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
김현 외 28인 지음 / 알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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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심들도 쉽사리 맺히지 않는 이상한 시간이었다. 무기력함 속에서 이 세계를 빠르고 확실하게 실감하는 일이 필요했다. 다가갈 다음이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가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것이기에 시간이 물려주는 청바지를 입고, 유행이 지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약속 없는 저녁에 홀로 먹을 맛있는 레몬크림케이크를 사 가지고 돌아온다. 써야 할 글들이 넘쳐나고, 읽을 것은 더 이상 쌓일 수 없어서 고독을 놔두지 않는다. 고독이 고독으로 향하게 하는 환한 터널을 짓는다.     p.57

 

이 작품은  '팬데믹 블루의 시간을 견디는 독자들을 위한 특별한 책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17명, 그림 작가 12명 등 모두 29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가 탄생했다. 이 책에는 13편의 에세이, 12편의 시 그리고 18점의 드로잉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판형도 작고, 2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니 새삼 감탄하면서 읽었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양방향에서 시작되는 구성인데, 에세이로 시작하는 표지와 시로 시작하는 표지가 각각 다르다. 앞표지와 뒷표지는 거꾸로 되어 있으며, 책 하단의 쪽수도 에세이, 드로잉, 시를 각각 E, D, P로 각각 쪽수 앞에 두어 쉽게 장르를 구분하고, 찾을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다. 시와 에세이, 그리고 드로잉을 한 책에 담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히 신선한 느낌이었는데, 그것들이 이렇게 독특한 구성과 또 너무나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수록되어 있는 작품 중에 에세이 한 편과 드로잉 작품 몇몇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신작이라 작가들이 바로 지금의 일상을 우리와 함께 겪으면서 써 내려간 글들이라 더욱 공감도 되고, 위로도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에세이를 읽다가 중간에 드로잉 작품들을 거쳐 시를 읽고, 위아래가 자연스레 뒤집히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선물 같은 책이기도 했다.

 

 

사태가 사고를 배반할 때, 즉 일어난 일이 떠오른 이유를 무효로 만들 때 언어가 먼저 부러진다. 이야기를 잃고 단어들로, 원초적 외마디 비명들로 흩어진다. 문명이 무너져 벌거벗은 대지로 돌아간 자리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은 좌절된 언어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호명할까? 어둠을 밝히던 언어의 호롱불이 홀연 꺼졌다. '이제까지'가 '앞으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폭풍에 부서진 배들은 떠나온 항구로 되돌아가려고 하지만 엔진은 고장 나고 나침반은 망가졌다. 이로부터 하나의 세계가 소진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p.80

 

작년 말 갑자기 출현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단 몇 개월 만에 전 세계의 일상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느새 올 해도 반이 훌쩍 지나 버렸지만, 여전히 세계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상황이 아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각종 모임이며 공연들은 물론 여행을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 되었으며, 집 안에 갇혀버린 채 시간을 보내야 하는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학교들이 개학이 연기되고, 직장인들의 재택 근무가 이어지던 몇 개월 전보다는 분위기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확진자로 인한 뉴스 가 연일 보도되고 있으니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과 우울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작가들의 안부와 위로, 그리고 응원의 메세지이다.

 

작가들 역시 우리들처럼 코로나로 인해 방콕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 또한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찹쌀가루와 메줏가루, 엿기름을 사와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고추장을 담그느라 씨름하고, 코로나로 인해 자주 가던 대학교 도서관이 폐쇄되어 글을 쓰기 위한 카페를 찾아 다니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강제된 고독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 간다. '악몽을 나눠 갖는 사이'를 가족이라 부른다는 문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코로나가 언제 끝이 날지, 백신이 언제쯤 나올지 알 수 없고, 당분간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시기에 '서로에게 기꺼이 일상의 안녕과 평온한 기쁨을 건네는 집'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살만한 거 아닐까. 카프카는 말했다. 집을 나갈 필요가 없다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저절로 찾아올 거라고. 집에서 나가지 않고 세상을 기다려보는 동안, 이 책과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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