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함께 빵을 에프 그래픽 컬렉션
톰 골드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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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재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을 별 생각 없이 둘러볼 때가 있다.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었던 책도 있고, 괜히 읽었다 싶을 만큼 실망스러웠던 책도 있다. 곧 읽을 예정인 책도, 반쯤 읽다 지루해서 덮은 책도 있고, 읽었지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책도 있다. 언젠가는 꼭 읽으려고 아껴두고 있는 책도 있고, 샀지만 읽게 되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있다. 그 중에는 읽지 않았음에도 다 읽은 것처럼 알고 있는 책도 있고, 다른 버전으로 읽었지만 합본 혹은 리커버 버전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구매한 책도 있다.

 

책이 이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습관적으로 장바구니에 신간들을 담고 있는 나 같은 독자라면 무조건 공감하고, 열광할만한 작품을 만났다. 최근에 책 컬렉터이자 작가이며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랜트 스나이더가 쓰고 그린 만화 에세이 <책 좀 빌려줄래?>라는 작품을 읽었었는데, 그 책과 비교해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랜트 스나이더의 책이 탐독가로서의 책 소장과 책 읽기에 대한 글들과 작가로서 느끼는 창작의 기쁨과 고통을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는 데 비해, 이번에 만난 톰 골드의 책은 최신 문학 트렌드와 문학계와 소설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책덕후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작품이라는 점은 같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만화계의 아카데미인 아이스너상 수상작으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연재된 책과 문학에 대한 '유머 카툰' 컬렉션이다. 저자인 톰 골드는 ‘애서가들의 만화가’로 유명한데 국내에도 그의 대표작 <골리앗>을 비롯해 그래픽노블 작품들이 몇몇 출간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개성 있는 그림체와 기발한 풍자와 해학으로 유머와 작품성으로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모두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나 그는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작가로 유명한데, 덕분에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현대 추리 소설 작가들을 위한 살해 방법 몇 가지, 극적이지 못한 줄거리 구성 네 가지, 소설가를 위한 키보드 단축키 모음, 전형적 여주인공의 아홉 가지 유형, 해골 부대의 습격으로 인한 세계 종말의 위기 속에서 당신의 소설을 출간시키는 방법, 첩보 소설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하는 방법, 제임스 본드 신간 소설 속 몇 가지 유감스러운 오류, 창의적인 작가를 위한 미루기 기술, 10주 과정 등등.. 제목만 보더라도 내용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기발하고, 아이디어 넘치는 카툰들이 담겨 있어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작품 분석, 출판사의 비용, 작가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 출판계의 트렌드, 서점, 저널 등 책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각각의 분야에서 비틀고, 풍자하고, 거침없는 농담으로 보여주고 있는 카툰들은 그야말로 '고품격 유머'로 가득하다. <전쟁과 평화>의 낚시성 홍보 문구들은 기발했고, 회고록 집필자의 삶은 너무 웃기면서도 현실적이었고, 셰익스피어 시대의 진정한 극장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섯 장의 카드는 그의 문학적 지식과 만화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다.

 

집 안 곳곳에 책들이 쌓여 있고, 점점 어수선해지는 서재에 들어 가려면 발 디딜 곳부터 만들어야 하고, 책으로 인간관계를 대신하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책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 몇 컷의 만화로, 혹은 한 컷으로 그려내는 '책을 위한, 책에 의한 톰 골드의 세계'를 만나 보자. 책을 사랑하는 바로 당신을 위한 엉뚱하지만 너무도 멋진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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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사랑한 컬러의 역사 CHROMATOPIA
데이비드 콜즈 지음, 김재경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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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처럼 하얀 리드 화이트는 수백 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안료였다. 리드 화이트 없이 미술의 역사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납은 독성이 강해 오래 노출되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물감을 제한된 시간에만 쓰는 예술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리드 화이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두통, 기억력 상실, 복통 같은 중독 증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p.39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안료의 역사와 고대부터 현재까지 주요했던 안료 60여 개를 소개한다. 저자가 거의 40년 간 색을 만들어 온 현직 물감 제조업자라서 매우 구체적이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안료는 오커, 황토이다. 오커가 사용된 흔적의 기원이 250,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니 말이다. 천연 오커에 함유된 철로 다양한 노랑, 빨강, 갈색을 만들 수 있다. 초기 인류는 오커 팔레트에 초크 화이트를 추가해 색을 만들었다고 한다. 초크 화이트는 탄산칼슘이라고 하는 부드러운 흰색 광물이다.

 

 

그 밖에도 램프나 기름을 태워 발생하는 그을음을 모아서 램프 블랙을 만들고, 뼈를 불에 넣어 유기물이 모두 재로 변할 대까지 완전히 태워 만든 본 화이트도 있다. 생각보다 너무도 다양한 재료들로 컬러들을 만들어 온 인류의 역사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최초의 현대적인 색을 인공적으로 제조한 것은 1704년경이었다. 이는 아주 우연한 발명으로, '우연이 색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업 혁명 때 이루어진 직물의 염료에 대한 화학적 연구로 인해 물감 색의 종류가 빠르게 증가했다. 최초의 유기 합성 안료는 1884년 특허를 받은 타트라진 옐로로, 아조 옐로 염료는 지금까지도 채색 물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 등장한 프탈로라고 불리는 프탈로시아닌은 진짜 안료로 인정받은 최초의 유기 물감이다. 프탈로 안료는 착색력이 매우 좋고 오래가며 채도와 순도 또한 높아 예술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물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1868년에 발견된 이래로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불투명한 자주색을 띠는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생산 비용도 저렴해서, 옅은 코발트 바이올렛을 신속히 대체했다. 비록 착색력이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광채가 나고 매혹적이다. 인상주의 예술가는 그림자가 검은색이 아니라 물체에 반사된 빛의 보색이라고 여겼는데 망가니즈 바이올렛은 이에 걸맞는 완벽한 색이었다.    p.137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실제 안료 제작법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리드 화이트를 만들기 위해 납판, 식초, 설탕, 이스트 가루를 사용하는데, 완전한 색을 만드는 데 세 달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카민 레이크를 만들려면 연지벌레에서 용해성 염료를 추출해야 하고, 매더 레이크는 꼭두서니 뿔리가 있어야 한다. 선명한 진짜 울트라마린을 만들려면 최대한 순도가 높은 라피스 라줄리가 있어야 한다. 품질이 좋지 못한 광물을 사용하면 울르라마린 대신 연한 회청색 안료가 나온다고. 최상의 품질을 얻으려면 제조법과 여러 번에 걸친 공정도 중요하지만, 제일 좋은 등급의 원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각각의 색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잘 사용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수록했다. 마젠타, 파랑, 검정, 코발트 블루, 카드뮴 레드 등등 여러 작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색들의 다채로움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색과 색이 섞여서 어떤 느낌을 자아내는지, 지금은 흔히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금보다 비쌌던 컬러, 현재에는 볼 수 없는 컬러 등등 여러 컬러들의 색과 텍스쳐를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던 책이다. 디자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역사, 과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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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김미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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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이전의 방법으로 살 수 없다. 언택트 세상에서 우리를 연결해줄 유일한 방법은 온라인뿐이다.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생필품을 사는 내내 온라인은 지속적으로 세상과 나를 연결하고 있다. 언택트를 넘어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온택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온택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빠르게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p.69~70

 

코로나가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지 겨우 반 년이 되었을 뿐이지만, 이미 세상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은 갑작스런 실업과 폐업, 파산 위기를 불러 왔고 갑자기 일이 끊기거나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28년간 수백만 명의 청중을 만나온 최고의 강사 김미경의 삶 역시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어떤 천재지변에도 일주일 이상 강의를 쉰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 스케줄이 완전히 멈춰버린 것이다.  110만 구독 유튜브 채널 <김미경TV>의 크리에이터이자 20명 직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회사의 CEO인 그녀는 코로나 위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김미경 강사는 지난 5개월간 수십 명의 전문가를 만나고, 수백 권의 책을 보고, 수천 장의 리포트를 읽고 분석하며 '코로나 솔루션'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코로나 이전에 했던 사업 방식을 완전히 리셋해 초기화하고, 수개월에 걸쳐 각 사업별로 리부트에 돌입한다. 정리할 것은 확실히 정리하고, 변화된 세상에 맞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네 가지 리부트 공식에 맞춰서, 회사는 위기를 넘기고 순항 중이다. 이 책은 ‘개인’의 수준에서 ‘지금 당장’ 일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솔루션을 담고 있다. 직장을 잃을지 몰라 불안한 사람들, 가게 문을 닫을지 고민 중인 자영업자들, 매출 하락과 성장 부진으로 코너에 몰린 CEO들에 이르기까지 위기 극복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바이러스라는 위기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겐 리부트가 아닐까? 인생도 영화 시나리오처럼 흘러간다. 나라는 주인공은 여전히 존재하고, 인생의 시간도 영화 필름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 내 직업과 일상이 바이러스 때문에 멈춰버렸다. 다시 살려내려면 컴퓨터처럼 재시동하는 방법밖에 없다. 재시동을 위해 인생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 한다.    p.149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리부트'란 컴퓨터를 재시동하는 것처럼 캐릭터와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해 다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팀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리부트해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등장인물과 골격만 남기고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미경 강사는 '리부트'를 평범한 개인들에게 바뀐 세상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자고 외치는 도전의 구호로 쓴다. ‘멈춤’에서 ‘재시작’으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 '다시 시작'이라는 실행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시하는 4가지 리부트 공식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언택트 넘어 ‘온택트’로 세상과 연결하라
두 번째,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완벽히 변신하라
세 번째,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인디펜던트 워커로 일하라
네 번째, 세이프티, 의무가 아닌 생존을 걸고 투자하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이 막힌 언택트 시대는 온택트, 즉 온라인 대면으로 뚫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일상화를 이끌어내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야말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조직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미래형 인재 인디펜던트 워커는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일과 사업을 가장 안전한 형태로 바꿈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더해줄 세이프티 서비스는 온택트와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이 네 가지 공식을 꿈의 재료로 만들어 자신만의 '리부트 시나리오'를 쓰면 되는 것이다. 문제없이 잘 돌아가던 내 일상이 바이러스라는 위기로 인해 멈춰버렸다. 다시 살려내려면 재시동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단, 인생의 재시동에는 조건이 있다. '나'라는 등장인물은 같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만의 리부트 시나리오를 쓰는데, 이 책이 제대로 된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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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배신 스토리콜렉터 84
로렌 노스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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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준비를 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애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하니까 미안해서 말이 안 나오더라. 우리 아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미어졌어. 사랑, 날것 그대로의 순도 높은 사랑이 내게로 밀어닥쳤어. 비행기가 충돌하면서 당신을 데려갔지. 그건 내 세상을 철퇴로 후려갈겼지만, 내게 아직 세상이 남아 있는 건 제이미 때문이야. 그 애마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p.108~109

 

갑작스런 비행기 추락 사고로 남편 마크가 죽고 한 달이 지났다. 커다란 저택 안에 남겨진 건 테스와 일곱 살짜리 아들 제이미뿐이었고, 그것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 유일하게 안도감을 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슬픔에 젖어 있는 그녀에게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력이 없다. 그저 아침에 제이미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 정도만 할 뿐 가끔은 아이의 끼니를 챙겨주는 걸 잊어 버리기도 하고, 사소한 걸로 아이에게 화를 냈다가 금방 후회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다지 가깝지 않았던 마크의 형 이안이 찾아와 생전에 남편이 자신에게 빌린 돈이 있으니 갚으라며, 유산 집행을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테스는 산더미를 이룬 서류와 각종 우편물 등에 손을 댈 엄두가 안 나고, 약 때문인지 자꾸 사소한 것들을 잊어 버리곤 한다. 제이미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테스는 머릿속으로 마크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며 겨우 일상을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사별 전문 상담사라고 자신을 밝힌 셸리가 집으로 찾아 온다. 그녀는 꾸밈없고 친근한 스타일에 외모도 예쁘고, 밝은 성격의 30대 중반 여성이었다. 4년 전에 네 살 된 아들을 희귀 백혈병으로 먼저 보내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셸리는 금방 테스와 가까워진다. 테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대신 나서서 일을 처리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어 갔고, 그녀 덕분에 웃음을 잃었던 제이미까지 활기를 되찾게 된다. 그렇게 한달 정도가 지나갔고, 제이미는 엄마보다 셸리 아줌마를 더 찾으며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고, 테스는 조금씩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서 계속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한밤중에 집으로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 자신을 미행하는 의문의 남자.. 등은 테스를 점점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과연 그녀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헛것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슬픔과 고통으로 인한 피해망상인 걸까. 그녀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제이미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때 내 시야 가장자리에서 뭔가가 움직였어. 잠깐이었어. 어둠뿐이어야 할 정원에서 빛이 번쩍했어. 살갗에 소름이 돋고 웃음이가 사라지는 데는 그거면 충분했어. 난 다리미대를 떠나 창으로 다가갔어. 한 장짜리 유리창 안으로 싸늘한 공기가 스며들어. 밖은 칠흑처럼 어두워서 검은 거울에 코를 맞대고 서 있는 기분이야. 반사된 전등빛과 거실 소파와 텔레비전을 보는 제이미가 비쳐 보여. 내 얼굴이 보여.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튀어나온 광대뼈와 멍하니 응시하는 텅 빈 눈동자.     p.279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로렌 노스는 이 작품으로 영국 심리 서스펜스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작가가 심리학을 공부하며 인간 관계의 어두운 면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여성의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었다. 보통의 주인공의 내면 묘사에 치중을 하더라도, 다른 한 축에서는 서사를 이끌어 가는 다른 인물이 있거나, 상대의 내면 묘사를 교차 진행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 오직 한 인물의 시점에서만 사건의 모든 서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깊이 있게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는 대신, 주인공 캐릭터가 공포와 혼란, 불안과 분노에 휩싸인 상태로 스스로도 믿지 못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감정 이입을 할 경우 조금 답답한 느낌은 들 수 있을 것 같다.

 

후반부에 강력한 반전에서 오는 충격이 있기에, 이야기를 읽는 내내 작가가 세심하게 배치한 복선들을 따라가며 읽는 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피해망상과 가스라이팅, 그리고 모성이라는 감정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무더운 여름 밤에 읽기에 딱 제격이다. 슬픔과 상실감으로 시작해 오싹한 공포와 스릴을 배경으로 가족과 모성이라는 감정에 다다르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만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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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철도의 밤 인생그림책 5
미야자와 겐지 원작, 후지시로 세이지 글.그림, 엄혜숙 옮김 / 길벗어린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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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는 정신없이 내달렸어요. 그리고 곧장 반대쪽 어두운 언덕 위로 올라갔어요.
하늘의 은하수가 희끄무레하게 남쪽부터 북쪽까지 닿아 있는 것이 보였어요. 꿈속에서도 향기가 날 것 같은 초롱꽃과 들국화가 그 근처에 온통 피어 있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어딘가 먼 곳으로 가고 싶어……. 그런데 캄파넬라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린 시절에 어렴풋하게 밤하늘을 가르는 기차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본 기억이 아직도 난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선명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이후에 조금 더 자랐을 때 <은하철도 999>라는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되었지만, 그 만화의 원작이 따로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SF 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 원작이라고 한다. 내용상으로는 만화와 동화가 상당히 다르지만, 가장 중요한 소재인 우주를 가로지르는 기차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화가 탄생했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에 만난 작품은 그냥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책이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그림자 회화’ 카게에로 일본 화단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후지시로 세이지의 그림자그림은 정말 너무 아름다웠다. 동화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표현해내는 그림자그림은 환상적인 색감과 그림자로 각각의 장면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책은 후지시로 세이지가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글도 고쳐 썼기 때문에 원작 동화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원작에서 빠진 부분도 있고, 원작에 없는 부분이 추가된 것도 있어 동화로 원작을 만났던 이들에게도 특별한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덜컹, 덜컹덜컹. 기차는 찬란하게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강가를 힘차게 나아갔어요. 올리브 숲 위로 이따금씩 공작새가 휙휙 닫ㄹ리는 모습도 보였어요. 날개를 접었다 펼 때마다 드문드문 푸른빛이 반사되었지요. 은하수에서 검게 반질거리는 머리를 한 돌고래가 튀어나오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였어요... 수정으로 만든 것 같은 투명한 작은 궁전이 구름을 타고 남색 하늘 가운데에 떠 있었어요.

 

이 날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은하 축제날인 켄타우루스 축제날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은 밤에 있을 은하 축제에 갈 준비를 하지만, 인쇄소에서 일을 해야 하는 조반니는 그들이 마냥 부럽다. 조반니의 아버지는 바다로 돈을 벌러 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파서 줄곧 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면 언제나 마을의 인쇄소로 일을 하러 다녀야 했다. 조반니는 겨우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거리로 나서지만, 반 친구들은 여느 때처럼 돌아오지 않는 조반니의 아버지에 대해서 놀려 댄다. 슬퍼진 조반니는 정신 없이 내달려 반대쪽 어두운 언덕 위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늘이 수천 수만 빛의 알갱이로 반짝반짝 계속 빛이 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은하 철도를 달리는 기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캄파넬라를 발견한다. 조반니는 캄파넬라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신비로운 풍경들을 경험하게 된다. 텅 빈 보라색 하늘에서 눈 내리는 것처럼 내려오는 수많은 백로, 올리브 숲 위로 휙휙 달리는 공작새,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옥수수 밭 등등.. 조반니가 보고 느끼는 감정들이 매혹적인 그림자그림으로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번 작품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길벗어린이의 '인생 그림책’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책이다. 아름다운 그림이 눈을 사로잡고, 환상적인 묘사가 우리를 은하 철도를 달리는 기차 속으로 데려간다.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어른이 읽기에도 너무 힐링이 되는 특별한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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