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사라진 자리에는 형식만 남는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형식도 거추장스러워져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미궁에 빠진행사들도 참 많다.
만약 당신이 다루어야 할 주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 우선 본질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이전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면 처음 기획 의도를 찾아봐야 한다. 감동을 주고 진심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당연한 것들에 사람들은 당연히 공감한다. 그 공감이감동과 진심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내가 자주 꺼내는 일화 중에 퇴임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와 만났던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 임기 말 어느 국제회의에서 그녀에게 오랜 세월 훌륭하게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다. "남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다시 물었다. "그것 말고 다른 비결은 없었나요?" "시간이 나면 남의 말을 더욱 많이 들었습니다."
타자의 말을 듣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매우 요긴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 판단, 근거는 남의 인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진 견해가 나만의 편견인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절대 혼자서는 알 수 없었을 다른 세계와 다른 가치들을 만날 수 있게된다.
하지만 딱 한 대목에 있어서는 고집을 부렸고 타협하지않았다. 아니 타협할 수 없었다. 내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그것은 국가 행사 애티튜드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 정부 때까지국가 행사는 국민 개개인이 국가를 위해 헌신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현충일 추념식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그렇게 지켜낸 ‘대한민국‘이 중심이었다. 농업인의 날 기념식은 농사일이 얼마나 국가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희생은 영웅적 헌신으로 포장되었고, 국가 행사는 하나 마나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지루한 자리가 되었다.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것은 국민이 국가에 무엇을 했는가보다는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위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 행사는 국가가 국민의 헌신, 노고, 희생, 상처를 위로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대통령> 영웅> 국민‘이라는 등식을 버려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어야 했고, 국민이가장 앞자리에 놓여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연출해야 할 때는 수많은 반대와 싸워야 했다. 대통령이 참석자보다먼저 자리에 도착하는 것, 대통령 좌우에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이 아니라 일병을 앉히는 것, 대통령 내외가 중소기업박람회에 가서 축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 판매원이 되는것, 졸업식에 대통령이 단하로 내려와 전체 졸업생과 악수하고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것. 이런 모습들은 그러한 싸움의 결과였다.
"색이 전부다. 색이 맞으면 형태도 맞다. 색이 모든 것이고, 색은 음악처럼 떨림이 있다"라고 말했던 마르크 샤갈MarcChagall의 탁견도 오랜 관찰에서 나온 것이고, "사물이나 현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발견할 때와 작별할 때"라고말한 산도르 마라이 Sandor Marai도 관찰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오랫동안 한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그 대상과 비슷해지는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만수 형님이쥐치를 닮고, 관준 형님이 옥수수를 닮고, 제창이 형님이 치킨을 닮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가 한창훈 선생은 "사람은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그 문장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나는 무엇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살았을까.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모쪼록 그게 아름다운 것들이었으면 좋겠다 싶다.
관찰은 오랫동안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관찰법이 다르겠지만 훌륭한 관찰가(?)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애정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그냥, 어쩔 수 없이, 뭔가 발견해내야 해서 바라본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발견한 것과 나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아야 관찰의 심도가 더해진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상상력의 본질은 근본, 원인, 핵심만 남기는 일이다. 거기서부터다. 보태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시절은 잡다한 지식으로 가득한 중년과 노년의 시기가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던 유년과청년의 시기라는 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나는 일을 해오면서 이러한 발상법을 유용하게 활용해왔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복잡한 과제를 앞에 놓고 불필요하거나 구태여… 싶은 것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문장이라면 형용사나 부사를 먼저 지우는 식이다. 가능하면 주어와 서술어, 주어와 동사만 남겨놓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이 행사나 기념식이라면 꼭 들어가야 하거나 주제를드러내는 것을 제외한 순서와 프로그램을 하나씩 삭제해나간다. 실제로 이 작업을 하다 보면 어렵게 생각해낸 아이디어,많은 비용이 들어간 장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등과 같은 대목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것만 남겨두면 어떨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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