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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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웨이드 부인."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내 의견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런 일은 날마다 일어나니까.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이 정말 터무니없는 범죄를 저지르죠. 인정 많은 할머니가 온 가족을 독살하기도 해요. 단정한 젊은이가 몇 번이나 강도질을 벌이면서 총질까지 해요. 20년 넘게 완벽한 근무 기록을 자랑했던 은행 지점장이 알고 보니 오랫동안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죠. 그리고 성공해서 인기도 많고 마냥 행복해 보이는 소설가가 술에 취한 채 아내를 때려 입원시키는 일도 있어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어요."     p.156

 

이 작품은 15년 전에 6권짜리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으로 출간되었을 때 읽었고, 이번에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다시 출간이 되어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1939년 <빅 슬립>을 시작으로 <안녕 내 사랑>, <하이 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그리고 1954년 <기나긴 이별>로 이어진다. 그 뒤로 1958년에 출간된 <Play back>과 같은 해에 집필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1959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미완성작이 된 <Poodle Springs>가 있다. <플레이백>은 영화 시나리오로 썼다가 영화화되지 못하고 나중에 소설로 고쳐 쓴 것이라 분량도 짧고, 문체도 단순하며, 말로도 좀 가볍게 행동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반응이 좋지 못했고, <푸들 스프링스>는 단 네 챕터만 쓰고 이후에 다른 작가가 완성 시켜 한참 뒤에 출간되었다.

 

사실상 <기나긴 이별>이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셈인데, 그래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이 작품이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 수도 두툼한 편이고, 필립 말로의 개인적인 내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챈들러가 이 작품으로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와의 이별을 보여주려고 작정하고 쓴 것처럼. 사건의 플롯들을 전체적으로 짚어 보자면, 필립 말로가 친구와, 여자와, 의뢰인들과 '기나긴 이별'을 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빅 슬립>에 등장할 때 33세의 나이였다. 지방검사 수사관으로 일하다 명령불복종으로 해고 당했고, 사무실을 운영하며 제대로 사설탐정으로서 일하게 되는 것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하이 윈도>였다. 다섯 번째 작품인 <리틀 시스터>에서는 38세, 그리고 여섯 번째 작품인 <기나긴 이별>에서는 42세로 나온다. 냉소적이고 혈기 넘치던 청년에서 이제는 40대 중년 탐정의 원숙한 모습이 된 것이다. 물론 냉소적이고, 고집 세고, 강자에겐 강하고, 할 말 다하는 시니컬한 모습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만약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가 궁금하다면, 그런데 시리즈가 6권이나 되어 고르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기나긴 이별> 한 권만 읽더라도 전설적인 탐정 필립 말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사설탐정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딱히 평범한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사람이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가 될 수도 없는 데다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두들겨 맞거나 총질을 당하거나 유치장에 처박히기 일쑤다. 드문 일이지만 죽기도 한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이 일을 그만두고 그럴싸한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거리기 전에. 그런데 그때마다 초인종이 울리고, 내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나가면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골칫거리와 새로운 슬픔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서 약간의 돈을 내민다.    p.238~239

 

필립 말로는 고급 클럽 <댄서스> 앞에서 테리 레녹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라 함께 온 여자에게도, 클럽의 주차원에게도 무시 당하고 있던 참이었다. 말로는 그를 자신의 집에 데려다 재워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가끔 만나며 우정 비슷한 것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레녹스는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했다 이혼한 상태였는데, 곧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레녹스는 장전된 권총을 들고 와 간밤에 아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하며 말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말로는 그를 멕시코의 국경 도시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집에서 그를 기다리던 경찰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경찰의 무례한 태도와 엄포에 말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친구를 밀고한 탐정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레녹스를 배신하지 않은 대가로 갖은 고역을 당하지만, 사건이 갑자기 종결되어 버려 석방이 된다. 레녹스가 자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어쩐지 찜찜한 구석이 있었고, 변호사, 조폭 등 관련자들이 말로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다는 경고를 하는데, 말로의 고독한 싸움은 계속된다.

 

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8편의 장편소설과 21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이 하드보일드 3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챈들러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간결한 문체,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 묘사, 생생한 거리의 언어로 이루어진 거친 대사들과 시니컬한 유머 등을 특징으로 한다. '말로도 늙어 가고, 독자들도 나이를 먹어 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지나치게 많은 (수상쩍은) 돈을 변함없이 거절하고, 부자들의 허영과 기만을 부러워하지 않고, 어차피 더 강하고 높은 자들에게 굽실거릴 것이 분명한 권력자들의 허세 앞에서 기죽지 않고,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서 뒤늦게라도 <남들처럼> 살아 보겠다는 희망을 품지 않고, 혼자서, 천천히, 비열한 밤길을 걸어간다.(작품 해설)' 는 표현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자들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언젠가는 챈들러의 미완성작인 <Poodle Springs>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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