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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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본다*이 새롭고 끔찍한 발명품에서 또 어떤 새롭고 끔찍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있나 볼까- 2016년 11월 10일, @missokistic이 올린 트윗

나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대담 Negotiations』속한 문단에서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무의미한 말들, 말도 안 되는 양의 단어와 이미지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절대로 눈이 멀거나 말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독과 침묵이 있는 약간의 틈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틈에서 사람들은 결국 할 말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세력은 자기표현을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라고 강요합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로지 그때에만 말할 가치가 있는 극히 드문 것을 만들어낼 기회는 있습니다

해양 동물을 수집하다 보면 어떤 편형동물은 워낙 연약해서 건드리면 부서지고 찢어지는 까닭에 온전한 형태로 붙잡는 것이 거의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그 동물들이 자기 의지로 흘러나와 칼날 위로 기어오르게 해야 한다. 그다음에 살짝 들어 올려 해수가 든 병에 집어넣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방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페이지를 펼쳐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오르게 하는 것.

엘리너 코폴라는 샌프란시스코 전역에 있는 수많은 창문을 시각적 랜드마크로 선정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공동체 전체가 고유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변형되거나 갤러리로 이동하는 일 없이 제자리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

나는 이 작품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공공미술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보통 공공미술 작품은 우주에서 쇼핑몰 앞에 착륙한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다. 코폴라는 그 대신 도시 전체에절묘한 프레임을 씌운다.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는 예술을 인식한 가볍지만 유의미한 방식이다.
좀 더 최근에 이와 유사하다고 느낀 프로젝트는 2015년 샌디에이고 카브리요 국립 기념지에서 있었던 스콧 폴라크Scott Polach 의 <박수를권하다 Applause Encouraged>이다. 노을이 내리기 45 분 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가장자리에 붉은색 로프를 두르고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은공간에서 안내원이 관객을 맞이했다. 안내원은 관객들을 좌석으로 안내하며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고 알렸다. 관객들은 노을을 감상했고, 해가 다지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후에는 다과가 제공되었다.

딥 리스닝 역시 이러한 기법 중 하나였다. 올리베로스는 이 행위를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금 무엇을 하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듣는 것.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서 듣는 대상에는 음악뿐아니라 일상생활과 자연, 자기 생각의 소리도 포함된다. 올리베로스는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을 구분한다. "들리는 것은 신체적인 의미의 인식이다. 듣는 것은 자신이 청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딥 리스닝의 목표이자 보상은 고조된 수용감각과, 관찰하기보다는 순식간에 분석하고 판단하라고 가르치는 평소의 문화적 훈련을 뒤집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각 작품에서 예술가가 만들어낸 구조(그것이 지도든 붉은 로프를 친 공간이든, 또는 물건을 올려놓은별것 아닌 선반이든)는 사색의 공간을 열어젖히고, 끊임없이 그 공간을닫으려 위협하는 습관과 익숙함, 산만함에 맞선다.

1916년판 『존 뮤어의 기록 The Writings of John Muir』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윌리엄 프레더릭 베이드William Frederic Badé가 각 부의 서문을 썼다. 2부 서문에서 베이드는 뮤어가 이 자아성찰의시기를 통해 "삶은 매우 짧고 불확실하며, 시간은 벨트와 톱 앞에서 낭비하기엔 참으로 귀중하다는 것, 자신이 수레바퀴 공장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신은 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력이돌아온다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과정을 연구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라고 말한다‘ 뮤어는 이렇게 말했다. "이 고통이 나를향기로운 들판으로 이끌었다."

달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초라한 나와 직면하게 되는 그 순간을 견뎌야 해." 그러나 그 시기에 아버지는 창조성과 열린 상태, 어쩌면그에 필요한 지루함과 무늬를 배웠을 것이다. 코미디 집단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의 존 클리즈John cleese가 1991년에 했던 창조성에 관한 강연이떠오른다. 그때 클리즈가 말한 창조성의 필수 요소 다섯 가지 중 두 가지는 시간이었다.
1. 공간2. 시간3. 시간4. 자신감5.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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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인용한 데이비드 실즈의 말이다.

잘츠부르크의 소금 광산 깊은 곳에 겨울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던져둔 후 두세 달이 지나 꺼내 보면 그것들은결정들로 반짝인다. (중략) 나뭇가지의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란 힘들다. 내가 결정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하는대상의 모든 모습에서 새로운 장점을 끌어내려는 영혼의 작용이다. 스탕달 ‘연애론’

this is my answer: not that I loved Caesar less, but that Iloved Rome more.
이것이 내 대답이오.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연발하다 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란의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무덤 앞이었다. 그의 소설 《눈먼 부엉이》의 인상적인 첫 문장이 생각났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없다. 타인들은 결코 그런 고통을 믿지 못하고 정신 나간이야기로 치부할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 고통에 대해서 묘사하거나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의 태도를 따라서, 혹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 섞인경멸의 웃음을 지으며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아직 인간은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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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야학은 제가 초·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다 합쳐서 12년간 배운 모든 것을 다 제로로 만드는 학교였어요. 여기에서는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다 쓸모없어졌고, 국어,영어, 수학, 사회 다 필요 없고, 교육은 너무나 할 게 많은 거예요. 이 학생이 야학에 오게 만드는 것. 그러려면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이 바뀌어야 되고요. 그래서 투쟁도 해야 하고요. 학생의 자신감이 많이 위축되어있는데, 그 자신감도 함께 끌어올려야 하고요.

왜냐하면 20년, 30년을 다 집 안에만 있었고 집에서도 자기 혼자니까 장애인은 장애인을 알 것 같지만 장애인도 장애인을 만나본적이 없어요. TV에 나오는 장애인은 다 불쌍하거나 아주 뛰어난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장애인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구나 생각하고 살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노들야학까지오는 거예요.
14일단 오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공감해요. 우리는 권리가 있고 나가서 싸울 수 있다. 집에서도 주눅 들어 있던 사람들이밖에 나가서, 광장에 나가서 자기 몸을 펼쳐 보이고 세상을 향해서외치는 순간, 자신감이 아주 빠르게 회복이 돼요.

노들 생활을 말할 때 그가 술만큼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저항‘
이다. "노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흔히 노들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그 노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렇기만 한 게 아니라저항하는 사람들이라고.

"차별받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은 너무 다른데, 사람들이 당연한 인과관계로 생각해요. 차별받으면 누구나 저항하는 것처럼요.오히려 반대죠. 차별받으면 저항할 수 없게 돼요. 저는 노들을 그만두고 나서 알게 됐어요. 내가 노들에서 십몇 년간 한 모든 것이 차별을 저항으로 만드는 일이었구나. 차별과 저항이 얼마나 멀고 이어지기 어려운지 알았죠. 그게 얼마나 어렵냐면 내 청춘이 거기 다 들어간 거예요, 우리의 청춘이.

"화상 경험자 정인숙 님이 화상 입고 새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하거든요. 그분의 인생을 들어보면 정말로그래요. 처음 걸음마를 하고 처음 꽃을 만져보고 처음 친구를 만들고 이런 과정을 다시 밟는 것 같은, 눈부신 게 있거든요. 저는 불안이나 공포가 큰 편인데, 제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어쨌든 한번 인생의 큰 경험들을 하신 거잖아요. 시련들을 먼저 겪었고요. 회복하는 데 5년이 들고 20년이 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살 수 있어, 그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천성이 착해서가 아니라 질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아빠를 신경 쓰지? 아빠가 이렇게 된 게 정말 아빠만의 책임일까? 우리는 희생이나 배제 없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답을 구하기 위해 온갖 책을 팠고 차츰 아버지를 혈연 넘어 한사람의 사회적 신체적 약자로 보는 눈을 얻었다. 인생의 짐이 곧 힘이 되고, 가족관계가 시민관계로 확장되는 돌봄의 의미, 그 치열한사회적 탐색의 결과물이 한 권의 책이 됐다.

그는 얼마 전 서울대 의과대학 4학년들이 듣는 ‘의료 접근성과사람 중심성‘이라는 수업에 초대됐다. 차상위계층이 의료급여를 받는 과정에서 겪은 사례를 말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회를 가졌다. "언제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고, 겪었지만 이야기되지 않는경험"이 곳곳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달려드는 저 태양은 피를 말리고/ 모래알처럼 흩어진 눈물의 기도들/ 우 위로해주는 사람 어디 있나/ 예 위로해주는 신은 어디있나/ 이곳에서 축복이란 오래 참는 마음이겠지 (・・・) 깊어가는아버지의 한숨/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삶이여(이승열, <너의 이름〉)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 <가버나움>의 감독 나딘 라바키는 말했다. 좋은 영화는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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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는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은 선 위의 하나의 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인과 결과의 연쇄 고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혹은 이루어야 할 목표, 해결해야 할 문제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 생각이 낯선 것일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순환적인 시간관 안에서 우리의 자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다. 그러나 실수하지는 말자. 이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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