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문을 잠그는 자물쇠는 문의 안쪽에있습니다. 진부할지는 몰라도 설득력 있는 장면입니다. 문을 여는 열쇠는 항상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저는 자유로이 이러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삶이 육화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제 삶의 여정에 최고의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지도 수녀님께서 갓 입회한 저에게 규칙들로 꽉 짜인 수도원의 일상이 제 마음을 쪼그라들게하는지, 내적으로 새로운 저만의 자유 공간을 만들어 주는지 꼼꼼히성찰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던 것은 정말이지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수도 생활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점점 커 가는 자유와 소임에 맞게 마음도 키워 가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이러한 내적 동요를 마주할 때마다 저는 그것에 대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편협한 저를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제가매일 반복해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무엇이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게 해 달라는 것‘과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영혼 깊은 곳의 저를 자유롭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부름 받은 제 소명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원천적으로제게 부여된 자유가 점점 더 깊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아! 지금 모든 것이 너무 악의적이고, 어떻게 보면 무식하게도 들립니다. 제가 자연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분명 아닙니다. 저는 자연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보호하기위해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옳고 그름을 독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유기농, 채식주의, 친환경은 옳고 좋은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틀렸고 나쁜 것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살 수 없고, 채소를 싫어하거나 소화하지 못해서 고기를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걷기가 힘들거나, 자동차가 그와 세상을 이어 줄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유는 보기에 따라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고자 하는사람은, 남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저는 사치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시간, 평온함, 고요, 나 자신으로온전히 살아 내는 것, 혹은 내 이웃들 속에서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제게 사치입니다. 제가 아주 잠시라도 모든 생각과 기획들, 계획과 걱정, 그리고 욕망을 비운 채로 존재할 수있다면, 아니 정말 짧은 순간이나마 온전히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치일 것입니다.

얼마 전 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이 저는 재기 넘치고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글은 바로 이렇습니다. "누구도 예수님께서 삼십 대에 열두명의 친밀한 친구를 가졌다는 기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44만99명이 넘는 SNS 사용자들이 그 내용을 자신의 SNS로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좋아요!‘도 눌렀습니다.

물에 맛을 더하는 것은 갈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곁에 누군가 있음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은 고독입니다. 사막은 아마도 지속해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사막과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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