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상당 부분 동어 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일이다.

나는 삶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한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고단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치적 동물의 길은 바로 그러한 삶과 정치에로 초청하는 작은 손짓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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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아흔아홉 마리가 한마리보다 귀한 것 같지? 경중이 다를 것 같지? 아니야. 아흔아홉 마리도 다 한 마리씩이야."
"선생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예수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옵니까? 우리가 숫자의 논리에 현혹되어 있다는 말씀인가요?"
"이보게!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길을잃을 수 있어. 왜 그 생각을 못 하나? 길 잃은 한 마리가 아흔아홉마리와 다른 게 아니야. 똑같아. 똑같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야.
한 명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을 예표하는 거야."

"맞습니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게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데이비드 데스테노David DeSteno라는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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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손자인 아룬 간디Arun Gandhi는 자신의 주목할 만한 저서인 「분노 수업에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치미는 분노를 생산적 에너지로 바꾸는 법을 자신에게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밝혔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분노를 전기와 비교합니다. "전기가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 나오면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해진 선을 따라 유도되어 나오는 전기는 빛을 만들고, 열기를만들어 낸다. 건강한 분노도 이와 같습니다. 건강한 분노는 인간에게 행동을 유발하고, 세상에서 삶의 여정에 중요한 변화를 도모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저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소모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노를 건강하게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데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네. 관찰해보면 알아.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나. 바람방향으로 가는지 역풍을 타고 가는지.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우리가 이 문명사회에서 그냥 떠밀려갈 것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역류하면서 가고자 하는 물줄기를 찾을 것인지…… 고민해야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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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문을 잠그는 자물쇠는 문의 안쪽에있습니다. 진부할지는 몰라도 설득력 있는 장면입니다. 문을 여는 열쇠는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는 자유로이 이러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삶이 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제 삶의 여정에 최고의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지도 수녀님께서 갓 입회한 저에게 규칙들로 꽉 짜인 수도원의 일상이 제 마음을 쪼그라들게하는지, 내적으로 새로운 저만의 자유 공간을 만들어 주는지 꼼꼼히성찰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은 정말이지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수도 생활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점점 커 가는 자유와 소임에 맞게 마음도 키워 가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이러한 내적 동요를 마주할 때마다 저는 그것에 대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편협한 저를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제가매일 반복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무엇이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게 해 달라는 것‘과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영혼 깊은 곳의 저를 자유롭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부름 받은 제 소명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원천적으로제게 부여된 자유가 점점 더 깊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아!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악의적이고, 어떻게 보면 무식하게도 들립니다. 제가 자연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분명 아닙니다. 저는 자연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보호하기위해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옳고 그름을 독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유기농, 채식주의, 친환경은 옳고 좋은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틀렸고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살 수 없고, 채소를 싫어하거나 소화하지 못해서 고기를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걷기가 힘들거나, 자동차가 그와 세상을 이어 줄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유는 보기에 따라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고자 하는사람은, 남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저는 사치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간, 평온함, 고요, 나 자신으로온전히 살아 내는 것, 혹은 내 이웃들 속에서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제게 사치입니다. 제가 아주 잠시라도 모든 생각과 기획들, 계획과 걱정, 그리고 욕망을 비운 채로 존재할 수있다면, 아니 정말 짧은 순간이나마 온전히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치일 것입니다.

얼마 전 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이 저는 재기 넘치고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글은 바로 이렇습니다. "누구도 예수님께서 삼십 대에 열두명의 친밀한 친구를 가졌다는 기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44만99명이 넘는 SNS 사용자들이 그 내용을 자신의 SNS로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좋아요!‘도 눌렀습니다.

물에 맛을 더하는 것은 갈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곁에 누군가 있음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은 고독입니다. 사막은 아마도 지속해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사막과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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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그래서나는 금수저 흙수저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 ‘노력해봐야 소용없다‘
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질문 하나 하겠네. 한밤의 까마귀는 눈에 보일까? 안 보일까?"
"한밤의 까마귀는 안 보이겠지요."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한밤에 까마귀가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야.
그리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이게 선에서 하는 얘기라네. 한밤에 까마귀는 있고, 한밤의 까마귀는 울지만, 우리는 까마귀를 볼 수도 없고 그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해. 그러나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탄생, 만남, 이별, 죽음….… 이런 것들, 만약 우리가 귀 기울여서 한밤의 까마귀 소리를듣는다면,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을 느끼는 거라네."
"한밤의 까마귀를 보고 그 울음소리를 듣는 것…….…."
"그러면 깨닫게 돼.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지금 이 순간의어긋남 혹은 스파크가 도미노처럼 내 이웃, 그 이웃의 이웃, 나아가전 세계에 종으로 횡으로 은은하게 퍼져가고 있다는 걸."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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