 레지던트 1년차 현우가 배정되었다. 현우는 수아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 그녀의 성격과 달리 너무 적대적이라 이상했고, 아빠의 죽음 이후로 갑자기 수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아는 현우에게 아빠가 엄마 때문에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리를 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현우는 수아의 엄마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모녀 사이를 회복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날 밤의 진실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자신에게 과거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홀로 조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정확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과에서 지난 일을 뒤지고 다니는 레지던트를 좋게 볼 리 없었고, 여기 저기서 항의가 들어오자 담당교수에게 불려가 혼이 나기 일쑤였다. 진실을 밝히려는 그를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과연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방 안에 들리는 거라고는 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뿐이었다.
"진실이 항상 옳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천만의 말씀. 주변을 둘러봐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네? 당장 쌤도 고작 그놈의 진실 땜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실 예정이구. 쯧쯧."
이렇게 죽는 걸까. 이것은 그가 원하던 평화로운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생명의 빛을 잃어 가는 것만큼이나 비극적인 죽음이 또 어디 있을까.    p.403

 

이 작품은 우선 '현직 의사가 쓴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내에서는 아마도 처음 시도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로빈 쿡이나 치넨 미키토 등 일본이나 영미권에는 현직 의사이면서 미스터리, 추리물을 쓰는 유명 작가들이 있지만, 국내에는 의사로서의 경험담을 쓴 에세이는 몇몇 있었어도 메디컬 미스터리로 풀어나가는 경우는 거의 못 보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박상민 작가는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도 수상하신 이력이 있어, 제대로 된 메디컬 미스터리를 보여주시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우선 현직 의사로서 대학병원에서의 근무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쓴 거라, 현실성과 리얼리티는 디테일하게 잘 그려져 있었다. 물론 기존의 메디컬 미스터리들과는 다르게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조금 분위기가 다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여대생과 레지던트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거나 하는 식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미스터리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꽤 두툼한 페이지 내내 의료계 내부의 문제를 폭로하는 식으로 진행되던 서사는 후반부에 이르러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며 전혀 다른 느낌의 결말로 마무리가 되었고, 두 가지 버전의 엔딩 또한 색다른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진행되던 서사의 방향대로 풀어나가서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해서 전부 비슷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메디컬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에 로맨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만날 수 있는 퓨전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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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왕 공중 생물 배틀 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 17
시바타 요시히데 지음, 고경옥 옮김 / 글송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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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 17권은 '공중 생물'편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공중 생물 169종의 생태와 특징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대여섯 살의 남자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텐데, 공룡, 동물, 바다생물, 곤충 등등 아이의 호기심에 따라 책도, 장난감도 자주 바뀌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말 다양한 종류의 피규어와 관련 책들을 사서 읽고, 가지고 놀곤 했는데, 그 중에 조류를 다루고 있는 책만 없어서 이번 시리즈가 더욱 기대가 되었다.

 

특히 '조류'가 아니라 '공중 생물'이라는 이름으로 된 제목답게 조금 더 포괄적인 범위로 하늘을 나는 생물들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일발적으로 공중 생물이라고 하면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조류들뿐만 아니라 하늘을 누비는 곤충과 공중 점프가 특기인 여러 동물들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관심이 많아서 함께 최강왕 시리즈를 자주 보는 편이다. 그 동안 만나본 시리즈만 해도 곤충, 위장 생물, 동물 우주 등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는데, 이 시리즈가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화보가 생생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재미있는 대결 구도로 가상의 배틀 상황을 생생한 일러스트를 통해 만화처럼 만날 수 있어 아이들이 더 재미있게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설명이 되어 있고, 수록되어 있는 정보들도 교과서적으로 딱딱하게 지식 전달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구성과 요소를 넣어 지루하지 않게 놀이처럼 즐길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좋았다. 각각의 페이지 마다 해당 생물들의 기본 정보와 함께 파워, 테크닉, 공격 포인트라고 해서 별도로 소개해주고 있는데 마치 게임 캐릭터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대목은 '가상 배틀' 코너이다. 머리가 좋은 큰부리까마귀가 맹금류의 대표 주자인 참매에게 떼를 지어 도전장을 내민다면? 비행술이 뛰어난 말똥가리와 힘이 센 수리부엉이가 맞붙는다면? 바다 위 하늘을 누비는 괭이갈매기와 바닷속을 자유롭게 오가는 아델리펭귄이 마주친다면? 떼베짜는새의 거대한 둥지에 맹독을 지닌 붐슬랑이 다가온다면? 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대결이 많아 늘 재미있게 읽고 있다.

 

 

무엇보다 화보처럼 생생한 사진들이 굉장히 리얼하게 근접 촬영이 되어 있어서 공중 생물들의 모습을 아이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었다. 새들을 다루는 분량이 가장 많긴 했지만, 그 외의 다양한 공중 생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몸을 비행기 날개처럼 납작하게 만든 뒤, 높은 나무에서 미끄러지듯이 하늘을 날아가는 파라다이스나무뱀, 날개처럼 생긴 얇은 익막을 펼쳐서 하늘을 나는 날도마뱀, 날다람쥐, 개구리, 날원숭이 등도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서 신기했다. 특히 놀랐던 것은 '하늘을 나는 오징어'였다. 오징어가 하늘을 난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 세계에 450~500종이 서식하는 오징어들 중에 10여 종이 하늘을 난다고 한다. 이들은 다리 사이의 막을 날개로 사용하는데, 참치 등의 천적에게 쫓기면 제트 엔진처럼 물속에서 뛰어올라 멀리 도망치기 위해 비행을 한다고 한다.

 

과학 학습 도감 최강왕 시리즈는 그 동안 동물, 공룡, 생물, 요괴 등 다양한 시리즈로 출간이 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다음 번에는 또 어떤 재미있는 과학 도감을 만나게 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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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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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사건의 경우 말도 안 되는 동기들, 상식에 위배되는 상황들, 믿기 힘든 우연들이 개입돼 있었다. 밥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인물이 알고 보니 잔인한 살인마인 경우도 허다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해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가 작은 실마리 하나가 발견되면서 뒤집어진 경우도 있었다. 세상은 가장 평범한 사건과 특수한 사건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상식과 비상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케이트는 형사로 일하는 동안 여러 경험을 통해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전혀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고 하더라도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였다.    p.64

 

영국 북부의 항구도시 스카보로에서 열네 살 소녀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4년 전 할머니 생신이라 혼자 헐에 다녀오다가 기차를 놓친 이후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기고 사라진 한나 이후, 이번에는 수학여행 준비물을 사기 위해 엄마랑 마트에 간 아멜리가 주차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때 고원지대에서 1년 전 실종됐던 사스키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한나와 사스키아, 아멜리는 비슷한 나이에 납치됐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들 사건에는 별다른 목격자나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언론은 이들 사건을 연쇄살인범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고원지대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여주는데, 수사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 사라진 아멜리의 부모가 운영하는 펜션에 머물던 케이트가 부모의 부탁으로 비공식적인 단독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케이트는 스카보로 외곽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처분하지 않고 임대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세입자가 집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는 무단으로 도주를 해버렸다. 그녀가 그 집을 팔지 말지 고민하다 팔지 못했던 이유는 부모님이 오래 살던 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는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잔혹하게 살해된 아버지 모두 세상에 없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건 그녀는 펜션에 머물면서 집안의 못쓰게 된 집기들을 처리하고, 집을 손보는 중이었는데, 마침 소녀들의 연쇄실종사건이 벌어지고 이번에도 수사에 관여를 하게 된다. 전작인 <속임수>에서 전직 형사 리처드 린빌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케일럽 형사와 케이트가 이번 신작 <수사>에서도 등장해 반가웠다. 샤를로테 링크가 시리즈로 작품을 출간한 적은 없지만, 동일한 등장 인물들이 같은 배경을 무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속임수>와 <수사>는 시리즈로 보아도 무관할 것 같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더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스카보로의 담당 형사는 케일럽이고, 케이트는 런던에서 근무하는 형사라 사실 아버지의 사건은 물론이었고 현재 벌어지는 사건에서도 수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그럼에도 전작에 이어 케이트는 런던경찰국에 긴 휴가를 내고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시키게 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겉모습만 보고 타인을 평가하죠. 아마도 사람들은 당신을 의사 남편, 예쁜 딸, 근사한 저택, 넉넉한 경제력을 가진 여자로 볼 뿐 내면을 보려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다르다는 듯인가요?"
"나는 겉모습보다는 이면에 관심이 많아요. 물론 이면을 보기란 쉽지 않죠."
"당신은 내게서 어떤 이면을 보았는데요?"
알렉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데보라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p.169

 

독일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샤를로테 링크의 소설은 독일 내에서만 3천만 부가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게다가 거의 모든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었을 만큼 인기가 좋다고 한다. 여타의 스릴러들과 다른 점은 그녀의 이야기들은 매번 범죄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건과 수사라는 플롯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속에 관계된 여러 인물들의 삶과 심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다양한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깊이 있게 탐구해서, 세밀하게 그 심리를 묘사하고 있기에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페이지가 두툼한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 보다는 과정에 더 치중하는 작품답게, 전혀 지루할 틈 없이 매우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600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 역시 중반을 넘어가도록 범인에 대한 제대로 된 단서 없이 그저 사건의 수사 과정과 사라진 소녀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야기는 후반부에 도달해있고, 클라이막스와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케이트는 탁월한 상황 판단력과 뛰어난 직감과 인간심리에 대한 통찰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 형사지만, 성격이 괴팍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동료들로부터 언제나 배척당해야 했다. 전작의 사건들이 3년 전이라고 설정되어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그녀의 성격은 여전하다. 케이트는 여전히 동료들 사이에서 겉돌고 있었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대놓고 그녀를 멸시하거나 뒤에서 비난하는 동료는 없었지만, 아무도 그녀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려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심 거취를 옮기는 건 어떨지 생각해보던 차에, 케일럽 형사가 스카보로경찰서로 자리를 옮기면 어떻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사실 3년 전, 케이트는 그에게 반한 적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사이라 친밀감을 갖게 되었고, 그는 외모도 매력적인 남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케일럽은 그녀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녀를 여자로 보아주지 않았다. 당시 알코올중독과 싸우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를 극복했던 케일럽에게 케이트는 동료 경찰의 딸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케이트는 그와 함께 일하게 될 상황을 상상해보면 고통스러울 것 같아 거절한다. 만약 다음 시리즈가 또 이어진다면, 그때는 케이트와 케일럽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지도 궁금해진다. 다음 작품도 꼭 이들이 등장하는 시리즈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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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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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더스틴 밀러가 정말로 성폭행을 했다고 해도, 매슈가 그를 죽이고 트로피를 기념품으로 가져왔다는 뜻은 아니잖아.”
“그냥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굉장한 우연의 일치로군.”
“뭐가 굉장한 우연의 일치야? 더스틴 밀러는 정말로 살해됐어.”
“그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는 피해자와 같은 길에 살다가 이번에는 범인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거 말이야.”    p.81

 

헨과 로이드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파티에서 옆집의 매슈와 미라 돌라모어 부부를 만난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없는 부부라는 공통점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 부부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게 된다. 매슈는 사립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고, 미라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영업 사원이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을 구경하게 되는데, 전체적인 인테리어와는 동떨어진 매슈의 서재에서 헨은 기절할 듯한 충격을 받는다. 서재 벽난로 위에 놓인 펜싱 트로피가 오래 전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을 생각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다시 한번 제대로 트로피를 보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고 옆집에 간 헨은 매슈가 트로피를 치워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의심이 커져간다. 매슈는 서식스 홀의 교사였고, 더스틴 밀러 역시 그 학교를 다녔기에 터무니없는 망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헨의 과거에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때 조증으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갔던 적이 있었고, 당시에 한 여학생에게 집착해 경찰이 출동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이후에 로이드와 결혼 후 조금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다가 3년 전, 새로운 정신 약리학자의 추천으로 다른 약을 먹었다 조울증이 왔고, 당시에 같은 동네 주민이었던 더스틴 밀러 살인 사건에 집착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매슈가 더스틴 밀러 살인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의심을 남편도, 경찰들도 믿지 못한다. 하지만 헨은 남몰래 매슈의 뒤를 밟으며 그를 지켜보았고, 의심음 점점 확인이 되어 간다. 그러다 그의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날 매슈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증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 그런데, 과연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헨은 계속 매슈를 생각했다. 이제 그녀를 믿어주는 사람은 매슈뿐이었다. 기괴하면서도 웃기는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녀와 매슈뿐이라니. 매슈는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테니까. 헨 역시 다른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믿지 않고, 다들 그녀의 정신병이 도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p.247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소설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었던 피터 스완슨의 신작이다. 벌써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이 네 번째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 매혹적인 작품 <죽여 마땅한 사람들>, 사랑의 다른 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아낌없이 뺏는 사랑>, 낯선 공간이 주는 무서움과 불편함을 극대화시켜 색다른 공포를 자아냈던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까지 모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신작 역시 궁금했었다. 'Her Every Fear'라는 제목을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라고 원제와 전혀 상관없는 제목을 붙였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Before She Knew Him'이라는 원제를 완전히 의역해서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번역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왜 번역본 제목을 이렇게 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문장 그 자체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 읽고 나면 이해가 되는 타이틀이라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굉장히 센스 있는 의역이 아닐까 싶다.

 

동네에 살인자임이 분명한 남자가 있고, 그의 바로 옆집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의심스러운 정황이 계속 쌓이고, 몇 번이나 경찰에 그가 범인이라고 증언하지만 자신의 과거 이력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거기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것을 살인자인 그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괴물 같은 아버지와 그 괴물의 희생양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그 남자는 그녀에게서 아버지의 괴물 같은 면과 어머니의 나약함과 우아함,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동생의 모습도 본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특별한 관계'를 제시한다. 자신은 오직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만 죽이기 때문에 당신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그저 당신과 애기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 작품은 살인마의 마음속 깊은 곳을 옆집에 사는 여성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과연 헨은 ‘죽어 마땅한 남자들’만 죽이는 이 살인자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까? 과연 살인자와 증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피터 스완슨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페이지 터너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결코 책을 놓을 수 없도록 만든다. 예상을 벗어나는 뜻밖의 전개가 만들어내는 서스펜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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