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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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리 결정한 것이 없었고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결정한 것이 없고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박 중위를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은 왼쪽 창가에 앉은 사람이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그 자신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척하는 어떤 정서, 추억이거나 기대 혹은 욕망일 수 있다. 왼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감지한 어떤 요소가 그의 과거나 미래와 연결된 어떤 줄을 흔들었고 그는 그 줄에 걸려 넘어졌다는 식이다.    p.51~52

 

강상호는 1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형 강영호의 유고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열다섯 군데를 소개하는 책을 쓰던 중이었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강상호는 형의 유품들을 정리하다 여러 장의 사진이 분류되어 있는 두툼한 파일북을 발견하고, 형이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강상호는 출판사 직원과 함께 형이 취재한 여행지들을 답사하기로 하고, 그 과정에서 외진 산 속에 있던 천산 수도원을 찾게 된다. 해발 890미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으며, 건물 안에는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긴 복도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둡고 습한 지하방에서 벽에 빼곡히 옮겨진 성경 구절들을 발견한다.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한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젊은 강사가 천산에서 발견된 벽서를 중세 유럽 책 중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히는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기고문을 신문에 수록한다. 그런데 켈스와 천산의 필사자들은 왜 글자에 장식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색깔을 입혔을까.

 

열네 살 소년 후는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는 어둑한 밤, 200년 된 키 큰 버드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해안 초소에 근무하는 박 중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밝으면 박 중위가 마을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획한 일을 실행해야만 했다. 그는 품 속에 칼을 움켜쥔 채 사촌 누나 연희의 복수를 하려는 참이다. 박 중위는 온 동네를 떠들고 다니며 연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는데, 정작 연희가 사랑을 받아 주고 나니 그녀를 버렸다. 결국 연희는 괴로워하다 집을 나갔고, 아무도 그녀가 왜 마을을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후는 복수를 위해 박 중위에게 칼을 휘둘렀고, 후의 아버지는 그를 산꼭대기에 있는 천산 수도원으로 대피시킨다. 후는 그곳에서 성경을 읽고 쓰는 일을 몸에 익혔고, 점차 하늘집의 형제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후는 그곳 형제들의 독특한 믿음과 특이한 삶의 태도에 점차 익숙해졌고, 일종의 평안함 같은 것을 느끼며 그들 속으로 섞여 들었다.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난다.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사랑의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조절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사랑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사랑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행사된 폭력이 사랑에서 빠져 나왔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리에서 다시 행사된다.    p.125

 

72개의 지하 방으로 이루어진 천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엄청난 분량의 벽서와 함께 시작된 이 작품은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형의 유고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출간된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를 켈스의 책에 비견할 만하다는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준 장의 이야기, 그 속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그리고 사촌 누나 연희를 능욕한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게 되는 후의 이야기. 이렇게 천산 벽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다섯 개의 이야기는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전혀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욕망과 권력, 비극과 정치 등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끼어들어, 어떤 영향력을 주는지를 들여다본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순간 (p.321)'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주하게 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견디게 하고, 이해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을 넘어서도록 한다. 나는 이승우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종종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2012년 출간되어 201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작가가 십 수 년 전부터 구상했던 모티프가 마침내 실현된 작품으로, 욕망과 죄의식?신학과 실존?윤리와 정치 등 이승우 문학의 화두가 집약된 정점이자 정수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묵직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작품인데, 이번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곳'의 부당함이 어쩔 수 없이 불러내는 '저곳' (작가의 말),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 산 자에게로 이어지며 서서히 드러나고, 이들의 '이어 쓰기'가 거듭되는 동안 (작품 해설) 펼쳐지는 신학과 윤리의 세계를 만나 보자. 이승우의 책을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그 한 권은 단연코 <지상의 노래>일 거라는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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