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무관심 - 함께 살기 위한 개인주의 연습
한승혜 지음 / 사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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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상벌이 그가 속한 집단에게 공동으로 부여되는 것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국가, 성별, 인종, 가족, 학교와 같은 ‘반강제적’ 집단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으로 그의 부모나 자식이 함께 비난을 들어야 마땅한가? 범죄자의 자식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나? 재미동포가 저지른 범죄는 한국인 전체의 잘못인가? 아시아인이 저지른 과오는 아시아인 모두의 공동책임인가?

물론 누군가의 과오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단 전체에게 추궁하는 것은 매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표적을 필요로 하며, ‘집단’은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압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이며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하여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류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은 대개 어떤 혐오의 감정이나 개인의 잘못을 특정 집단에게 덧씌우려 해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시대에 성별 갈등이 심해서 큰일이라고. 역시 페미니즘이 문제라고. 인터넷에 득실거리는 흥분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해악을 좀 보라고. 글쎄,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 때문일까? 페미니즘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어떠한 이념 안에서 극단적으로 변한 개인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단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라 지역, 인종 등 온갖 지표를 둘러싼 모든 갈등 안에 ‘광신적인’ 움직임이 있다. 이 세상 모든 남성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극렬 페미니스트의 발언이 문제라면, 지금의 모든 갈등이 페미니즘 때문에 일어난다는 주장 역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은 본래 불안한 존재이며, 불안한 개인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에너지와 충동을 잊기 위해 몰두할 대상을 찾아 자주 헤맨다. 그리고 대상을 찾아낸 이후에는 불안과 번뇌를 잊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거나 헌신적으로 돌변한다. 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불안한 자아를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예술이나 학업일 때는 긍정적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종교나 정치, 어떠한 이념이 되었을 때는 종종 큰 문제가 생겨나기도 한다. 과잉된 신념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며,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는 자주 밖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고 집단에 의탁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는 맹목적인 충성심을, 타 집단에는 격렬한 배척과 혐오감을 갖기 쉽다.

결국 집단과 무리에 기대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 전체의 갈등과 분열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된다면, 불안과 결핍을 잊고자 무언가에 의탁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 우뚝 선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좀 더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은 복잡하고, 어떻게 하더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우리가 사는 이곳을 무결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지금보다 애쓴다면, 그러한 세상에 조금 더 근접해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간섭과 참견을 하지 않는, 나와 다른 타인의 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당한 무관심의 사회. 그러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을 잊지 않는, 서로에게 다정한 사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다정한 무관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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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 구텐 백
백경학 지음 / 푸르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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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교통사고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 새삼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 주위에는 선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는 소식은 대부분 어두운 것들이었고 나 역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기사보다는 어두운 문제점을 파헤치는 기사를 주로 썼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잠만 깨면 접하는 무서운 소식으로 눈뜨기가 겁나는데, 네가 쓴 기사도 그 못지않게 무섭더구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재단 활동을 하면서 세상에 악한 사람보다는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매일매일 절감하게 되었다.

총장님은 "절대로 부자가 앞장서 어렵고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겨우 먹고 살 만한 사람이나 살기 어려운 사람이 오히려 흔쾌히 이웃을 돕는 법입니다. 거절당했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다섯 번은 두드려야 마음이 움직이는 법입니다" 라며 나를 위로하셨다. 그날 나는 총장님께 마음속으로 큰절을 올렸다.

자네 이름이 뭔가? 무엇을 하기에 앞서 자네 자세부터 고치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곧추세우게. 늘 바른 자세로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게!" 많은 문답이 오갔지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함석헌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거목이 지적하셨던 ‘바른 자세로 바른 생각을 하라’는 말씀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함석헌 옹을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날 하신 말씀은 이후 내 삶의 좌표가 되었다. 소련 쿠데타 때 파견돼 내전 상황을 기사로 쓸 때, 강원도 백담사에 은둔했던 전두환 씨를 취재하기 위해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벌벌 떨 때, 국내 최초로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를 만들기 위해 투자 설명회를 하러 다닐 때, 푸르메재단 설립허가를 위해 발바닥에 땀 나게 뛰어다닐 때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곧추세우라"는 그 말씀이 화두처럼 내 가슴을 때렸다. 넘어질 때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나는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와의 향기 나는 만남을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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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쪽의 책에서 단 4쪽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가 어째서 사람들에게 이토록 특별한 인상을 주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나름대로 추리하자면 ‘엠퍼시’를 다룬 책이나 기사는 전부터 일본에 많이 소개되었지만 대부분 ‘엠퍼시’를 ‘공감’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사람들이 이에 위화감을 느껴왔던 게 아닐까. 다들 오래전부터 ‘공감하지는 않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한 ‘엠퍼시’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벽에 다양한 표정의 사람 사진을 붙이고 "이건 어떨 때 짓는 표정일까?" 하고 묻는다.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할 때", "초콜릿을 먹을 때"라고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전혀 반응을 하지 않거나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웃는 사람 얼굴을 가리키며 "엄청 혼이 났을 때"라고 대답했던 아이다. 엉터리로 대답해서 웃기려는 것인가 싶어 "응? 혼이 났을 때 이런 표정을 지을까?" 하고 되물었더니, 그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안 웃으면 혼나"라고 대답했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는, 감정과 표현의 회로가 올바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사재기는 대단히 이기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커뮤니티 전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염병처럼 커뮤니티 전체가 개선되지 않으면 만연하기 쉬운 병의 경우, 자신의 미시적인 행동이 거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미시적인 불행(코로나에 걸려 위중한 상황에 처하는 것과 같은)이 찾아온다.
이처럼 타인의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여 행동하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이타적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는 역설적인 고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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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비국지적 경험이 가능하며 여러 개의 몸을 지닐 수 있는 미래 인터넷, 체화된 인터넷, 디지털 현실 플랫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주할 새로운 현실은 더 이상 아날로그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 아날로그 동물인 우리 인간이 디지털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뇌과학적으로, 우리 뇌는 ‘현실’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받아들이기에 메타버스에서 살아가는 것은 생물학적인 인간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Z 세대의 뇌는 이미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고향을 디지털 현실이라고 여기며, 놀이, 사회활동, 소비를 디지털 현실에서 이어가고 있다. 요컨대, 21세기 대항해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 100년 동안 뇌과학이 발견한 가장 놀라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내용이 모두 틀렸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뇌가 만들어 낸 착시 현상입니다. (…)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세상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인풋(input)이 아니라, 우리 뇌의 해석을 거친 결과물, 즉 아웃풋(output)입니다.

현실을 해석하는 우리 뇌만의 강력한 알고리즘, 바로 편가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편과 남의 편으로 가르는 편 가르기는 뇌과학적으로 인간이 지닌 일종의 착시인데, 이는 우리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가장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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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서 모든 피조물에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주일과 참된 쉼’이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일은 부활의 날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날이며 바로 우리의 날입니다."(성 예로니모)

넘어졌을 때 일어서는 힘은 영원을 향한 그리움에서 나옵니다. 영원하신 분께 맛들이고 영원히 머물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풍파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 삶을 봉헌한 많은 이들이 관상 수도회, 사도직 수도회, 평신도 신분으로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한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처럼 충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이토록 ‘힐링’의 절실함을 체감하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치유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이 시기에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틱낫한은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라는 책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온 마음으로 걸으며 발밑에 대지를 느낄 때, 친구와 조촐하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차와 우정에 대해 깊이 느낄 때, 그때 우리는 스스로 치유 받는다. 그리고 그 치유를 세상 전체로까지 확대시킬 수가 있다. 과거에 받은 고통이 클수록 우리는 더욱 강력한 치료사가 될 수 있다. 자신이 받은 고통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어 친구들과 세상 전체를 도울 수 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라고 하신 교황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 자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이루어집니다. 그 희망을 교회는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평화를 찾고 구하는 길은 어디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도, 지구도, 모두 다 끝이 정해진 시공간, 좁은 땅덩이에서 함께 의탁하며 잠시 빌려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가난한 비움을 통한 작은 나눔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렇게 함께 만드는 공동의 공간이야말로 평화의 장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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