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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 - 여인의 초상화 속 숨겨진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9월
평점 :
어두운 방에서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을 때, 화가의 얼굴은 경탄으로 바뀌었다.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둘러싸여 내내 찡그리고 있던 차였다. 아침부터 열이 있었고 돈은 끝없이 부족했으며, 빚 때문에 여관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아내의 다그침이 있었다... 현실에서 화가는 언제나 이런 종류의 지난하고 지루한 일상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몇 달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 소녀를 만났다. 조용하고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는 소녀였다. p.131
이 책은 화가들이 그린 여인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양한 명화들 중에서 여인이 등장하는 작품의, 그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특별한 미술책이다. 명화를 보면서 한 번쯤 '그림 속 저 여인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면,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배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젊은 두 여자의 모습을 파격적이고, 생생한 터치로 그려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그림을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붉은 피가 하얀 침대 위로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긴 칼, 걷어 올린 소매와 의연하고 냉정한 표정의 여자들까지 우연히 보더라도 절대 뇌리에서 잊혀질 수 없는 강렬한 작품이다. 아마도 미술사에서 살인의 순간을 이토록 잔인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바로크 시대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이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성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바탕으로 유디트를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그렸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살인의 묘사는 점점 구체화됐고 잔인함의 농도는 짙어졌다. 그러한 그림 속에 담긴 잔혹성은 남성들의 세상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에 소개된 1612년 로마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과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알고 나니, 왜 그런 그림을 그려야 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 사건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다시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순수와 낙관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저 잔인하고 무서운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림이 그려지기까지의 배경 이야기를 들으니, 작품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페르메이르는 마치 자신의 소명이 일상을 영원으로 가두는 데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말라비틀어진 레몬 껍질, 누렇게 색이 바랜 벽, 컵에 부딪히는 빛, 아무렇게나 놓여진 책들로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그림을 채웠다. 구체적 일상 속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생의 순간들과 그 속에 깃든 신비와 감동은 그의 캔버스에서 아름다운 빛으로 충만한 시적 순간이 됐다. p.139
다양한 그림 속 여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그려진 배경, 화가와 모델의 관계, 역사적 맥락 등 여러 흔적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클로드 모네의 <카미유,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에드가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 빈센트 반 고흐의 <슬픔>, 폴 세잔의 <푸른색 옷을 입은 세잔 부인>, 마르크 샤갈의 <생일> 등등 매혹적인 명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화를 감상할 때 그림이 주는 분위기나 기법, 색채 등에서 오는 보여지는 면에 치중하게 마련이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작품의 배경을 일일이 알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명화가 탄생하게 된 계기와 화가가 활동할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그림 속 모델 과의 관계와 뒷 이야기까지 알게 되고 나니, 앞으로는 작품을 감상할 때 완전히 다른 감상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일차원적인 감상에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진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가 주변에서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여인들의 존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지난 1000년의 여정 속에서 그림 속 많은 여인들이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명화를 보면서 '그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은 누구인지' 궁금해 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림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을 가이드 삼는다면 그림 속 그녀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