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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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연쇄 살인범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김영하식 코미디. 어쩐지 이 짧은 소설 전체가 농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피식 웃게 만드는 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건 찝찔한 슬픔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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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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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 속에서 과거의 나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친구는 아무런 설명 없이 쓰쿠루에게 어느 날 전하는 그 문장.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덜컹거리는 걸 느꼈다. 담백한 어투, 느긋한 목소리, 군더더기 없는 문장...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를 지나서도 여전히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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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더 월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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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숨막힌데 도망갈 곳도 없고, 정말 지쳤을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여기서 시간을 딱, 멈춰버리고, 딱 한달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인터넷, 전화 연결도 하지 않고, 간단한 요기만 하면서 종일 책만 보면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혹은 정말 정말 되는 일도 없고, 일도 안 풀리고,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을 때는... 아 진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내지는 이곳이 아닌,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며칠만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 제인에게 닥친 그 숱한 불행과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그녀가 잠시 부러워졌다. 바로 이런 대목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후 삼주 가량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파스칼의 <<팡세>>에는 '인간의 불행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작은 방에 홀로 틀어박혀 있지 못하는 것에도 비롯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3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작은 방에서 홀로 지냈고, 행복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잠에서 깨 오트밀과 커피를 만들었다. 동틀 무렵 밖으로 나가 해변을 걸었다. 집을 떠나면서 현관문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영하 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15분이었다. 새벽 한기와 바다 바람 때문에 몸속의 나른한 기운이 싹 가시며 머리가 더없이 상쾌해졌다.


매일 아침, 다섯 시간씩 일했다. 동트기 전 기상, 아침 식사, 80분간 해변 산책, 그 후 다섯 시간 동안 원고 작업,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두 시간 동안 원고와 씨름했다. 그 후 다시 80분간 해변 걷기, 독서, 저녁식사, 다시 독서, 9시에 취침...


눈이 가득 쌓인 겨울,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옆에는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는 풍경. 식탁과 침대 옆 탁자에는 싱싱한 꽃이 꽂혀 있고, 냉장고에는 우유와 치즈가 넉넉하게 들어있고.. 나는 밖에 나갈 필요도, 누군가를 만날 필요도 없는 그런 상태말이다. 쓸데없는 고민에 빠질 필요도 없고, 뭔가를 신경쓰거나 걱정할 필요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딱 몇주만 보내고 싶은, 그런 때가 종종 있다. 계절은 꼭 겨울이어야 한다. 눈도 많이 오고, 추워서 밖에는 절대 나가고 싶지 않지만, 따뜻한 집 안에서 포근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텐데.. 우리의 주인공 제인에게는 '엎친데 덮친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주인공 제인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부모의 이혼/불행한 결혼생활을 박차고 떠난 아빠, 그 이유가 제인때문이라고 원망하는 엄마
2.첫사랑의 배신
3.대학교수와의 밀회/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파국
4.펀드회사 입사/FBI의 요원이 회사로 찾아와 아버지가 이중첩자였다는 걸 알려줌/권고사직 당함
5.뉴잉글랜드 주립대 영문과 교수/사람들의 텃세
6.영화광 테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강의와 육아 병행/테오는 도와주지 않고, 여자가 생김/
7.테오의 배신/투자한 영화사의 부도, 채권자들의 협박/딸 에밀리의 교통사고/죽음
8.제인의 자살시도/실패/정신병원
9.모든 걸 정리하고 캐나다 캘거리로 간다.
10.캘거리의 도서관에 취직/
11.딸을 잃은 아픔을 치유하지 못함/소녀의 실종 뉴스
12.소녀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봄/사건추적/범인 검거

 

목록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제인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사실 이 중에 두 세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다. 뭐 이리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나, 싶을만큼.. 끊이없이 새로운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사실 우리 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몇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면, 현재의 나를 상상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 그 당시 나를 알던 사람과, 지금의 나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분명 나라는 존재를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사람이란 환경에 맞춰 변화하는 존재이고, 그 환경이란 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다행이지만, 제인처럼 이런 일들만 계속된다면 글쎄.. 결국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불행의 연속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이, 또 이 책의 장점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기차게 재미있고, 흥미롭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인생이란 경기장에서 강펀치를 연속으로 맞다보니, 어느 순간 제인은 넉다운 해버렸고,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버리고,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인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식을 선택한다.

 

모텔로 돌아와 전화로 일처리를 시작했다.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우는 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비자, 디스커버리, 마스터카드에 전화해 모든 계좌를 취소했다.

..내 흔적을 깨끗이 정리하고 과거로부터 떠나왔다. 신용카드도, 노트북 문서도, 남아 있는 재산도 없었다. 현금 이천 달러와 여행자수표 천팔백 달러가 내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고, 부양자도 없고, 의무도 없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존재의 순수에 근접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완벽하게 자유롭고 나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 대한 책임도 없는 상태... 그렇지만 생각처럼 내 영혼은 해방감이 느껴지거나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내 인생의 하드디스크를 다 지워도 디테일한 감정까지 다 지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모든 게 낯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캐나다 캘거리로 가게 된다. 테오의 배신에 대한 충격과 채권자들의 협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증과 피로감에 강의시간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그런 와중에 딸까지 택시에 치여 숨기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나라도 그녀처럼 차를 몰고 자살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절망의 너무 밑바닥까지 그녀가 내려가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 실패와 더불어 정신 병원에서 몇달을 보내고 나자,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란 걸 깨닫고, 나를 망가뜨릴 수 없다면, 그럼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자신이란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미지의 장소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또 시작한다. 후반부의 이야기만으로도 한 편의 독립된 스토리가 나올 수 있을만큼. 그녀에게 또 많은 일들이 생긴다. 도서관에 취직을 하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러나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는 없어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에, 소녀의 실종에 대한 뉴스 보도로 한동안 떠들석해지고, 마침내 범인이 검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녀는 소녀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그 눈빛, 딸을 잃은 슬픔에 잠긴 그 눈빛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조사를 하고, 사건을 추적한다. 이 부분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리빙 더 월드>의 'Leaving'에서 'living'으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래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캐나다 캘거리의 풍경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제인에게 완전히 동화가 되어, 그녀가 어디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본 이미지이다. ㅋㅋ

 

마이클 더글라스의 작품을 읽다보면, '천일야화'가 생각난다. 죽음을 담보로, 죽음을 미루기 위해 밤마다 새로 지어내는 이야기말이다. 끝이 날 수가 없는 이야기, 더 듣고 싶은 욕망에 죽음까지 미루게 만드는 그 힘,, 왕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데 이야기는 무려 천일이 넘게 계속되었다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스토리.. 아마도 그 천일야화에 필적하는 이야기 꾼이 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전작을 모두 읽었고,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책이야말로 그가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듯이 끊임없이 다양한 스토리가 펼쳐지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중독성이라고 할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틀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매번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건 정말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 그럴때 읽으면 분명히 위로가 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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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2013-09-19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읽고 갑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 ㅋㅋ 저보다 깊이있으신 해석에 감동이요 : )

피오나 2013-09-23 14:54   좋아요 0 | URL
아마도 책의 어느 한 부분에 개인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해석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나봐요. ㅎㅎ
긴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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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감전당한 사람처럼 몸을 떨면서 두 시간 동안 내 영혼을 불태우는 그 원고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동안 곰팡내 나는 내 오랜 숙원인 복수의 욕망은 깊이를 더해갔고 그것은 점차 독기를 띠어갔다...이 소설의 성공을 내 복수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내 뇌를 스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몇 달 동안 두 개의 삶을 살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지만 또 하나의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마치 몽유병 환자 같은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일상에서의 복수란 생각보다 흔하지 않지만, 영화나 책에서는 참 쉽게도 등장하는 것이 복수이다. 그래서 참 수많은 복수의 방법, 과정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나 치밀하고, 차가운 복수가 있었나 싶을 만큼 이 작품의 복수는 독특하다.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판업자로 일하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인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 인기 소설가.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무려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존재감 없는 소년 에드워드는 잘생기고 매혹적인 소년 니콜라를 만난다. 당시 에드워드는 친한 친구들과 문예지를 만들고 있었고, 오로지 니콜라와 친해지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문예지에 니콜라의 작품을 실어주면서 친분을 쌓아간다.

 

이들의 만남은 애초에 잘못 시작이 된 것이다. 에드워드는 니콜라가 말을 걸었을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아름다운 소년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고. 그렇게 에드워드는 니콜라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결국 유일한 그의 친구들과 이별을 하고, 오로지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교정, 손질해서 문예지를 발간하지만, 그것도 니콜라가 곧 흥미를 잃자 발행이 중단되고 만다.

 

무릇 친구관계란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이 되고, 유지가 되어야 한다. 한 쪽이 지나치게 상대에게 빠져들어 헌신을 다 하면, 상대방은 점차 그의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고, 결국 친구가 아니라 마치 주인과 노예처럼 관계는 변질되어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매력을 앞세워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는 소설가.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인 두 사람. 친구의 그림자 뒤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열등의식 가득한 남자.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오만방자한 남자. 그렇게 그의 곁에서 그늘처럼 그를 바라보는 한 남자. 이 모든 것이 질투와 애증에서 비롯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잘 나가는 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는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의 신작 소설을 읽고 나서, 수십년동안 쌓이고 쌓인 모욕이 끔찍스러운 악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치밀하고, 무섭게 복수를 준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차분하고 꼼꼼하게 진행이 되는지.. 나는 이렇게 엄청난 복수극을 본 적이 없다. 아무런 조건없이 대상에게 매혹되었던 것처럼, 그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되는 과정은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복수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르다. 복수를 시행하기 까지, 계획하고,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에드워드의 심리 묘사는 굉장하다. 어쩌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완전무결한 범죄를 그린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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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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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10월 초의 평범한 오후, 87분서 수사반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검은 머리칼을 뒤로 묶어 올리고, 화장기 없는 하얀 얼굴은 창백한, 검은 외투에, 검은 구두를 신고, 검은 가방을 들고 있는, 마치 죽음의 화신처럼 보이는 여자, 버지니아 도지이다. 그녀는 38구경 권총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으로 형사들을 간단히 제압한다. 자신의 남편이 감옥에서 죽게 만든 스티브 카렐라를 죽이겠다고. 복수심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자란 굉장히 위험하다. 아무 것도 잃을 게 없으므로,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사를 위해 외근 중인 카렐라 형사를 기다리며, 그렇게 87분서 수사반의 모든 형사가 그녀의 인질이 된다. 건장한 남자들이 고작 여자 한 명 당해내지 못할까. 싶기도 하지만 문제는 니트로글리세린이다. 폭발하면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카렐라를 기다리며 형사들은 인질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각자의 성격대로, 캐릭터에 맞게 머리를 굴려 티나지 않은 묘안을 짜내려고 한다.

 

    

 

 

같은 시간,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카렐라 형사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축하하고 그녀와 수사반에서 저녁때 만나기로 약속을 한 뒤, 자살로 위장된 밀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중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형사의 아내는 시간에 맞추어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는 수사반으로 향하고, 카렐라는 아내와 축하 파티를 할 생각에 들떠 빨리 사건을 해결하고 수사반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렇게 인질극과 밀실 살인 사건 수사가 두 개의 이야기로 따로 진행이 되는데, 에드 맥베인은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스토리를 끌고 간다. 밀실극의 대부분이 항상 알고 보면 단순한 트릭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이렇게 인질극과 병행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밀실극 자체에 재미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256페이지짜리 짧은 분량이지만, 이야기는 밀도있게 진행되고, 다음 장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집중력을 높여준다. 제목의 어감이 좀 어려운 편인데, '쐐기'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각각 인질극과 밀실트릭에서 이용하는 것도 재미있고, '살의'라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표출내는 방식도 매우 흥미롭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경찰 소설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데, 『경관혐오』가 나온 1956년부터 시작되어 2005년의 『Fiddlers』까지 무려 50년간 이어진 시리즈라고 한다. 이번에 출시된 『살의의 쐐기』는 1959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는데, 만약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었던 시대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었겠지만, 현재 상태로도 매우 매력적인 작품 임에는 틀림없다. 추리 소설이 복잡한 트릭과 엄청난 반전이 있어야만 훌륭한 작품인 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진리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인물 관계도 복잡하고, 다중 플롯으로 어렵게 꼬아놓은 작품 들의 홍수 속에,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지만 매우 밀도깊은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이야말로 진정한 고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드 백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됐지만, '경관혐오'부터 최근에 출시된 '아이스'까지 차례대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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