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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사냥꾼 - 집착과 욕망 그리고 지구 최고의 전리품을 얻기 위한 모험
페이지 윌리엄스 지음, 전행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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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척추동물 전문 고생물학자인 토머스 홀츠가 즐겨 말했듯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룡이다. 공룡은 치명적인 죽음과 강인한 생명력을 둘 다 상징했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공룡들은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공룡은 1억 6,60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다가 대량 멸종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6,600만 년 후에는 문화적으로 재기해 명성을 누리고 있다(여전히 새들이 남아 있으니, 전부는 아니고 거의 멸종한 것이다).    p.29

 

2012년 뉴욕 시의 경매장에 100만 달러를 넘어선 가격에 최종 낙찰된 공룡화석이 등장했다. 몽골에서 최초로 발굴된 이 공룡화석은 높이 2.4미터, 길이 7.3미터에 이르렀으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사촌뻘 되는, 거의 완전한 화석이었다. 티라노사우루스 바타르, 일명 아시아의 티라노라 불리는 타르보사우르스였다. 이 공룡 뼈를 경매에 내놓은 건 미국 시민이자 전직 수영선수였던 서른여덟 살 남자였고, 그는 이 일로 최악의 시련에 부딪치게 된다. 한 고생물학자가 이 공룡의 출토 지역이 자신이 태어난 몽골의 고비 사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후 공룡화석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몽골과 미국의 국제분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결국 공룡화석의 판매자는 미국 법정에 서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페이지 윌리엄스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전대미문의 ‘공룡화석’ 밀수 사건의 조사를 위해 10여 년의 시간을 쏟아 부었다. 이 책은 등장하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전혀 바꾸지 않았고, 새롭게 끼워 넣은 정보도 없는, 완전한 실화이다. 공룡화석 경매 사건을 다루는 논픽션으로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자연사 수집품에 집착하는 인간의 욕망과 공룡을 둘러싼 과학과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다양한 이들의 너무 다른 시각에 대한 이야기도 대단히 흥미롭다. 과연 화석은 발굴자의 것인가, 인류 공동의 유산인가? 수천만 년 전 이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화석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발굴자? 땅주인? 고생물학자? 아니면 인류 공공의 것일까?

 

 

새로운 법은 어떤 측면에서 고생물학자와 직업적 화석사냥꾼 양측을 다 화나게 했다. 내무장관의 서면 허가 없이는 연방 재산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도 자신들이 화석을 발굴한 장소를 대중에 공개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은 밀렵꾼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열린 과학이라는 개념에는 역행했다... 어쨌든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듯했다. 정책 입안자들은 마치 황금이라도 찾아다니듯이 마구잡이로 땅만 파헤치는 부패한 인간들에게는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서, 평판 좋은 상업적 화석사냥꾼들에게는 설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고심했다.   p.290~291

 

화석을 찾아 다니고 탐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그룹, 즉 고생물학자, 수집가, 상업적인 화석사냥꾼이다. 대부분의 화석 상인은 자신들이 화석을 수집하고 판매함으로써 자칫 침식되어 사라져버렸을 유물을 구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화석의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특정 유형의 화석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생물학자들은 과학의 근간이 되는 대상을 옹호했고, 상업적인 화석사냥꾼들은 그들의 거래를 옹호한다. 거래상들은 많은 경험과 현장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고생물학자가 아니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고생물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물학자와 직업적 화석사냥꾼은 극명하게 상반된 주장을 펼쳐왔지만 말이다. 좀처럼 해결이 힘들 것 같은 그 첨예한 갈등이 이 작품의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공룡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호기심거리나 어린 시절에만 열광하는 흥미거리 내지는 화석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을 통해서 공룡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화석이나 공룡에 문외한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공룡 화석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공룡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권하고 싶은, 너무도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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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금경숙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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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는 내 손에서 자발없이 교태를 부리듯 떨었고,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는 까닭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그에게 할 말과 그를 도발할 방도를 짜 놓았으나, 정작 내 안에서는 끓기 시작할 때 부글거리는 우유처럼 무언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었다. 분노가 아니라면 불신의 감정이었다 -- 아니 어쨌거나 나에 대한 분노였다. 모든 가능성을 따져 보았으면서도 그가 여기에 실제로 있을 가능성은 빼 놓았다는 것, 그 역시 선제공격능력이 있다는 것, 전화선은 양방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라는 존재의 현실성.    p.117~118

 

이야기의 화자는 잡지 <몽유병자>의 편집장인 프리소 더포스로 그는 히틀러 연구학의 독보적인 권위자 요시프 브리크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했다. 프리소에게 브리크는 독자가 원하는 어떤 주제라도 두 달에 한 번씩 꾸준하게 5천 자 에세이를 써 주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하던 일을 다 제쳐 놓고 그에게 온전히 집중하고는 했다. 그들은 함께 여행을 가고, 가족의 생일날에 동행하고, 그가 쓴 글을 제일 먼저 읽고 비판과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어느 날 브리크는 칠레에서 이름이 히틀러인 남자를 만났는데, 좋은 기삿감이 될 수 있으니 함께 칠레에 가보라고 제안을 한다. 프리소는 기분 전환도 할 겸 칠레에 가는데, 비행기 탑승 계단에서 넘어져 찰과상을 입게 되는데 상처에 감염이 되는 바람에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겨우 살아남았지만,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요시프 브리크가 갑자기 운명했다는 거였다. 암스테르담에서, 창문에서 추락했는데 사고였는지는 조사 중이라고 온 신문에 기사가 났다는 거다.

 

프리소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유일한 멘토이자 친구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한다. 학계와 언론은 브리크의 업적을 재조명하며 그의 후계자에 주목하는데, 바로 추도식에서 눈길을 끄는 추도 연설을 했던 그의 제자 필립 더프리스라는 청년이었다. 프리소는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이 아니라, 그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인물이라는 점에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힌다. 그는 필립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전 세계 히틀러 학자들이 모이는 학회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만신을 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데, 지극히 사적인 그의 복수극은 거대한 산사태가 되어 대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이 상황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지, 내가 어떤 부담을 져야 할지, 누가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만약 '실수였네, 미안'이라고 할 수 있는 해법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 상상 속에서는, 호텔에 걸어 들어가 외투 주머니 양쪽에서 구식 리볼버 권총을 꺼내어, 수위, 경비, 사환, 프런트 직원, 청소원, 숙박객, 니나, 스베더르 뷔르허르스, 필립 더프리스를 한 명씩 한 명씩, 자욱한 포연 속에서 볼링핀인 양 꽝하고 쓰러뜨리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히틀러가 강도 든 은행을 덮칠 때처럼, '1인의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p.221~222

 

이 작품은 네덜란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 불리는 요스트 더프리스의 장편소설로 플랑드르 지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황금책부엉이상을 수상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낯선 네덜란드의 작가의 이 작품은 사실 읽기에 만만치가 않았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둘러싼 농담과 진지한 연구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괴짜 연구자들이 현대 지식인 사회를 풍자하는 부조리극이라는 점도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더디게 만든다. 게다가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이 뒤섞여 벌어지는 이야기라 좀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서사의 줄기를 제대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에 비해 흥미로웠던 점은 자신의 책이 그 어떤 소설보다 ‘픽션’임을 자각시키는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과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진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의 매력과 영향력에 대한 연구를 주저하지 않는 괴짜들의 지적 유희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지점이었다. 한 젊은이가 경쟁자에게 밑도 끝도 없는 복수심을 가지게 되는 소소한 이야기에서 출발해 브리크의 유산에 주목한 이스라엘 첩보부가 접근하고, 나치로부터 오른팔 경례를 되찾으려는 과격파 시민단체가 난입하며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그 엉망진창 대소동이 주는 색다른 재미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요스트 더프리스는 이 작품에서 히틀러가 대중에게 친근한 캐릭터로서 불멸성을 갖게 된 아이러니를 꼬집고, 하나의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의 밝고 어두운 면을 풍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스승이자 친구를 제대로 떠나 보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유별나고 긴 고별사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현대 네덜란드 문학과 젊은 세대 작가들의 저력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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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아이가 위험하다 (리커버) - 사춘기 전에 키워야 하는 7가지 내적 능력
에일린 케네디 무어 외 지음, 박미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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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이를 이렇게 다루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지적할 때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강하게 키우려고 일부러 험하게 다뤄야 하나? 우리는 부모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식을 더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아이를 '강인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대처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아이가 상냥하게 피드백받는 연습을 많이 하면 선의에서 나온 비판을 참아낼 역량을 키울 수 있다.    p.133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것이 다 처음 겪는 것이라 답을 알 수 없는 시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니 말이다 게다가 가정환경과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학업성취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은 부모의 입장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매 순간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의심하게 되니까 말이다.

 

이 책은 부모가 아이의 성적과 실력 향상만을 바라고 정작 아이의 내면을 소홀히 하여 아이들을 스트레스와 상처에 노출시켜 경쟁사회 부적응의 악순환에 놓이게 만든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일린 케네디 무어와 마크 S. 뢰벤탈은 잠재력은 많지만 기대만큼 해내지 못하는 아이, 학습 능력은 뛰어나지만 스트레스가 심한 아이, 즉 똑똑하지만 불행한 아이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제 상담 사례를 바탕으로 하는 구체적 시나리오, 직접 시도할 수 있는 실용도 높은 해결책을 통해, 영리한 아이들이 겪는 문제를 이해하고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길러야 하는 일곱 가지 내적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완벽주의를 다스리는 방법, 친구들을 끌어들이는 능력, 자신의 기분을 다스리는 법, 어른들과 잘 지내고 인정받는 기술, 스스로 학습 동기를 부여하기, 경쟁심 조절하기, 세상을 즐기고 행복해지는 법 등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주제들이 아니라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어떤 아이들은 패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한다. "내가 졌어"가 금세 "나는 못해"로 돌변한다. 어른이 "괜찮아. 그냥 게임일 뿐이잖아!"라고 다독여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패배는 흠이 있고 모자란다는 판단과 같다. 패배를 힘들어하면서도 자기가 승리했을 때 패자를 감싸 안아주지도 못한다. 멋진 패자가 되기 힘든 아이들은 흔히 멋진 승자가 되지도 못한다.    p.179

 

이 책에 기술된 사례와 전략은 주로 일곱 살에서 열세 살 아이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학교생활이 시작되는 시기이고, 학업에 대한 강도가 아직까지는 세지 않은 연령대이다. 이 시기에 아이의 대처 능력이 극적으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하는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흔히 ‘머리 좋다’, ‘똑똑하다’라고 표현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영리한 아이들은 과도한 기대 혹은 우려 때문에 정상적인 발달 과정과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사소한 비판에도 분노를 느끼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부모는 아이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내적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가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괄하여 넓은 관점에서 자신을 규정하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는 부모들의 착각이다. 당신의 자녀는 잘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다면, 혹시 이렇지는 않은지 살펴보자.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거나 싫증을 잘 내는가? 열 가지 잘한 일보다 한 가지 작은 실수에 집착하진 않은지, 친구들과 공동으로 하는 일을 싫어하거나 힘들어 하진 않은지, 어른들과 쓸데없는 힘겨루기를 하거나 학교 선생님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지,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려 하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지는 않은지 말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남과 비교할 수 없지만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궁금하다면, 자녀에게 힘든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 심리 교육을 해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길러야 하는 능력과 이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하는 역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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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노믹스 - 유튜브 시대, 스토리 마케팅으로 수익을 창출하라
로버트 맥키.토머스 제라스 지음, 이승민 옮김 / 민음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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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광고가 논리인 양 내세우는 것이 사실은 ‘수사(修辭)’일 따름이다. 수사는 증거를 제시하고 결론을 도출하며 과학을 흉내 내지만,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과학은 도출된 명제를 뒷받침하는 것이든 거스르는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증거를 따져 본다. 하지만 수사는 제 주장을 거스르는 점은 모두 무시하거나 반박하고 오로지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내세워 주장을 편향되게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수사는 승리를 추구한다. 본질적으로 마케팅은 소비자에게 이 제품의 특성이 다른 제품을 능가한다고 설득하는 수사적 논쟁의 공론장이다.    p.43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토리텔링 강연자인 로버트 맥키가 디지털마케팅 전문가 토머스 제라스와 함께 오늘날 디지털 생태계에 최적화된 스토리 마케팅 전략을 알려 주는 책이다. 로버트 맥키라 하면 할리우드에서 그의 세미나 수업을 받지 않은 영화인은 없다고 할 정도로 시나리오 강의로 명성이 드높다. 그의 저서는 미국의 주요 영화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며, 작가 지망생이나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일종의 바이블과도 같다. 이번 책은 전 세계 27개국, 35개 도시, 10만 명 이상의 수강자가 들은 그의 인기 강연 <스토리> 를 토대로 쓰였다.

 

스토리와 마케팅이라니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장르가 아닌가 싶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광고와 마케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이제는 ‘광고 중심 마케팅’의 시대가 아니라  ‘스토리 중심 마케팅’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말이다. 예전의 광고는 끼어들기 전략과 속임수로 ‘관객’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보통 유튜브를 비롯해 영상 컨텐츠를 볼 때 몇 초 되진 않지만 우리는 대부분 광고를 스킵하고 넘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광고가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붙잡고 유의미한 정서적 경험으로 보상해 줄 수 있다면, 누구나 광고를 무시하지 않고 보게 되지 않을까.

 

 

잡스는 소비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원하지만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던 바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독특한 정체성, 즉 스스로를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엘리트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그래서 잡스는 아름다움과 촉감과 우아함으로 이런 특징을 표상하는 기기를 만들어,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책상에서 주머니로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잡스가 꿈꾸던 휴대전화는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던 무언의 욕구에 말을 걸었다.
애플은 그의 비전을 탁월한 광고 시리즈로 스토리화했고, 그렇게 브랜딩의 역사를 새로 썼다.    p.138

 

마케팅이 메시지를 스토리화하면 소비자는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러니 소통에 스토리를 접목하는 것은 소비자의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열쇠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스토리화된 마케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스토리의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스토리가 어떻게 인간의 정신과 조응하는지, 어떻게 소비자 행동을 움직이는지, 그리고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설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토리텔링의 바탕이 되는 보편적 형식의 구성 요소들을 해부하고, 책을 읽는 이들이 스스로 창작의 기술을 키울 수 있도록 스토리의 기본 요소들을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

 

그렇다면 스토리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등장한 모든 스토리에 필수적인 핵심 사건은 단 세 단어로 압축될 수 있다. '갈등이, 삶을, 바꾼다.' 그러므로 최선의 정의는, '인물의 삶에 유의미한 변화를 야기하는 갈등 중심 사건들의 역동적 상승'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스토리를 보고 들었으니 하나쯤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짐작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는 연주회에 다녀 봤다고 해서 작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잘 짜여진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과 '형식'에 대해 제대로 연마할 필요가 있다. 스토리 기법을 연구함으로써 훌륭한 영화, 연극, 소설처럼 관객의 관심을 끌고 잡아 두고 보상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토리화된 마케팅의 달인이 된다면, 애플, 레드불, 도브 등의 브랜드처럼 전 세계의 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디지털 환경과 인간의 심리에 최적화된 스토리 마케팅이 궁금하다면, 다양한 기업들의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이 전통적인 광고를 뛰어넘어 어떻게 수익을 창출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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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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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라도 곧 아이들은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남편과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다닌 그 모든 시간과 내 몸과 내 그림자와 달에 더해서, 우리가 소리지르지 않고 소리지를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무게 아래 웅크리고 있는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진실은 위로가 되지 못하지만 이것은 아주 분명한 진실이다. 내가 그랬듯 밤마다 오래오래 달을 쳐다보면 옛날 만화가 맞는다는 사실을, 달은 사실 웃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달이 보고 웃는 대상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 외로운 인간은 너무 작고, 달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에 우리 삶은 너무 순식간이다.    p.26

 

이 작품은 로런 그로프가 <운명과 분노>이후 삼 년 만에 발표한 최신작으로, 총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이다. 작가가 십이 년간 플로리다에 거주하며 쓴 이 작품들은 모두 플로리다를 직접, 간접적인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플로리다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미국 북부의 다른 주에서 태어나 플로리다로 이주해왔거나, 때로는 플로리다를 벗어나 이국적인 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지만 정서적으로 그곳에 계속 매여 있다. 외딴섬에 방치된 어린 자매, 머리를 다친 채 어린 아들들과 숲 속에 남게 된 어머니, 노숙자가 된 대학생, 홀로 집에 남아 허리케인의 소용돌이를 겪어내는 여자 등..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연에 대한 공포와 함께 일상 속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으로 휘청거린다.

 

로런 그로프의 문장은 전작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굉장히 정확하고 통찰력 있다. 매 장면 표현이 세심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명징하게 보여주며, 단어들의 선택도 무척 아름답다 .많은 작가들이 판에 박힌 듯 풀어내는 일상적인 묘사를 어떻게 직조 하느냐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로런 그로프는 그의 재능을 페이지마다 쏟아낸다. 생각들을 직조해 그것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단어들로 쌓아 올리는 눈부신 재능이야말로 그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장들은 시처럼 읽히고, 인물들의 사고는 너무도 지적이고 우아하다. 비록 그것이 끝없는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끔찍한 재난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로런 그로프의 문장이 이 작품 속에서 플로리다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디테일하고, 섬세하게 묘사해내고 있어 이러한 배경은 등장인물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과 심리 상태에 완벽하게 부합해 놀라운 서사를 만들어 낸다. 분명 아름다운 것들만 묘사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 문장들이 아름답고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이곳 하늘은 거대하고 별이 많았다. 황홀해, 미나가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나무에서 체리 향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송아지고기와 꽃상추가 요리되고 있었고, 수영장은 저만의 달을 품고 있었다. 돌로 지은 집, 포도 덩굴, 벨벳 같은 눈을 가진 프랑스인들로 가득한 나라. 식탁에 둘러앉은 저 성난 얼굴들 위로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마저 로맨틱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어떤 것도 가능했다. 세상 전체가 쪼갠 복숭아처럼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사람들, 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걸 보지 못하는 걸까? 그저 손을 뻗고 그것을 따서 입술로 가져가기만 하면, 그들도 그것을 맛보게 될 텐데.     p.163

 

'현란한 식물군과 동물군에 황홀해'하게 되는 자연 풍경과 '뜨거운 물에 느리게 익사하는 기분'이 드는 여름 날씨,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폭풍우와 허리케인의 소용돌이를 체험하면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플로리다라는 장소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라쿤과 아르마딜로와 앨리게이터가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폭풍우를 견디고 하늘 위의 달을 올려다 보며 시공간에 홀로 선 듯한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들의 모습에 서서히 동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외롭고 불안한 존재인 우리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 너무도 안도가 되었다. 극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상대에게 이야기를 하고, 틈이 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삶의 어떤 부분을 견뎌내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강렬한 교감의 순간을 선사하는 문장들은 영원히 기억에 남게 마련이다. 바로 이 작품 속의 이런 문장들처럼 말이다. '그는 마음속에 다른 누군가를 결코 등호 같은 뭔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순수하고 완전한 뭔가로.', '내 아이들, 인류 문화가 길러지고 있는 두 배양 접시가 무한히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빤히 쳐다보는 눈은 대체로 중년의 시기에, 길고 느린 실망의 순간들이 이어진 뒤에 생긴다','이제 그녀는 알고 그들은 모르는 그것이 그녀를 은밀한 삶의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내면의 헬륨 같은 것','죽은 자는 우리에게서 가져갈 것이 없다. 산 자가 가져가고 또 가져간다','단어들은 삶에서 깎아낸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책을 읽으면서 차츰, 그녀는 한 언어가 요구하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등등..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의 근사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한 문단, 한 문구, 흔한 단어 하나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이 책은 당신을 바로 그런 순간들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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