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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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인류의 기초를 흔들고 균열을 일으킬 때까지 자랄 수 있는 곳임을 인지하기 시작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정보 수집자들은 우리에 대해 이렇게 외치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어떻게 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무시당했다고 하면 귀 기울이지 않는 거지? 이들이 공격 당하는데 아무도, 단 한 명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지? 누가 타인을 저렇게 대하지?" 하지만 충격 속에서도, 그들은 그 생각을 공유하네. 악은..... 퍼져 나가겠지.     

-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p.28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전의 우주가 사라지고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확산 현실'의 현상인 프롤리프가 반복되는 일상. 현실의 뒤집기가 일어나면 온라인상에 게시한 기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매일 리셋이 된다. 헬렌은 자신이 쓴 시가 매번 뒤집기를 거칠 때마다 저절로 지워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온라인 상에 기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연약한 언어를 타인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그냥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최근에 쓴 시를 게시해서 친구들과 나누기로 한다. 개인 대 개인으로 메시지나 이메일을 통한 연락은 가능했지만, 직접적인 개별 연락은 불가능한 시대였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타인과의 연결을 갈구했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다면 누구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확산 현실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애초 세상과의 관계가 약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 수록된 <너무 많은 어제들, 충분치 못한 내일들>이라는 작품 속 이야기이다.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3년 연속 수상하며 전례 없는 새로운 역사를 쓴 N. K. 제미신의 첫 단편집이다. <다섯 번째 계절>과 <오벨리스크의 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석조 하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다. 이 단편집에는 '부서진 대지' 3부작의 기초가 된 작품도 있으며, 스팀펑크, 어반 판타지 등을 망라해 제미신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저자가 흑인 여성으로서 SF와 판타지를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주제로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왔고,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22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이카는 소녀의 감정을 아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사냥하는 건 다 이유가 있지. 따지고 보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이카는 대충 북쪽을 가리킨다. 거기서 대륙을 들쭉날쭉하게 가로지르며, 붉게 피 흘리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세상을 파멸시켰다. "하지만 혹시 그들이 우리를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괴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우리가 당분간 사람처럼 살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구나"    

- '스톤 헝거' 중에서, p.402

 

SF와 판타지를 쓰고 싶은 흑인 여성으로서, 제미신에게는 작품을 출간할 기회도, 비평가들의 눈에 띌 기회도 없었던 2002년이었다. 그녀는 막 서른 살이 된 직후였고, 살고 있던 도시는 추웠고,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연애를 끝낸 뒤였고,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취미였던 글쓰기로 조금이나마 돈을 벌면 어떨까 하고, 일주일짜리 워크숍에 참석하게 된다. 그 짧은 기간에 얻은 조언 중에 단편 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단편을 쓰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다양한 형식들을 실험해 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에도 수록된 <용 구름이 뜬 하늘>이라는 단편이 그녀가 프로 작가로서 처음 판 소설이다. 제미신은 이러한 배경을 이 책의 서문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유는 이 단편들은 단순히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녀가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연대기라 더욱 의미가 있다.

 

<위대한 도시의 탄생>, <스톤 헝거>, <수면 마법사> 들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와 '위대한 도시들' 시리즈 등 장편 작품들을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비제로 확률>은 휴고 상?네뷸러 상 최우수 단편상 후보에 올랐었고,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과 <깨어서 걷기>는 각각 어슐러 르 귄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공간과 소재를 다루고 있는 너무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들에게도, 아직 제미신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여성과 유색인,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한 현실을 SF적인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어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읽어 보길. 바로 여기 SF 판타지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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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밤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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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듣는 순간 망연자실해지고, 죽음은 절대 돌이킬 수 없으며,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는다. 내 세상은 산산이 부서졌고 우리는 절대 예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이 모든 사실을 길어야 몇 초 안에 다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온몸을 흘러넘치며 우리를 압도한다. 가슴이 갈가리 찢기고, 무릎이 후들거린다. 온몸 구석구석이 항복하고 무너지길 원한다... 그때 부정이 끼어든다. 부정은 우리를 구원한다. 부정은 보호막을 펼친다. 부정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는 우리를 붙잡는다.      p.229

 

15년 전, 열여덟 살의 냅은 다른 마을에서 열리는 아이스하키 시합에 참가했다 경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동생 리오가 있었고, 소울 메이트라고 생각했던 여자 친구 모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날, 리오와 그의 여자친구 다이애나가 기차에 치여 즉사한다. 그들의 체내에서 다량의 알코올과 약물이 검출됐고, 술과 마약에 취한 두 고등학생이 선로 위에서 무모한 짓을 하다 사망한 사고였다. 그리고 사나흘 뒤, 냅의 여자 친구 모라가 사라져 버린다. 동생의 죽음과 여자 친구가 행방불명되어 버린 기억은 냅의 삶을 지배했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냅은 경찰이 되었고, 모라의 지문과 DNA를 시스템에 등록하지만,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두 형사가 그를 찾아 와 살인 사건 현장에서 모라의 지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게다가 살해된 것은 모라와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렉스였고, 렉스 역시 경찰로 일하던 중이었다. 가족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고, 미래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는 고독한 삶을 살고 있던 냅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간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15년 만에 나타난 모라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마을 근처의 버려진 군사 기지와 동생의 죽음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시 리오는 음모론 클럽의 멤버였고, 여섯 명의 멤버 중 세 명이 죽고, 한 명은 실종되었던 것이다. 냅은 나머지 두 명의 멤버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도시 괴담과도 같았던 버려진 군사 기지의 비밀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우리는 각자의 서사에 부합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무시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는가? 지금 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무시하고 싶다. 베스는 내게 경고했다. 내가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이 어떻게 사실이 되었는지 베스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레이놀즈와 베이츠가 처음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던 때로 돌아가서 난 렉스를 모르느 그냥 가라고 얼른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외면할 수 없다.      p.406~407

 

할런 코벤의 작품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따지고 들자면 법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범죄에 연루될 수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비밀을 남보다 잘 감추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진실이 과연 사실인가.에 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게 마련이니까.

 

할런 코벤의 작품은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서서히 상승하는 이야기가 클라이막스에 치달을 때까지 지루할 틈이란 단 한 순간도 없다. 세계 3대 미스터리 문학상(에드거상, 셰이머스상, 앤서니상) 최초 석권, 스릴러의 제왕, 반전의 대가 등 할런 코벤을 수식하는 단어들이 그 명성만큼의 재미를 고스란히 안겨준다.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숱한 역경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의 문제, 배신과 질투와 거짓말과 진실 사이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가족 간의 믿음과 비밀, 연인 간의 신뢰와 사랑에 대한 팽팽한 긴장과 싸늘한 관계의 반복에서 오는 장르적인 재미는 그야말로 할런 코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으니 말이다. 이 작품 역시 읽는 내내 다음 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지게 만들며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시켜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비밀과 배신, 반전과 폭로야 말로 스릴러의 재미를 보장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후덥지근한 날씨를 잊어 버리게 만들어줄 시간순삭 소설이 만나고 싶다면 할런 코벤의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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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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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늘 일해왔다. 무급으로, 저임금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보이지 않게 일해왔지만 일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터는 여자를 위해 기능하지 않는다. 위치에서부터 근무 시간, 규제적 표준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의 생활을 기준으로 설계되어왔지만 그것은 더이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자들이 하는 일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여자들의 일은, 유급이든 무급이든, 우리 사회와 경제의 근간이다. 이제는 그 가치를 인정할 때가 되었다.    p.186

 

대부분 회사의 사무실 온도는 여성에게 적당한 온도보다 평균 5도가 낮다고 한다. 그래서 한여름에 남자들은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지만, 여자들은 가디건이나 담요로 몸을 싸고 있게 된다. 이유는 표준 사무실 온도를 결정하는 공식이 1960년대에 40세 70kg 남자의 기초대사율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자'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피아노 표준 건반의 한 옥타브 간격, 휴대폰 사이즈, 자동차 설계, 의료, 일자리 등 모든 영역에서 여자의 데이터는 수집되지 않았다. 남성이 보편이라는 추정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책은 젠더 데이터 공백이 그런대로 평범하게 사는 여자를 어떻게 해치는지에 대한 폭로이자, 우리가 인류의 반에 대해 기록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들이 투명 인간이 되어 버린 이유, 인류의 절반인 여자들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세워진 세상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영국의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 상황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여성에 관한 데이터 공백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차별의 단면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다수의 사례와 통계, 정확한 수치로 세상이 여자를 지워버렸다는 명백한 증거들을 보고 있자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매년 수백만의 여성들이 복용하는 약에 대해 단 한번도 여성 피험자를 상대로 임상시험을 거친 적이 없다거나, 여성의 심장마비가 오진 받을 가능성이 남성보다 50프로나 높다는 것, 게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여자가 중상을 입을 확률이 남자보다 47프로가 높다고 하니 그야말로 오싹해졌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데이터를 수집할 때 여자가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여성의 삶을 정의하는 두 번째 주제에서는 여체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주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폭력,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집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을 반영하여 세상을 설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여성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생물학적인 몸은 여자가 강간당하는 이유가 아니다. 공공장소를 지나갈 때 여자가 위협당하거나 공격 당하는 이유가 아니다. 그 원인은 성별이 아니라 젠더, 우리가 남체와 여체에 부여하는 사회적 의미다.    p.380~381

 

1975년을 UN이 여성의 해로 선포하고 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이슬란드의 여성단체들이 모여 파업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 24일에 아이슬란드의 어떤 여자도 일하지 않는, 휴일을 가지게 된다. 유급 노동은 물론이고, 요리, 청소, 아이 돌봄까지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여자들이 매일 해왔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지 남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자는 취지였다. 아이슬란드 여성의 90프로가 참여했던 그 파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사례를 소개하면서 '일하지 않는 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일을 하고도 급여를 받지 못하는 여자가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여자들은 무급 노동의 75프로를 담당하고 있다. 여자들은 항상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에 대해 얘기할 때 여성의 무급 노동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걸까.

 

이 책은 데이터 관점에서 성차별 메커니즘을 밝히고 젠더 문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여성을 향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해 대부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지만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정확한 수치로서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를 이러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근거들을 한데 모아서 구체적이고 검증된 데이터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팩트라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 곳곳의 여성들에게 이 놀라운 무기를 쥐어주고 싶다. 여성들이 더 이상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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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 함께 빵을 에프 그래픽 컬렉션
톰 골드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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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재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별 생각 없이 둘러볼 때가 있다.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었던 책도 있고, 괜히 읽었다 싶을 만큼 실망스러웠던 책도 있다. 곧 읽을 예정인 책도, 반쯤 읽다 지루해서 덮은 책도 있고, 읽었지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책도 있다. 언젠가는 꼭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는 책도 있고, 샀지만 읽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있다. 그 중에는 읽지 않았음에도 다 읽은 것처럼 알고 있는 책도 있고, 다른 버전으로 읽었지만 합본 혹은 리커버 버전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구매한 책도 있다.

 

책이 이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습관적으로 장바구니에 신간들을 담고 있는 나 같은 독자라면 무조건 공감하고, 열광할만한 작품을 만났다. 최근에 책 컬렉터이자 작가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랜트 스나이더가 쓰고 그린 만화 에세이 <책 좀 빌려줄래?>라는 작품을 읽었었는데, 그 책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랜트 스나이더의 책이 탐독가로서의 책 소장과 책 읽기에 대한 글들과 작가로서 느끼는 창작의 기쁨과 고통을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는 데 비해, 이번에 만난 톰 골드의 책은 최신 문학 트렌드와 문학계와 소설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책덕후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작품이라는 점은 같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만화계의 아카데미인 아이스너상 수상작으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연재된 책과 문학에 대한 '유머 카툰' 컬렉션이다. 저자인 톰 골드는 ‘애서가들의 만화가’로 유명한데 국내에도 그의 대표작 <골리앗>을 비롯해 그래픽노블 작품들이 몇몇 출간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개성 있는 그림체와 기발한 풍자와 해학으로 유머와 작품성으로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모두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나 그는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작가로 유명한데, 덕분에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현대 추리 소설 작가들을 위한 살해 방법 몇 가지, 극적이지 못한 줄거리 구성 네 가지, 소설가를 위한 키보드 단축키 모음, 전형적 여주인공의 아홉 가지 유형, 해골 부대의 습격으로 인한 세계 종말의 위기 속에서 당신의 소설을 출간시키는 방법, 첩보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하는 방법, 제임스 본드 신간 소설 속 몇 가지 유감스러운 오류, 창의적인 작가를 위한 미루기 기술, 10주 과정 등등.. 제목만 보더라도 내용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기발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카툰들이 담겨 있어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작품 분석, 출판사의 비용, 작가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 출판계의 트렌드, 서점, 저널 등 책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각각의 분야에서 비틀고, 풍자하고, 거침없는 농담으로 보여주고 있는 카툰들은 그야말로 '고품격 유머'로 가득하다. <전쟁과 평화>의 낚시성 홍보 문구들은 기발했고, 회고록 집필자의 삶은 너무 웃기면서도 현실적이었고, 셰익스피어 시대의 진정한 극장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섯 장의 카드는 그의 문학적 지식과 만화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집 안 곳곳에 책들이 쌓여 있고, 점점 어수선해지는 서재에 들어 가려면 발 디딜 곳부터 만들어야 하고, 책으로 인간관계를 대신하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책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 몇 컷의 만화로, 혹은 한 컷으로 그려내는 '책을 위한, 책에 의한 톰 골드의 세계'를 만나 보자. 책을 사랑하는 바로 당신을 위한 엉뚱하지만 너무도 멋진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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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사랑한 컬러의 역사 CHROMATOPIA
데이비드 콜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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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처럼 하얀 리드 화이트는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안료였다. 리드 화이트 없이 미술의 역사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납은 독성이 강해 오래 노출되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감을 제한된 시간에만 쓰는 예술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리드 화이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두통, 기억력 상실, 복통 같은 중독 증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p.39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안료의 역사와 고대부터 현재까지 주요했던 안료 60여 개를 소개한다. 저자가 거의 40년 간 색을 만들어 온 현직 물감 제조업자라서 매우 구체적이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안료는 오커, 황토이다. 오커가 사용된 흔적의 기원이 250,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니 말이다. 천연 오커에 함유된 철로 다양한 노랑, 빨강, 갈색을 만들 수 있다. 초기 인류는 오커 팔레트에 초크 화이트를 추가해 색을 만들었다고 한다. 초크 화이트는 탄산칼슘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흰색 광물이다.

 

 

그 밖에도 램프나 기름을 태워 발생하는 그을음을 모아서 램프 블랙을 만들고, 뼈를 불에 넣어 유기물이 모두 재로 변할 대까지 완전히 태워 만든 본 화이트도 있다. 생각보다 너무도 다양한 재료들로 컬러들을 만들어 온 인류의 역사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최초의 현대적인 색을 인공적으로 제조한 것은 1704년경이었다. 이는 아주 우연한 발명으로, '우연이 색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업 혁명 때 이루어진 직물의 염료에 대한 화학적 연구로 인해 물감 색의 종류가 빠르게 증가했다. 최초의 유기 합성 안료는 1884년 특허를 받은 타트라진 옐로로, 아조 옐로 염료는 지금까지도 채색 물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등장한 프탈로라고 불리는 프탈로시아닌은 진짜 안료로 인정받은 최초의 유기 물감이다. 프탈로 안료는 착색력이 매우 좋고 오래가며 채도와 순도 또한 높아 예술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1868년에 발견된 이래로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투명한 자주색을 띠는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생산 비용도 저렴해서, 옅은 코발트 바이올렛을 신속히 대체했다. 비록 착색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광채가 나고 매혹적이다. 인상주의 예술가는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라 물체에 반사된 빛의 보색이라고 여겼는데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이에 걸맞는 완벽한 색이었다.    p.137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실제 안료 제작법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리드 화이트를 만들기 위해 납판, 식초, 설탕, 이스트 가루를 사용하는데, 완전한 색을 만드는 데 세 달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카민 레이크를 만들려면 연지벌레에서 용해성 염료를 추출해야 하고, 매더 레이크는 꼭두서니 뿔리가 있어야 한다. 선명한 진짜 울트라마린을 만들려면 최대한 순도가 높은 라피스 라줄리가 있어야 한다. 품질이 좋지 못한 광물을 사용하면 울르라마린 대신 연한 회청색 안료가 나온다고. 최상의 품질을 얻으려면 제조법과 여러 번에 걸친 공정도 중요하지만, 제일 좋은 등급의 원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각각의 색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잘 사용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수록했다. 마젠타, 파랑, 검정, 코발트 블루, 카드뮴 레드 등등 여러 작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색들의 다채로움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색과 색이 섞여서 어떤 느낌을 자아내는지, 지금은 흔히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금보다 비쌌던 컬러, 현재에는 볼 수 없는 컬러 등등 여러 컬러들의 색과 텍스쳐를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던 책이다. 디자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역사, 과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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