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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죽음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원고를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감전당한 사람처럼 몸을 떨면서 두 시간 동안 내 영혼을 불태우는 그 원고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동안 곰팡내 나는 내 오랜 숙원인 복수의 욕망은 깊이를 더해갔고 그것은 점차 독기를 띠어갔다...이 소설의 성공을 내 복수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내 뇌를 스쳤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최면에 빠진 사람처럼 몇 달 동안 두 개의 삶을 살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지만 또 하나의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마치 몽유병 환자 같은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일상에서의 복수란 생각보다 흔하지 않지만, 영화나 책에서는 참 쉽게도 등장하는 것이 복수이다. 그래서 참 수많은 복수의 방법, 과정들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나 치밀하고, 차가운 복수가 있었나 싶을 만큼 이 작품의 복수는 독특하다.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판업자로 일하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인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된 인기 소설가.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무려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문학을 사랑하는 존재감 없는 소년 에드워드는 잘생기고 매혹적인 소년 니콜라를 만난다. 당시 에드워드는 친한 친구들과 문예지를 만들고 있었고, 오로지 니콜라와 친해지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문예지에 니콜라의 작품을 실어주면서 친분을 쌓아간다.
이들의 만남은 애초에 잘못 시작이 된 것이다. 에드워드는 니콜라가 말을 걸었을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아름다운 소년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고. 그렇게 에드워드는 니콜라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결국 유일한 그의 친구들과 이별을 하고, 오로지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 교정, 손질해서 문예지를 발간하지만, 그것도 니콜라가 곧 흥미를 잃자 발행이 중단되고 만다.
무릇 친구관계란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이 되고, 유지가 되어야 한다. 한 쪽이 지나치게 상대에게 빠져들어 헌신을 다 하면, 상대방은 점차 그의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고, 결국 친구가 아니라 마치 주인과 노예처럼 관계는 변질되어 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매력을 앞세워 대중적인 인기까지 얻는 소설가.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인 두 사람. 친구의 그림자 뒤에 숨어 지내야만 했던 열등의식 가득한 남자.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오만방자한 남자. 그렇게 그의 곁에서 그늘처럼 그를 바라보는 한 남자. 이 모든 것이 질투와 애증에서 비롯되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잘 나가는 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는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의 신작 소설을 읽고 나서, 수십년동안 쌓이고 쌓인 모욕이 끔찍스러운 악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 작품을 읽다보면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치밀하고, 무섭게 복수를 준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차분하고 꼼꼼하게 진행이 되는지.. 나는 이렇게 엄청난 복수극을 본 적이 없다. 아무런 조건없이 대상에게 매혹되었던 것처럼, 그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되는 과정은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복수와는 조금은 차원이 다르다. 복수를 시행하기 까지, 계획하고,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에드워드의 심리 묘사는 굉장하다. 어쩌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완전무결한 범죄를 그린 작품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