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이 말은 대화를 시작하는 주제로 정말 형편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단지 그가 지닌 직업으로, 또한 그 직업에 따른 사회적 지위로 한정 짓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보통 ‘사회적인 접착제‘라고 일컫는 것들이다.
이 끈끈한 접착제는 때때로 우리의 피부와 옷자락에까지깊숙이 배어있어서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에 대한 개방성과 자신에 대한 개방성에도 족쇄를채우곤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행동을 어색하게 만들고,우리의 판단력을 흩트려 놓으며, 우리에게 생겨난 호기심의 불씨를 단숨에 꺼뜨린다.

상대방의 사회적인 조건이 자기의평소 기준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감정의 동요에 기습적으로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만남이 지닌 진정한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만남은 하염없이 늘어지는 기다림의 시간을 없애주는 힘, 예측을 벗어나게 해주는 힘, 그리고 판을 엎어서 새로운 카드를 나눠주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만남이 불러일으킨 동요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한 인간으로서 완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강렬한 감정이다. 이렇게 드러난 내면적인 자아는 이제 사회적 자아에 의해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적 자아는 돌연 그 경계를 뛰어넘어 사회적 자아 위로넘쳐흐르게 된다. 만남이 일으키는 동요는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때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생겨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아를 불러오기도 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만남을 가로막는 벽은 이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일을 하시죠?"

모든 종류의 약속에 있어서 현재 진행 중인 어떤 만남의 지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분명한 감정-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보기의감정이다. 내가 당신을 알아본다는 말은 당신이 나에게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말의 의미는 내가 나의 모습이라든가 내 마음에 드는 어떤 것, 아주 오래된 기억,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어떤 상황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내가 나의 운명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우연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내 운명의 실체를 스스로알아차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남을 상징하는 하나의신호는 바로 이런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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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한가운데에서, 우연히만난 것이 아니었던 어떤 사람과의 약속에 하나의 확실한감정이 들면서, 그것이 별안간 운명의 외양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 감정은 우리가 하나의 ‘발견‘을 체험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그런 사람을 보내준 운명에 대해 감사의 마음까지 들게 만든다. 나는 내가 마주친 것이 당신인지, 나인지, 나의 운명인지, 아니면 이 세 가지 모두인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만남이 존재하는 곳에 발견이 존재한다. ‘발견‘이라는 말은 다의적인힘이 내재된 단어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그것을 살펴봐야 한다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인식‘이라는 것은 ‘다시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사용했던 용어로 다시 풀이하자면, ‘인식‘이란 ‘상기하는것(플라톤의 유명한 이론인 상기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가 진과 선, 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원래살았던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즉 이 철학자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면 인간은 인식에 의해서 그것을 기억한다고 믿었다. -역주)‘이다.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지상에서 보내는 한정된 기간 동안 우리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있기 전에, 이미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있다. 우리는 죽으면서 그 세계를 다시발견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가 지닌 한계로부터 풀려난다. 이렇듯 하나의 이데아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육체의 굴레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원성의 형태로 이데아를 알아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이데아, 즉 하나의 관념과마주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사실 솔랄에게 있어서 아리안은 완전히 낯선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순간도, 그가 일생일대의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속눈썹이 한 번 치켜 올라갔던 순간" 이라는 짧은 시간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논리나 이성적인 사고도 필요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솔랄이 그녀에게서, 그런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 무엇인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발견은 "기대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했으니 전자도 맞는 말이고, 그가 갈망해 왔던 욕망의 대상을 알아본 것이니 후자도 맞는 말이다. 그가 살아온 과거의 삶 전부가 그를 그 욕망으로 이끌었으므로, 그는 욕망의 대상인 그녀와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던 셈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둘러보려는 갈망에 사로잡혀, 그 세계의 문턱 위로 불쑥 뛰어들게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어떤 미지의 여행으로 떠나게 해주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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