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ld you believe 290 people were died in the deep sea?

 No, I couldn't. I believed they would be rescued. Because the accident happened in the adjoining seas of our Korea, not in the remote ocean. It is a typical Korean disaster. And sadly enough constantly has it been repeated itself in this country.

On April 16, 2014, Dannwon highschool students were excited about their school trip. there was a family moved to a new house in Jeju. But their happiness and smile have fallen into the dark sea.

 Today is the 64th day after 290 people left us. The sadness of people turned into anger soon. Now, the anger is waning. We are forgetting it. But we should not forget this accident. We should never be still anymore,

 

The Sewol accident wasn't an unannounced mishap. Sewol was dangerous from the start. Chonghaejin Marine refurbished a ship which has been run for 18 years in Japan and named it Sewol. Since they bought the ship at a low price in Japan, they could make a lot of money. In the process of remodelling, there were somethings against the law. They shifted 3 billion won in the converting process to get more profit. This is not the end. Sewol should have been disappeared three years ago. But they had been extending deadline for 10years to use the ship cheaply. Besides they enlarged rooms, in order that they could earn 8 millions won of profits whenever Sewol departured. This ship whose every thing was in danger loaded a overburdened freight. There was 2000t overloaded cargo, therefor Chonghaejin Marine could earn the shipping costs 8million won. The overloaded freights were not bounded well. In Contrast, ballaster water was used only a quarter of the usual. Marine's desire, making money, made the ship Sewol too dangerous.

Finally, the ship which was full of corruption disappeared into the dark sea. After the accident the attitudes of sailors were criticized. Because the crewmen escaped from the sinking ship for the first. Behind their selfish action, there was a problem of the sailor's education. Korea's sailor educational expenses are only 540thousand won a year, While, Chonghaejin used over 60million won for giving bribes. In some ways, I think the skipper's selfishness is a natural result in according to the system of the management.

 

The Korean news about Sewol show us the death benefits, money that the victims' guardians will get. But foreign news demonstrated us how much time the passenger can survive in the deep sea.

 

It's Korea. The money is more important than the lives. I think that Sewol disaster was a warning for the generation of materialism.

In this situation, we can't skip the trouble of Gori Nuclear Power Plant. Operation of the Reactor-1 at Gori Nuclear Power Plant in Busan was resumed recently. The government decided to restart the nuclear reactor which was made in 1978. The reactor's design life was 30 years to 2008. But the government extended more 10 years to 2017 saying it is still safe.

 

Can you believe that it's safe? No, I can't believe. Why the government restarted the dangerous nuclear? That's right. If we don't restart Gori, they will pay a lot of money for that. This decision have a big risk. It won't finish with the death of 290 people.

The government is playing a game in security for their nation to earn more money.

We should never be still anymore. We shouldn't follow them who are blind with love of money.

Please don't be still in front of the generation of materialism anymore.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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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레미제라블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말할 때 6월 혁명을 일컫는다. 그러나 1832년 6월 혁명은 1789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된 프랑스 혁명의 일부일 뿐이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하층민을 억압하던 사회에서 버티다 못한 평민은 결국 혁명을 일으켰다.

1789년 귀족들의 회의에 문제의식을 가진 평민대표가 국민 의회를 구성하고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이 강제로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였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다.

 1793년 국민 공회는 루이 16세를 처형했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많은 유럽 국가에게 충격이 되었고, 영국, 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국가들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적인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지나친 공포정책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프랑스를 잠재운 것은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업적을 유지하고 계승하는데 기여하였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그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후 왕정복고가 일어나고 하층민의 불만은 다시 커져갔다. 그들은 1830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성공하였으나, 여전히 국민의 삶은 힘겨웠다.

 

               그래서 다시 일어난 혁명이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된 6월 혁명이다.

 

 

장발장이 출소하였을 때는 1815년 왕정복고 시대이다. 이 비열하고 끔찍한 사회는 테나르디에 부부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다. 사회에 혼란을 틈타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비열한 사회상이다. 가난한 하층민들의 모습은 판틴이 대표하고 있다. 6월 혁명은 시민군의 선봉인 앙졸라를 대표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들을 돕지 않았고, 결국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시민군들은 2만 5천명의 정부군에 의해 모두 시체가 되고 만다.

 

 

프랑스 대혁명의 싸움은 길었고 치열했다. 그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싸움이 나에게 헛되이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시민군이 안쓰럽다 못해 어리석어 보이기 까지 했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길 바라며 노래를 부르지만, 시민들은 창문을 닫고 만다. 열악한 상황에서 내부에서도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거리로 나온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은 가구들을 쌓아 만든 엉성한 바리케이트 뿐이다. 그들이 정부군을 제압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결국 시체가 되어 버릴 것도 알았을 것이다. 뻔한 결과임에도 그들은 꿋꿋히 거리에서 장열하게 전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시민군이 있었기에, 대부분의 나라가 독재가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의 붉은 피는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결코 그저 정부군에게 진압된, 패배한 시민군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자,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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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분단 69년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강대국에 의한 강제적 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69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다른 체제 속에서 교류 없이 살아온 남북의 통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통일 비용이나 문화적 이질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너무도 다른 체제 등은 분단을 고착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통일은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비록 지금은 남북의 교류가 거의 없지만 우리는 본래 한 민족이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였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과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이기 때문에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경제적으로도 통일을 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우리나라의 연 국방비 33조 원 중 약 11조원에 해당하는 방위력 개선비와 주한미군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인력과 자원이 우리나라의 개발 기술력과 합쳐진다면 산업 강대국으로 자리 메김 할 수 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관광의 이점은 물론 육로로 유럽 국가들과 쉽게 무역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 할 것입니다.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교류입니다.

첫째,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 협력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경제 협력은 북한의 경제 수준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북한에 자유의 물결을 흐르게 할 것입니다. 남북협력의 장이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될 때 남과 북이 서로 만나 어느 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협력하는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둘째, 스포츠를 비롯한 활발한 문화교류가 필요합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한다는 소식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1991년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의 단일팀 구성이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공동입장을 하였을 때를 생각 해 보면, 스포츠 교류가 남북 동질성 회복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학생들이 북한과 우리가 한민족임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현재 청소년들은 분단이 고착화 된 후의 세대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더욱 알지 못하며, 통일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남북이 하나였던 역사와 한민족의 의식을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교류를 위해서는 우리가 북한에게 적극적으로 대화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북한은 다른 어떤 나라가 아닌 우리에 의해 개방되어야 하고 우리는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다른 나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불행의 역사를 만들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통일의 단계 어딘가에 놓여있습니다. 통일의 계단을 오르다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불행히도 몇 계단 아래로 내려갔을 수도 있지만, 결코 통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의무이자 권리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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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아름다워 1 청소년의 책 디딤돌 11
육인선.남상이.심유미 지음, 박향미 그림 / 동녘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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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라는 학문은 ‘재미없다’고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제 1장에서는 동물이 수를 세는 방법과 인간이 수를 세던 방법들이 나온다. 일단동물은 인간과 달리 셀 수 있는 수가 한정되어 있다. 약4까지 밖에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수를 인식하기는 하나 이전에는 수를 셀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수를 세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체를 이용한 다양한 수를 세는 방법이 제시되어있는데 손과 발이 10개 이다보니 자연스레 10진법이 사용 된 것이라고 한다.

수를 셀 수 있게 되면 수를 표기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들만의 기호로 숫자를 표시했다. 큰 수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규칙이 필요하다. 그 규칙이자 큰 수를 나타 낼 때 사용하는 단위가 바로 ‘진법’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10진법을 사용하였으나 12진법을 사용한 국가도 있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60진법을 이용했다. 진법을 이용하여 큰 수도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숫자 ‘0’ 표기하기가 상당히 힘들고 애매했다. 그러나 0이라는 표기법이 만들어지고 10진법이 완성되었다.

수의 발전이라는 부분에서는 친근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때 배운 자연수부터 무리수 실수까지 그리고 후에 우리가 배울 허수까지 나와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존에 열심히 배웠던 내용 뿐만아니라 여러 재미있는 수학적이야기가 있었다. 삼각수나 사각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으나 완전수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무리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이었다. 삼각형에서 선분의 길이를 유리수로 나타 낼 수 없는 당황스러운 경우에 의해 무리수가 만들어 지게 된 것이다. 허수는 고1 과정에서 나오게 된다. 이 허수는 음수의 제곱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우스는 실수와 허수를 통틀어 복소수라고 했으며 오일러는 허수의 기호를 i로 표시했다.

우리는 수학을 하면서 +- =등의 수많은 기호를 사용한다. 제곱을 표시하는 것부터 부등호 등호까지 다 수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기호들이 없었다면 수학 식 하나가 엄청 길어졌을 것이다. 방정식도 수많은 수학자들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 졌다. 그 수학자들 중에는 불운하게도 일찍 죽은 사람도 있었고, 다른사람에게 그  공을 빼앗겨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덕분에 우리는 3,4차 그 이상의 방정식도 해결 할 수 있게 되었다.

뒷 부분은 기하학의 이야기이다. 탈레스의 비례식과 삼각형의 합동조건의 정리와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나와 있었다. 정사각형 사이에 낀 직각삼각형의 빗면을 구하는 정리가 나온다. 곧 배우게 될 내용으로 그를 증명하는 방법도 제시되어 있었다. 작도 불능문제도 있었고 구의 겉넓이와 부피를 구하는 것에대한 자세한 설명도 제시되어 있었다. 기하학이 상당히 어렵다고 느껴졌으나 다 우리가 아는 내용을 기초로 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학습과정에서 무심코 지나가게 되는 설명들이 자세히 나와있어 아주 유쾌히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해석기하학부분은 어려웠지만 새로웠고 수학이라는 것이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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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이 떠나고 우리 집의 가장 열성적이었던 축구팬이 덜 열성적이어 졌다. 이제는 A메치도 잘 챙겨보지 않는다. 그러자 내 동생은 축구에서 배구로 또 야구로 빠져들었고, 야구를 무척 좋아하시는 아빠는 동지가 생겨 즐거워하셨다. 그렇게 우리집의 두 남자가 야구에 빠지자 작년부터 한 학기에 한두번씩 야구장 또는 배구장을 가기 시작했다. 요번 시험이 끝나고 우리가족은 모두 야구장에 갔다. 엘지와 한화의 경기였다. 우리 아빠는 류현진이 한화를 떠나자 한화팬에서 롯데로 갈아타셨지만 내동생은 일편단심한화이다.

 잠실경기장은 넓었다. 당연히 매점도 매우 넓었고 음식의 종류도 다양했다.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경기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내동생이 우리가족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화 선수들 차 앞에 이태양이라는 투수가 서 있었다. (일단 우리가 본 경기에서 선발이 아니었으나 방금전 했던 한화와 기아의 경기에서 선발이었다. 비록 한화가 패했지만 이태양은 무실점으로 내려왔다.  ) 야구의 문외한인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랐지만 그냥 무작정 내 동생의 팔을 잡아끌고 싸인받으러 직행 했다.

 어머나 마이 데스티니... 기성용은 저리거라의 비쥬얼을 소유한 선수가 아닌가!  오흫~!!!고수인줄.

 뭐 그렇게 눈호강을 하고 경기장에 들어갔다. 내 동생은 글러브에 싸인을 받았다.

 

 당연히 한화 팬 석에 앉았다. 엘지 홈구장이 잠실경기장이었으나 의리있는 한화팬들이 가득이었다. 세월호참사로 인해 시구와 각종 행사가 빠졌고, 애국가만 간략히 불렀으며, 치어리더도 쓰지 않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매우 날씨가 어정쩡 해서 경기관람이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뒤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한화와 엘지의 경기는 치열했고 박빙의 승부였다. 앞심이 좋은 한화는 초반에 4점 차이로 이기기 시작하였으나 결국 막판에 또 밀리고 말았다.

 홈런을 한번도 보지 못해 안타까웠으나 안타로도 충분히 즐거웠고 가끔씩 날라오는 파울볼을 잡는것도 즐거움이었다. LG가 득점의 포텐을 터트리기 시작한 것은 내가 매점에 갔을 무렵부터였다. 잡시 마실것 좀 사겠노라 일어섰다가 돌아오니 점수차가 좁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점수틑 금방 좁혀져 갔고, 연장전을 코앞에 둔 9회말 LG의 득점으로 한화는 아까운 패배를 다시 맛봤다.

 야구라는 종목은 너무 투수에게 의존하는 스포츠인 듯 하다. 선발이 다시 들어오면 게임이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투수가 없는 한화는 투수가 바뀌면 전세가 금방 역전 된다.

 김태균, 피에, 김민수, 손주인, 엘버스 등의 많은 선수들을 알게 되었고, 일단 가족과 하루종일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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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행복해 웃을 때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합니다.

 국민들은 '가만있지'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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