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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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프랑수아즈 사강*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삶을 어떻게 살고있습니까? 인생으로 인해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기 전에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했습니까? 당신의 진짜 눈동자 색을,
진짜 머리칼 색을 말해준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은 밤을두려워합니까? 누구나 고독을 느끼고, 당신과 마찬가지로죽음 이상으로 삶을 두려워한다는 걸, 당신은 알고있습니까?"* -마음의 푸른 상흔, F. 사강-

1. 진동0xcillation추의 진동을 가리키는 뜻으로, 한 가지 진리에정착하기를 거부한 그르니에를 표현하기에좋은 단어다. 그는 고향 브르타뉴와 지중해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안개 속에서 빛을 그리워하고, 빛 속에서 다시안개를 잊지 않는 일이었다.

2. 부재Absence‘없다‘라는 말은 늘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그르니에게 이 단어는 반드시 그렇진 않다.
그는 ‘부재하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에집중했고, 그 자리에 없을 때, 혹은 내가 나를내세우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빈 공간이 다른것들로 채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더 소중한 본질을드러내는 일이다.

3. 무심함Indifférence그르니에의 무심함은 차가움이 아니라대상에 대한 예의이다. 대상을 내 마음대로정의하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고, 그가 온전히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적절한거리를 두는 것. 내가 무심해질 때 비로소대상은 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우리 앞에 선다.

4. 익명성Anonyme나를 규정하는 수식어들이 사라진 ‘무의상태‘에서 인간은 진실해질 수 있다. 익명은"고독한 유배지가 아니라, 진짜 나를 만나는장소다.
5. 비밀secrète모든 것을 말하고 전시하는 시대에그르니에는 ‘말해지지 않는 여백‘을 지켰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언어로다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캄캄한 방 하나를품고 사는 일. 이러한 비밀이 있을 때, 인간은타인에게 소모되지 않고, 자신만의 고귀한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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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방법은 단순했다. 감염자의 혈액을 비감염자에게 주입하는 것. 나는 이 과정을 관찰하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했다. 여기서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건강을 팔아서 시급을 올리려하고 있었다. 착취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향하고 있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착취하는 것. 이것보다 효율적인 착취가 어디 있겠는가. 관리자가 필요 없다. 감시자가 필요 없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노동자가 스스로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자기 잠을 시장에 내놓는다. 수요와 공급.
보이지 않는 손이 잠을 빼앗아간다.

그리고 반복 행동이 강화되었다. 상자를 나르는 동작이 정확해졌다. 실수가 줄었다. 속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동작에 변주가 없어졌다. 같은 속도, 같은 각도, 같은 리듬. 사람의 동작이 아니라로봇 팔의 동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봇 팔이 착, 착, 착, 하고상자를 집는 것과 장기 감염자들이 쿵, 쿵, 쿵, 하고 상자를 나르는 것의 리듬이 같아지고 있었다. 인기계와 인간의 구분이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구분이 아예 사라지고 있었다. D구역의 노동자들은 로봇이 처리할 수 없는 비규격 상자를 처리하는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이 로봇처럼 변하고있었다. 비규격을 처리하는 규격 인간.

"아르고스가 그걸 일부러 하고 있다면?"
"일부러?"
"네, 물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안 자면 물동량이 올라가잖아요. AI 시스템이 그걸 학습해서 노동자들의 수면을억제하는 방향으로 최적화한 거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AI 관제 시스템이 노동 효율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들의 잠을 빼앗는다? 하지만 초저주파는 기술적으로 가능했다. 서버 냉각 시스템의 팬이나 진동이 특정 주파수를 발생시킬 수 있었고, 그 주파수가 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의도인지 우연인지였다.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머리가 맑아졌어요. 너무 맑아져서 무서웠어요. 생각이 빨라지고,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피곤함이 완전히사라졌어요. 5분 있었는데 몸 전체가 깨어 있었어요. ‘깨어 있다‘는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인 줄 몰랐어요.
동시에 이상한 게 있었어요. 머리가 맑아지면서 어떤 것들은 흐려졌어요. 서버실에 들어가기 전에 느꼈던 긴장감이 사라졌어요.
잡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나쁜 의미로 사라진 거예요.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조심성도 없어졌어요. 볼트를 풀 때 소리가 났는데, 평소라면 멈추고 바깥쪽으로 귀를 기울였을 거예요.
근데 그냥 계속했어요. 들키면 어때, 라는 생각이었어요. 이 생각이 나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멈추지 않았어요.
5분 만에 이 정도예요.

누군가의 소소한 기쁨이 진흙탕에 잠기고 있었다. 형광등이 전부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다. 비상 전원이 가동된 것이다.컨베이어 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벽이 무너지고, 흙이 쏟아지고, 물이 밀려오는데 컨베이어 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아르고스의 판단은 오직물동량 유지. 벽이 무너져도 컨베이어 벨트는 돈다. 유골이 올라와도 컨베이어 벨트는 돈다. 아르고스에게 벽의 붕괴는 변수이지,
종료 조건이 아니었다.

마침내 아르고스가 셧다운된 것이다. 냉각 시스템이 멈춘 지약 12분. 서버 온도가 한계에 도달했고, 아르고스는 스스로 시스템을 종료했다. 하드웨어 보호. 아르고스의 마지막 행위는 자기보존이었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하드웨어를 보호하기 위해 꺼졌다. 아르고스도 끝까지 자기 자신을먼저 구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목표 함수에 충실한 기계. 나와 같았다.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계산을 했다. 아르고스가 물동량을

제목이 된 ‘아르고스(Arg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100개의눈을 가진 거인이며, 소설에서는 물류센터를 운영하는 AI 관제시스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직 생산성 향상만을 목표로 노동자를 통제하는 시스템에 이 이름이 붙은 것은 시사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고스는 노동자의 이름과 신체 상태, 피로도, 감정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계산하는 것은 물류량과 이동 경로, 작업 속도와 생산성 그리고 시스템의 효율성, 기술적 합리성뿐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측정과 관리의 대상으로 환원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르고스처럼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진짜 공포다. 우리를 감시하는 불가해한 괴물이 바로 우리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 《아르고스》는 AI란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이 아니라 AI 시대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정면으로 묻는 소설이다. 그것은 AI가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 이미 무엇이 되어가는가를 묻는 말이다. 이 질문 앞에서 누구도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이 소설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서기 4~5세기경 가야의 수장급 인물들이 묻힌 무덤, 인공지능 로봇이 택배를 분류하는 스마트 물류센터, 이주 노동자들이거주하는 비닐하우스. 이 모든 게 반경 500미터 안에 공존하는김해시 금관 테크노밸리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야 왕들이 민중의 고된 노동 덕에 영겁의 세월 동안 편히 잠들 수 있었다면,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공장 시스템으로 인해 잠을 잃는다. 노동자가 잠을 안 자도 안 아프고 안 죽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웃는 자는 누구일까. 노동 시간을 늘려 수당을더 받으려는 노동자, 피로를 느끼지 않는 노동자의 혈액을 채취해궁극의 혈청을 출시하려는 의사, 노동자를 각성시켜 물동량을 최적화하려는 거대 자본

잠이 없는 세계란 자못 비인간적으로 보이지만, 잠을 팔아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이들의 선택은 지극히‘인간적‘이다. 자본의 문법에 효과적으로 적응한 탓이다. 다만 잠을 잃은 노동자들은 왜인지 누군가의 꿈 이야기에 이끌린다. 꿈이야기를 듣는 동안은 불면 노동자들의 초점 없는 눈에 미약한생기가 돈다.

<아르고스》는 누군가의 잠을 동력 삼아 결코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개당12초 안에 택배 상자를 분류하는 노동자의 기계화된 속도를 따라 거침없이 질주하다가 마침내 어떤 장관에 다다른다. 그러고는인공지능과 생체 정보, 과학 기술과 인간성, 노동과 자본, 영웅과희생자, 공모와 저항, 이 모든 이분법적 도식을 물리치며 묻는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을 때, 당신은 무슨 꿈을 꾸겠느냐고. ‘오늘주문 내일 도착‘ 스티커가 붙은 택배 상자와 1500년 전 유골이 뒤섞인 곳에서 만나는 이 서늘한 질문 앞에서 망설일 시간은 없다.
가슴께까지 차오르는 흙탕물, 무너져 내리는 벽 사이에 꼼짝없이세워진 독자에게 ‘내일‘이 있을까. <아르고스》는 이 시대 가장 긴급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의 형식을 제대로 간파한두렵고도 통렬한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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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막연히 이들이 창을 들고 숲을 누비며 사냥한 고기를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눈앞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우리가 건너온 아마존은 환상 속 풍경이 아니라, 이미 문명과 전통이한데 뒤섞여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스파게티는 우리가라면을 먹는 것과 비슷한 간편식인지도 몰랐다. 우리 말고도 이접촉 부족을 촬영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가바 가족의 집에 머무는 일도 어느 정도는 익숙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족 입장에서도 손님들을 위해 매번직접 사냥한 고기를 굽기보다 스파게티를 삶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같은 외부인을 위한 현대식 화장실도있었다. 물론 물이 내려가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이런 모습들은 분명 기묘했다. 이것은 문명의 침략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진화인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하나 있었다. 인공 섬유와 천연 가죽이 함께 있고, 가공식품과 야생의 고기가 한 식탁 위에 놓이는 풍경이야말로 지금의 아마존을 상징하는 장면이라는 것. 우리는 그들이 오래전 모습 그대로남아 있기를 기대하지만, 현실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지않는다.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되 자기 식으로 바꾸기 마련이다.

저항의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벌목 현장에 직접 찾아가항의하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총을 든 군인이나 용병이 쏘아버리면 끝이었다. 이제는 드론으로 현장을 찍고, 그 영상을 곧바로 SNS에 올린다. 설령 죽더라도 증거를 남기겠다는 각오다. 그래서 이들에게 문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전략을바꾼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우리가 만난 추장 역시 국제 포럼을비롯한 여러 연대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런 정기적인 축제를 여는 건 기본적으로 죽음에 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토라자 사람들은 죽음을 단절이라기보다 조상들의 세계인 ‘푸uya‘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으로여긴다. 그래서 돌아가신 이를 완전히 밀어내기보다 여전히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시신을 꺼내 깨끗이 단장하고 새 옷을 입히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고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방식이다.
축제의 현장인 만큼 다들 신나 있었다.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먹고 마시고 노는 모습. 이상할 만큼 경쾌하고, 그래서 더 낯설었다

장례의 풍습은 문화마다 다르지만 그 바탕에는 대개 한 가지공통된 질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그리고 남은 사람은 그 빈자리를 어떻게 견딜 것인가. 토라자를보고 있자니, 죽음의 형식이 다르다는 사실보다도 각 문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끝끝내 죽음을 이해하려 애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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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실마리를 따라 갔는데, 뒤에 전혀 예상 못한 세계가 이어져 있는 순간 말이다. 내가 다큐멘터리 PD로 일하며 좋아하던 말이 하나 있다.
"쥐꼬리인 줄 알고 잡아당겼는데, 막상 나와 보니 코끼리 꼬리더라."
나는 그게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의 진실에 닿는 과정.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장이 주는 가장 큰 선물 같은 것. 하지만 방송국시스템 아래에서는 쥐꼬리로 기획했으면 끝까지 쥐꼬리만 찍어야 했다. 심지어 코끼리 꼬리가 나와도 어떻게든 그걸 쥐꼬리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현장이 내미는 뜻밖의 진실보다 처음정해놓은 설명의 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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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소한 삶 - 적은 소유로 깊은 향유를 살아가는 사람들
스콧 새비지 엮음, 강경이 옮김 / 느린걸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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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기가 무너진 이 시대에 전복적 삶을 사는 유일한방법은 다른 사람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과 삶터를 더 큰 기쁨과 온기, 즐거움으로 채우는 것이다. 디즈니와 쇼핑몰, 채팅룸이 던져주는 정신없고 조금은 한심하고 구차한 가짜 행복이 아니라 진짜 행복으로 말이다. 결국이 책은 진정한 기쁨에 대한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절망에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절망이 지나간 뒤, 당신은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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