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정치적 동물의 길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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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음에 주목해보라. 그러면 많은 인간사가 설명되는 것 같다. 더러운 사람이 있다. 아, 씻기 귀찮았구나. 갑자기 수척한 사람이 있다. 아, 먹기 귀찮았구나. 착한 사람이 있다. 아, 남을 괴롭히기 귀찮았구나. 너그러운 사람이 있다. 아, 화내기 귀찮았구나. 정숙한 사람이 있다. 아, 연애하기 귀찮았구나. 변온 동물이 있다. 아,체온 조절하기 귀찮았구나. 버스종점에서 내린다. 아, 중간에 내리기 귀찮았구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아, 피임하기 귀찮았구나. 자살률이 줄어든다. 아, 죽기 귀찮았구나.
어? 내가 왜 앉아 있지? 큰 손해라도 본 듯이 부랴부랴 누워본다. 아, 이거였구나. 나에게 맞는 자세란,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진정한 내가 되는 느낌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않아도 된다.
정치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명론(名論)>이라는 에세이에서 말했다.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박지원이 보기에 전쟁, 지진, 홍수, 판데믹, 호환, 마마보다 참담한 재앙이란 바로 담담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다. 다 귀찮아하는 상태다. 그래서는 이 세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찮아하는사람들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하는 이의 관점이다. 뼛속 깊이 귀찮아하는 사람은 삶 자체도 귀찮아하므로 인류의 멸망 따위를 크게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을 감히 책임지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다르다. 이 세상이 사라지면 큰일이다. 책임질 대상이 없어지잖아! 나는 뭔가 책임지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천하는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무엇을 가지고 그 그릇을 유지할 것인가?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바로 ‘욕심‘이다." 사람들이 귀찮은 나머지 아무것도 안 하다가 멸종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뭔가 해보고 싶은 욕망.우리는 흔히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하지만, 사실 욕망이 없다면 이 세계는 텅 비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릇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멸종되고말 것이다. 욕심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어야 욕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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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축제 - 미키마우스의 손가락은 몇 개인가? 8020 이어령 명강
이어령 지음 / 사무사책방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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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보는힘이지요. 그러나 상상력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끝이 없어요. 이번에는 8자를 옆으로 눕혀보세요. 8자가 무한대의 기호로 뜹니다. 갑자기 0은 은하수처럼 빛나면서 무한대의 수로 돌변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8의 아라비아숫자는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으로 바뀌는 뫼비우스의 띠가되어 리사이클의 아이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0은 춤을추고 마술사의 검은 보자기처럼 무한한 둥근 원들을 뽑아냅니다.

어느 날 학부모 한 분이 저를 찾아와 자기 아이 걱정을 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거예요. 자기네 성이 홍인데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홍‘을 ‘홍‘이라고 읽지 않고 ㅎㅎ (히읗히읗)이라고읽는다는 거예요. 자기 성도 읽을 줄 모르는 아이의 학습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놀랐어요. 그동안 홍이라는 글자를 수도 없이 봐왔지만 한 번도그게 히읗(ㅎ) 자 2개를 포개놓은 모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없었단 말입니다. 아라비아숫자의 8자에서 0을 2개 보는 것처럼…

어머니가 눈대중으로 똑같이 나누어주신 별사탕도 수로 계산하면 차이가 났다. 이 차이가 우리를 괴롭혔던 것이다. 나의 몫이 형보다 한 알이라도 적으면 어머니가 그만큼 나를 덜 사랑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알이라도많으면, 자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숫자는 작은 차이와 함께 비교 의식과축적이라는 것을 동시적으로 가르쳐준다. 숫자는 많은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숫자는 분쟁을 낳는다.

BASISBE『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TO언어의 창조력이 고갈되어 문명이 쇠퇴기에 들어서면 숫자가 판치는 세상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몰락‘의 전주곡이다. 10『서구의 몰락』을 쓴 슈펭글러의 말이다. 2008그러나 차가운 숫자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춤추게 하고 영혼의 숨결로 그들을 날게 한 시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있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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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이 말은 대화를 시작하는 주제로 정말 형편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단지 그가 지닌 직업으로, 또한 그 직업에 따른 사회적 지위로 한정 짓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보통 ‘사회적인 접착제‘라고 일컫는 것들이다.
이 끈끈한 접착제는 때때로 우리의 피부와 옷자락에까지깊숙이 배어있어서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개방성과 자신에 대한 개방성에도 족쇄를채우곤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행동을 어색하게 만들고,우리의 판단력을 흩트려 놓으며, 우리에게 생겨난 호기심의 불씨를 단숨에 꺼뜨린다.

상대방의 사회적인 조건이 자기의평소 기준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의 동요에 기습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만남이 지닌 진정한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만남은 하염없이 늘어지는 기다림의 시간을 없애주는 힘, 예측을 벗어나게 해주는 힘, 그리고 판을 엎어서 새로운 카드를 나눠주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만남이 불러일으킨 동요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강렬한 감정이다. 이렇게 드러난 내면적인 자아는 이제 사회적 자아에 의해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적 자아는 돌연 그 경계를 뛰어넘어 사회적 자아 위로넘쳐흐르게 된다. 만남이 일으키는 동요는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때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생겨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불러오기도 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 벽은 이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일을 하시죠?"

모든 종류의 약속에 있어서 현재 진행 중인 어떤 만남의 지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분명한 감정-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보기의감정이다. 내가 당신을 알아본다는 말은 당신이 나에게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나의 모습이라든가 내 마음에 드는 어떤 것, 아주 오래된 기억,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어떤 상황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가 나의 운명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우연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내 운명의 실체를 스스로알아차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남을 상징하는 하나의신호는 바로 이런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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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한가운데에서, 우연히만난 것이 아니었던 어떤 사람과의 약속에 하나의 확실한감정이 들면서, 그것이 별안간 운명의 외양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 감정은 우리가 하나의 ‘발견‘을 체험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그런 사람을 보내준 운명에 대해 감사의 마음까지 들게 만든다. 나는 내가 마주친 것이 당신인지, 나인지, 나의 운명인지, 아니면 이 세 가지 모두인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만남이 존재하는 곳에 발견이 존재한다. ‘발견‘이라는 말은 다의적인힘이 내재된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그것을 살펴봐야 한다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인식‘이라는 것은 ‘다시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사용했던 용어로 다시 풀이하자면, ‘인식‘이란 ‘상기하는것(플라톤의 유명한 이론인 상기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가 진과 선, 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원래살았던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즉 이 철학자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면 인간은 인식에 의해서 그것을 기억한다고 믿었다. -역주)‘이다.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지상에서 보내는 한정된 기간 동안 우리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있기 전에, 이미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있다. 우리는 죽으면서 그 세계를 다시발견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가 지닌 한계로부터 풀려난다. 이렇듯 하나의 이데아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육체의 굴레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원성의 형태로 이데아를 알아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이데아, 즉 하나의 관념과마주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사실 솔랄에게 있어서 아리안은 완전히 낯선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순간도, 그가 일생일대의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속눈썹이 한 번 치켜 올라갔던 순간" 이라는 짧은 시간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논리나 이성적인 사고도 필요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솔랄이 그녀에게서, 그런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 무엇인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발견은 "기대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했으니 전자도 맞는 말이고, 그가 갈망해 왔던 욕망의 대상을 알아본 것이니 후자도 맞는 말이다. 그가 살아온 과거의 삶 전부가 그를 그 욕망으로 이끌었으므로, 그는 욕망의 대상인 그녀와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던 셈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둘러보려는 갈망에 사로잡혀, 그 세계의 문턱 위로 불쑥 뛰어들게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어떤 미지의 여행으로 떠나게 해주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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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아델에게 머무는 엠마의 시선과 미소 속에 호기심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아델은 엠마보다 더 어렸고, 동성애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의 기본적인 매너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클럽에 들어선 이 낯선 존재, 그곳에 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아델의 모습이 엠마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이 만남에서 주목할 점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낯선 사람에게서 이상하리만큼 친근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그런 순간이 아니라, 자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는 욕망을 품는 순간이다. 비록 그 ‘다름’이 친근하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깝고 편하게 느껴지는 존재들 뿐 아니라 낯설고 생소한 존재들에게도 매혹을 느낀다.

나는 내 시선과 다른 관점을 지닌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타자성이 몰고 오는 이 괴로운 경험을 규정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타인이 나의 세계를 훔친다." 이 경험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관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 반드시 뒤따른다. 타자성에 대한 이런 발견은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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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냈던 이 시간의 한복판에서, 프란체스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만남의 핵심을 표현한다. 이 말은 나흘 내내그녀를 따라다녔던 감정적인 동요를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 진정한내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곧 사랑에 빠지고 자기들의 존재를 바꾸게 될 열정을 경험한다.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두 사람은 마치 인생 전체를 요약한 것 같은 정열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프란체스카는 가슴을 에는 듯한 괴로운 망설임 끝에 가정을 버리지 않기로, 로버트를 혼자떠나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했던 모든것들은 평생 그녀의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다. 농가에서로버트와 함께 보냈던 모든 ‘자잘한 추억들‘의 시간은 매일매일 그녀의 삶을 보듬어주는 자양분이 된다. 프란체스카가 마치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 감정은 그녀가 아이오와주에 정착하게 되면서 뒤로 훌쩍 밀어놓았던 젊은시절의 꿈과 같은 연애 감정이었다.

르네 샤르는 자신의 저서 『모여있는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공동의 세계 밖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엄청난 배고픔까지 감수한 상태로,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야 한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만을 위한 행동이다." 이 문장은 만남이 가져다주는 동요를 아름답게 정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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