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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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인류의 기초를 흔들고 균열을 일으킬 때까지 자랄 수 있는 곳임을 인지하기 시작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정보 수집자들은 우리에 대해 이렇게 외치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어떻게 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무시당했다고 하면 귀 기울이지 않는 거지? 이들이 공격 당하는데 아무도, 단 한 명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지? 누가 타인을 저렇게 대하지?" 하지만 충격 속에서도, 그들은 그 생각을 공유하네. 악은..... 퍼져 나가겠지.     

-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 중에서, p.28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전의 우주가 사라지고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는 '확산 현실'의 현상인 프롤리프가 반복되는 일상. 현실의 뒤집기가 일어나면 온라인상에 게시한 기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매일 리셋이 된다. 헬렌은 자신이 쓴 시가 매번 뒤집기를 거칠 때마다 저절로 지워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온라인 상에 기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연약한 언어를 타인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았고, 그냥 사라지도록 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최근에 쓴 시를 게시해서 친구들과 나누기로 한다. 개인 대 개인으로 메시지나 이메일을 통한 연락은 가능했지만, 직접적인 개별 연락은 불가능한 시대였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타인과의 연결을 갈구했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다면 누구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확산 현실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애초 세상과의 관계가 약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 수록된 <너무 많은 어제들, 충분치 못한 내일들>이라는 작품 속 이야기이다.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휴고 상 최우수 장편상을 3년 연속 수상하며 전례 없는 새로운 역사를 쓴 N. K. 제미신의 첫 단편집이다. <다섯 번째 계절>과 <오벨리스크의 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석조 하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다. 이 단편집에는 '부서진 대지' 3부작의 기초가 된 작품도 있으며, 스팀펑크, 어반 판타지 등을 망라해 제미신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저자가 흑인 여성으로서 SF와 판타지를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주제로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왔고,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22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이카는 소녀의 감정을 아는 것처럼 미소를 짓는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사냥하는 건 다 이유가 있지. 따지고 보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이카는 대충 북쪽을 가리킨다. 거기서 대륙을 들쭉날쭉하게 가로지르며, 붉게 피 흘리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세상을 파멸시켰다. "하지만 혹시 그들이 우리를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괴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는 우리가 당분간 사람처럼 살면서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구나"    

- '스톤 헝거' 중에서, p.402

 

SF와 판타지를 쓰고 싶은 흑인 여성으로서, 제미신에게는 작품을 출간할 기회도, 비평가들의 눈에 띌 기회도 없었던 2002년이었다. 그녀는 막 서른 살이 된 직후였고, 살고 있던 도시는 추웠고, 친구 사귀기도 어려웠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연애를 끝낸 뒤였고,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취미였던 글쓰기로 조금이나마 돈을 벌면 어떨까 하고, 일주일짜리 워크숍에 참석하게 된다. 그 짧은 기간에 얻은 조언 중에 단편 쓰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단편을 쓰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다양한 형식들을 실험해 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에도 수록된 <용 구름이 뜬 하늘>이라는 단편이 그녀가 프로 작가로서 처음 판 소설이다. 제미신은 이러한 배경을 이 책의 서문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유는 이 단편들은 단순히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녀가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연대기라 더욱 의미가 있다.

 

<위대한 도시의 탄생>, <스톤 헝거>, <수면 마법사> 들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와 '위대한 도시들' 시리즈 등 장편 작품들을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비제로 확률>은 휴고 상?네뷸러 상 최우수 단편상 후보에 올랐었고,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과 <깨어서 걷기>는 각각 어슐러 르 귄과 로버트 하인라인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공간과 소재를 다루고 있는 너무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들에게도, 아직 제미신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한 독자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여성과 유색인,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한 현실을 SF적인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어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읽어 보길. 바로 여기 SF 판타지의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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