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내 안의 뭔가를건드렸기 때문이다. 걸작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받는 작품이 아니어도, 심지어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작품이어도 내 안의 뭔가를 건드릴 때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어뵤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다보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내가 몰랐던 감정을 발견할때도 있고,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사건이 솟아날 때도 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나를 새로운 세계로 끌고 간 다음 이리저리 뒤흔들다가 아무 데나던져버린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알 수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작보다 글을 쓰게 만드는 범작을 나는 더 좋아한다. 물론 대부분의 걸작은 말을 하고 싶게한다. 영화는 내게 계단이고, 통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 영화는 내게 목적지가 아니라 환승역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글을 쓴다. 몇 가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던 주인공의 행동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영화 속에나왔던 장소를 그려보고, 음악을 흥얼거리며, 대사를 읊조린다. 나만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첫 문장은 어떤 게 좋을까? 방금 본 영화에서 어떤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집에서 OTT로 영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기쁨을 온전하게 누리고, 슬픔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고, 몰랐던 일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돌아오면서 글을 쓰는 일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때로는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를보고 난 다음 원고를 보내야 할 마감이 없는데도 머릿속으로 첫 문장을 써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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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관습과 멀어진 지 오래지만 여행자로 살면서도 나는여하튼 기도하는 삶이라는 중심축에 계속 의지했다. 신의 존재 앞에 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을 나는 넓은 의미의 기도로 받아들였다. 그 정수 안에 깃들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이 기도였다.

성배 찾기는 또한 이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집중하고 몰입함으로써 통찰과 환희와 교감에 마음을 연 상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성배 찾기는 오로지 하나에 굳게 몰두하는경건한 태도로, 추구해나갈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장소에 도착해 의식에 다다르고 다시 어떤 이해로 나아가면, 거기서부터 세상이 당신에게 열리고 당신은 세상에게 열린다. 아마도 그렇게, 마침내 당신은 관계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거듭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주의attention‘다. 이 단어는 참석, 수행, 시중을 뜻하는 ‘어텐던스attendance‘와 뿌리가 같고 ‘기다리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탕드르attendre‘에 뿌리를두고 있다. 기다리기, 참석하기, 주의 집중하기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똑같은 행위다

이해하기를 기다리기, 알아가기를 기다리기, 연결이 형성될 때까지 머무르기, 알아차림으로 시작되는마음 내주기. 어쩌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말은 "신의 존재 앞에부단히 경건하게 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의는 배리가 타인들을 대하며 탄복하는 능력이고 독자들에게 강권하는 실천이며 스스로 체현해 보이는 소통의 방식이다.

"너 자신이 아닌 세계에 인내심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초심자가 자아 외부의 더 큰 세계, 지혜 자체가 깃든 경관을발견하는 첫 번째 걸음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내 기억으로는집 밖에서 주의를 기울인 날 중 어느 하루도 내가 모르는 무엇,
새로운 무엇이 내 앞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밑을 내려다보니 그가 남긴 온전한 발자국이 보였고, 그 자국안에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그려진 작은 질그릇 유물 조각이드러나 있었다. 생긴지 1분도 되지 않은 발자국과 500년 동안 그자리에 있었을 파편에 두 종류의 과거가 압축되면서 눈부신 조우가 생겨난 것이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라는 말이 일순 글자 그대로 진실이었던 것은, 오래전 내가 감히 무엇을 목표로 글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나에게 넌지시 일러준것이 바로 이 작가의 글이었던 까닭이다.( 리베카 솔닛)

내게는 이제 나의 길이 있지만, 그가 그 길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우리가 글에서 기대하는 것이 늘 그런 역할이니, 어쩌면나는 그가 그걸 해주었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가 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방향으로 난 발자국들이고, 하나하나에발자국보다 더 오래된 물질이 깊이 파묻혀 있다. 이 발자국이닿는 데까지만 따라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스스로 땅과 언어의 관계를 더듬고 의미를 탐색해가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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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절대 답을 내는 것이 아니고, 최종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상상은 수많은 여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생각의 숲에서 ‘일부러‘ 길을 잃는 것이다. 길을 잃어야 새길을 찾을 수 있다.

결론은 완성이다. 규정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결론을 내리는 순간 더 이상 상상이 설 자리는 없다. 결론은 끝이다. 풍부한 상상과 수많은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결론을 유보하고 결정을 미루는 것이 필요하다.

연출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고, 연출가 역시 무언가를 꾸며내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출가의 연은 ‘흐르다‘, ‘통하다‘라는뜻이 있다. 연출은 ‘direction(방향)‘, 연출가는 ‘director‘다. 그어디에도 꾸민다거나 만들어낸다는 의미는 없다. 나는 연출가를 ‘그가 꿈꾸는 세계관으로 관객을 흐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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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쇼 - 탁현민의 기획과 연출
탁현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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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 사라진 자리에는 형식만 남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형식도 거추장스러워져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미궁에 빠진행사들도 참 많다.

만약 당신이 다루어야 할 주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 우선 본질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이전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면 처음 기획 의도를 찾아봐야 한다. 감동을 주고 진심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당연한 것들에 사람들은 당연히 공감한다. 그 공감이감동과 진심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내가 자주 꺼내는 일화 중에 퇴임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와 만났던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 임기 말 어느 국제회의에서 그녀에게 오랜 세월 훌륭하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다.
"남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다른 비결은 없었나요?"
"시간이 나면 남의 말을 더욱 많이 들었습니다."

타자의 말을 듣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매우 요긴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 판단, 근거는 남의 인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진 견해가 나만의 편견인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절대 혼자서는 알 수 없었을 다른 세계와 다른 가치들을 만날 수 있게된다.

하지만 딱 한 대목에 있어서는 고집을 부렸고 타협하지않았다. 아니 타협할 수 없었다. 내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그것은 국가 행사 애티튜드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 정부 때까지국가 행사는 국민 개개인이 국가를 위해 헌신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현충일 추념식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그렇게 지켜낸 ‘대한민국‘이 중심이었다. 농업인의 날 기념식은 농사일이 얼마나 국가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희생은 영웅적 헌신으로 포장되었고, 국가 행사는 하나 마나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지루한 자리가 되었다.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것은 국민이 국가에 무엇을 했는가보다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위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 행사는 국가가 국민의 헌신, 노고, 희생, 상처를 위로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대통령> 영웅> 국민‘이라는 등식을 버려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어야 했고, 국민이가장 앞자리에 놓여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연출해야 할 때는 수많은 반대와 싸워야 했다. 대통령이 참석자보다먼저 자리에 도착하는 것, 대통령 좌우에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이 아니라 일병을 앉히는 것, 대통령 내외가 중소기업박람회에 가서 축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 판매원이 되는것, 졸업식에 대통령이 단하로 내려와 전체 졸업생과 악수하고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것. 이런 모습들은 그러한 싸움의 결과였다.

"색이 전부다. 색이 맞으면 형태도 맞다. 색이 모든 것이고, 색은 음악처럼 떨림이 있다"라고 말했던 마르크 샤갈MarcChagall의 탁견도 오랜 관찰에서 나온 것이고, "사물이나 현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발견할 때와 작별할 때"라고말한 산도르 마라이 Sandor Marai도 관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오랫동안 한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그 대상과 비슷해지는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만수 형님이쥐치를 닮고, 관준 형님이 옥수수를 닮고, 제창이 형님이 치킨을 닮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가 한창훈 선생은 "사람은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그 문장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나는 무엇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살았을까.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쪼록 그게 아름다운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싶다.

관찰은 오랫동안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관찰법이 다르겠지만 훌륭한 관찰가(?)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애정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뭔가 발견해내야 해서 바라본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발견한 것과 나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아야 관찰의 심도가 더해진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상상력의 본질은 근본, 원인, 핵심만 남기는 일이다. 거기서부터다. 보태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시절은 잡다한 지식으로 가득한 중년과 노년의 시기가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던 유년과청년의 시기라는 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나는 일을 해오면서 이러한 발상법을 유용하게 활용해왔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복잡한 과제를 앞에 놓고 불필요하거나 구태여… 싶은 것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문장이라면 형용사나 부사를 먼저 지우는 식이다. 가능하면 주어와 서술어, 주어와 동사만 남겨놓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행사나 기념식이라면 꼭 들어가야 하거나 주제를드러내는 것을 제외한 순서와 프로그램을 하나씩 삭제해나간다. 실제로 이 작업을 하다 보면 어렵게 생각해낸 아이디어,많은 비용이 들어간 장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등과 같은 대목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것만 남겨두면 어떨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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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관계에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인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런 바람을 듬뿍 담아 태명은 빛(Light)의 ‘LI’와 소금(Salt)의 ‘SA’를 더해 ‘리사(LISA)’로 지었다. 2017년 새해가 밝고 이튿날, 리사가 태어났다. 우리는 ‘리사’를 아이의 이름으로 결정하고 계속 부르기로 했다. 그녀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라기를, 그리고 그 이름처럼 세상을 밝히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름 ‘리사’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알라딘 eBook <우리만의 사적인 아틀란티스> (정승민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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