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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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E.샤츠슈나이더(Elmer Eric Schattschneider) 저, 현재호/박수형 역 < 절반의 인민주권 The Semisovergreign People >를 읽고 / 2008. 11., 243쪽, 후마니타스

미국 정치학계의 거장인 슈나이더는 최장집, 박상훈 등 한국 정치학계와 정치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마 정치학 전공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온 전공자들이나 정치를 배우러 미국에 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접했던 인물이자 이론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슈나이더의 대표적인 정치 관련, 특히 정당에 대한 저서라 할 수 있다. 그는 '갈등이론'의 창시자이자 전문가다. 그는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등 많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갈등이론'이란, 갈등이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토대이며, 정당 간 경쟁이 갈등의 사회화를 통해 정치참여의 범위를 확장시킬 때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치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고전적 해석과 다르다. 그는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원래부터 환상일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용 불가능하다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와 달리 근대 이후 인류사회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한꺼번에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너무나 복잡하고 정치적 현안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정치현안을 쫒아갈 수 없고, 노예제에 뒷받침 되어 있던 그리스 사회의 시민과 달리 근대 이후의 시민은 먹고 살아가기도 빠듯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현대의 정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다."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정치체제에 지도자가 필요하며, 직접 민주주의 대신 대의제 민주주의를, 참여보다는 선택을 더 많이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절반의 인민 주권"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 같다.
다시 말해 현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지도자들과 조직들이 공공정책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경쟁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경쟁적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나는 갈등이론에 대한 의견 이전에 샤츠슈나이더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와 현실 분석에서부터 동의하기 어려웠다.
먼저 현실 분석과 관련해서 보면, 현대 사회가 인구가 많은 것은 완벽한 인민주권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국가로서 중앙집권 시스템이나 인구의 규모가 문제가 된다면 지방분권과 의사결정 및 집행을 작게 나누면 되기 때문이고, 대의제가 문제가 아니라 대의제에 선출되는 대리인부터 인민주권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즉 우선 중요한 것은 인민주권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국가라는 규모가 중요한 것이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국민국가로서의 크기가 중요한 당사자는 평범한 인민들이 아니라 사회규모를 키워 정치경제적 사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이나 관료일 뿐이다.
현안이 많고 복잡하다는 현실 역시 인민주권의 원리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는 안될 것이다. 소위 전문가나 정치가라 하더라도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많고 복잡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그런 사실에 대해 저자도 책 속에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민주주의를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보통의 인민을 '무지'하다고 단정짓는 엘리트주의와 '진문가'들이 무언가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편견이 작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먹고 살기 빠듯하다는 현실 분석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과 생산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본가의 착취, 수탈, 독점 체제라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 긍정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대안의 사회경제 체제가 아니더라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또는 복지국가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보통의 인민들이 8시간 노동으로 충분한 소득을 올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고 그 여가를 활용하여 얼마든지 정치적 현안에 대해 학습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논리가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샤츠슈나이더는 위와 같은 현실 인식과 전제를 토대로 삼기 때문에 '인민주권'이라는 고전적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절반의 인민주권'을 제시한 것이다. '절반의 인민주권'도 표현만 인민주권일 뿐, '무지한 사람들의 동의에 의한 똑똑한 전문가의 통치'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고, 사실상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를 포기하는 셈이다.

인민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샤츠슈나이더는 갈등과 경쟁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정치를 해석하려 했고,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서로 비슷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갈등이론'은 사회경제 체제나 구조를 분석하려 하지 않고 인류사회에 보편적으로 또는 특수하게 존재하는 여러가지 갈등을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 필요한 요소로 도입하게 된다. 어떤 인간 사회든,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한 사적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적 갈등에 대한 이해관계자가 늘어나 사회적 갈등으로 커지면 그 때 정치와 국가가 개입한다는 것이 갈등이론의 기본 맥락이다. 여기서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국가권력을 다투는 기구 내지 조직으로 정당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이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이론을 체계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은 갈등의 범위, 갈등의 가시성, 갈등의 강도, 갈등의 방향이다. 그리고 정당의 정치 전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갈등의 차원이다. 갈등의 대체 혹은 치환, 즉 갈등을 불러들여 기존 갈등을 대체하는 것이 정치 전략의 핵심 중의 핵심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에서 리더쉽과 지도자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 정치에서 투표 불참자(미국의 투표 불참자는 청년, 빈민, 소수인종에 집중되어 있음)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정당들이 대안을 정의하고 갈등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점차 나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1970년대 미국 정치, 정당의 한계는 21세기 들어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생략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구조와 관계 없는 보통의 갈등을 정치와 정당의 핵심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현실적으로 분석해도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경제적 구조일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먼저 분석하게 되면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대립구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상관 없이 생산(수단)의 문제, 분배(유통)의 문제, 소비의 문제, 공익의 문제 등에서 나타나게 된다.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문제와 과잉생산이나 과소생산이 문제가 될 것이고, 분배의 문제에서는 초과이윤에 대한 분배나 노동가치에 대한 평가 문제가 될 것이고, 공익의 문제에서는 공공재산이나 국가정책의 방향과 제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관계 없이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본권 문제, 인민주권의 절차 문제, 인권이나 자유의 문제, 복지의 문제, 계층의 문제 또한 갈등의 주요한 요소일 것이다.
즉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거한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야말로 저자가 주장하는 '갈등'의 원초적인 모습인 것이다. 미국의 광범위한 투표 불참자의 존재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가 아닌 해당 계급계층의 대표성 문제가 더 본질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주권의 문제는 각각의 사회경제적 모순 내지 갈등 구조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자의 대표를 어떻게 선출할 것이냐, 이해관계에 대한 의사표시와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의사결정 방식과 집행방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로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샤츠슈나이더는 현실적으로 이익집단 또는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차별(경제적, 권력적, 시간적, 문화적)이라는 문제는 무시한 채, 현존 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 체제에서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근본적,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대안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모든 분석과 논리의 전개는 "자유로운 정치체제"와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이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각 계급과 계층의 입장에서 정치체제도 언론도 전혀 자유롭지 않고 일부 군수자본가나 금융자본, 독점자본, 문화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저자의 논리와 대안은 공허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당원이나 의원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꾼이나 정치지망생들이 차지한다. 양국의 주권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주부, 노인층, 빈민층 등이 직업이었거나 그들의 대중조직에서 대표로 선출되어 의회(국회)에 진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자 역사이자 구조이다. 
그런 현실과 더불어 자본가, 기득권층의 합법, 비합법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공개, 비공개, 합법, 비합법 정치자금을 동원하여 의회(국회)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언론 또한 기득권층으로서 서로 야합하거나 자본가와 기득권층의 광고수주로 인해 편파적인 의사표시와 정보전달을 할 가능성이 높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한 조건에서 사회경제 구조와 계급계층의 인적 구성에 맞는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회(국회)나 정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 사회화라기 보다 먼저 정당 및 정치인의 계급계층별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급선무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인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면에서 기본적인 소득과 사회보장은 인민주권을 위한 민주주의 구현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 정치사회적 현실과 비슷하거나 미국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은 친일파와 극우보수세력에게 독과점되어 있는 정치체제와 언론이 심각하게 편파적으로 작동하는 한국에 적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최장집, 박상훈 등 국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관련 전문가들이 워낙 '미국통(?)'들이고 미국 정치학에 치중되어 있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저자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정치상황과 정당의 부침에서 이익집단과 정당의 대응, 연방정부의 거대화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 등에 대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설명하고 있어 그런 부분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2014년 2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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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허균, 최후의 19일 (상) 허균, 최후의 19일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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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탁환 저 <허균, 최후의 19일 上,下>를 읽고 / 2009. 01., 399/439쪽, 민음사

김탁환은 소설에 문외한인 나에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팩션 소설'을 처음 알게해 준 작가였다.
7년 전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후 푹 빠져들어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을 내리 읽었고, 그 이후 <혜초>, <나, 황진이>, <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노서아가비>, <눈먼 시계공> 등 과거 작품뿐 아니라 신작이 출간대로 연속하여 읽었다.
이 작품 <허균, 최후의 19일>은 중고서점에서도 찾기 힘들었는데, 우연히 후배 사무실 책꽂이에 꽂혀있는 걸 발견하여 기회가 된 것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교산 허균에 대해 여기저기를 뒤져보았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으로만 유명한 교산(蛟山) 허균(許筠)... 국사책에는 광해군 재위 때 반역을 도모하다가 적발되어 능지처참(凌遲處斬)되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었다.
위키백과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1569년생,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는 정도이다.

반란(혁명)에 착수하여 실패하는 날까지 19일간의 이야기를 작가는 허균이 참수되는 순간부터 거꾸로 풀어낸다.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이야기의 맥을 잡기가 여의치 않았으나 금새 작가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작품 속 허균은 "임금/신분 없는 사회체제"를 꿈꾸는 것으로 그려진다. 현대사회로 보면 '공화국'을 꿈꾼 것이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 역사기록으로는 허균이 어느 정도까지 이상사회를 꿈꾸고 혁명의 목표가 왕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나 자신의 동지가 왕이 되려고 했는지 분명치 않다.
위키백과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설명에 민본사상과 국방 강화 정책 추진, 신분계급의 타파와 평등한 인재등용과 붕당배척론을 주장하였다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그 당시에는 '혁명'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적 사실도 임진왜란 당시는 조선 건국 후 200년 만에 정치는 기득권 파당이 심하고 지배계층은 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한데다가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무책임했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신분제가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전쟁 후과에 더해 삼정(전정 田政, 군정 軍政, 환정 還政)이 문란하여 백성들의 삶이 극에 달하는 등 조선이라는 체제 자체가 명분도 실리도 잃은 상황이었기에 객관적인 조건은 '혁명적 상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역사 이래로 당시 사회의 '상식'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고 고수하려는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만 챙기며 인민들의 삶과 처지를 악화시키고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을 때, 항상 혁명 또는 혁명에 준하는 개혁을 통해 변해 왔던 흐름이 있었는데, 소설을 모두 읽은 후 조선왕조 500년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왜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궁금증이 남는다.
마찬가지로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주인인 민중(인민)들의 삶과 처지를 갈수록 악화시키고 사회 진보를 가로막는 '상식'과 '제도'는 무엇인지, 그것을 고수하려는 국내외 세력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시대에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생각하게 한다.
물론 잠깐만 생각해 보더라도 분단체제와 종북이데올로기, 승자독식과 무한경쟁 이데올로기, 세계화와 민영화 프레임, 친일/종미 사대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그런 '구체제' 또는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 이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소설을 모두 읽은 후 생각해보니 허균은 내가 얼핏 알았던 역사적 인물의 수준이 아니라 조선 중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상가이자 혁명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에도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조선 후기 박지원, 박제가 등 소위 '실학파' 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봉건 신분제도와 서얼 제도를 혁파하려한 선각자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 등 끊임없이 지리를 탐구한 사상가이자 철학가, 사회운동가이자 문인,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가 창작한 <홍길동전>이 마냥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허균 선생이 꿈꾸던 이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허균에 대한 더욱 풍부하고 근접한 평가는 이이화의 <허균의 생각>등 인물평전을 읽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허균과 혁명세력들의 혁명의 실패원인이 '칠서의 변'에 이어 다시 한 번 측근에 의한 배신이었다는 설정(역사적 현실이기도 함)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와 방송 등 영상매체 속 작품들이 떠올랐다. 영상매체 관련 종사자들이 최근 지상파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기황후>나 <정도전>처럼 각종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광해군이나 다른 왕, 관료 등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학생들과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리 '시청률'에 목매다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작품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현대의 그릇된 정치사회 현실을 합리화하기 위함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작품'도 아니고 '예술'도 아닐 뿐더러 후손들에게 그냥 권력자나 자본가의 '선전 도구'라고 평가될 뿐이다.

작가의 소설 속 혁명 이야기는 긴장이 넘친다. 500년 전에 꿈꾸었던 선각자가 있듯이 지금도 혁명을 꿈꾸는 선각자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비록 혁명에 실패하여 허균처럼 능지처참을 당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나타나며, 그런 이들로 인하여 사회가 진보하고 인민들의 삶이 개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2014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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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평전 - 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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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이원규 저 <조봉암 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를 읽고 / 2013. 03., 한길사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에 기생하고 친일파와 손을 잡은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살자이자 독재 정권일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이승만 정권에게 1959년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일대기에 대한 평전이다. 
2011년 대법원에서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열어 무죄를 확정하였고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으며 추모비 건립도 이루어졌다.

이 책을 통해 죽산 조봉암의 생애는 많은 부분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죽산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산에게 불리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조차 있는 그대로 평전 속에 담고자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나는 이 평전을 통해 상당 부분 죽산애 대한 오해나 편견을 재거할 수 있었으며, 죽산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청년시절과 한국전쟁 후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세력이 전멸된 상황에서 순수하게 반독재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노력을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다만, 2011년 이후 한국사회에 나타난 죽산에 대한 평가 역시 이 평전을 통해 필요 이상의 거품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책을 통해 본 조봉암의 생애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격변을 온 몸으로 겪은 듯 파란만장했다. 저자가 세세하게 기술한 그의 생애를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조봉암은 1899년 일제강점 직전 강화도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났고 정규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저자는 그가 어린 시절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등으로 일했으나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고학으로 세이소쿠영어학교와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잠시 수학하기도 했다. 
조봉암은 강화도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됐으며, 모스크바 공산대학과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일제에 의해 체포당해 7년간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했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을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이나 차점 낙선을 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그가 선택했던 공산주의가 전향한 뒤에도 원죄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국가변란과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그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살인을 당한 것은 2011년 사법부의 판결을 통해 법적으로 사면, 복권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것은 역사적, 정치적 재평가일 것이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저자가 조봉암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서 중요하게 검토한 부분은 두 가지인데 죽산이 일제시대에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고 전향한 이유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기여한 점이다.
저자는 조봉암의 과거 진술을 빌어 일제시대에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의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해방 후 그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우익으로 전향한 이유는 "8.15광복 후 좌익계의 권력욕이 국가를 위해 옳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죽산이 진행한 농지개혁에 대해 "조봉암 덕분에 한국은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으며,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던 당시에 토지 균등성이란 모두에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나는 저자가 제기하는 두 가지 사안에 대한 평가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다소 비판적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1~2년 고학을 하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을 읽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1~2년 공부했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제3자가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산의 말처럼 일제강점기의 세계사적 사상의 조류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이 제국주의가 되어 조선과 같은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고 독립을 가로막았으니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에 우호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소련이 국가적 이념으로 내세웠던 공산주의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된다.
죽산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우익으로 전향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죽산은 1920년 후반 상해에서 여자문제와 공금횡령, 보신주의 등의 문제를 일으켜 박헌영뿐 아니라 여운형에게도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신의주 교도소에서 출감(교도소 내에서 항일운동을 포기했다는 의혹은 차치하고도)한 이후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 좌익진영에게 제대로 소명하거나 공식적인 징계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좌익진영에서 배제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 방첩대에 체포되어 전향공작을 받는 과정에서 전향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그의 전향 이유를 그의 말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우익으로 전향했다고 하여 당시 대표적인 우익이던 김구나 김규식에게 인정받지도 못했다. 일제 말부터 죽산이 보인 행보는 전향이라기 보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꺽고 일신의 영달과 출세로 나아간 듯 하다.

저자가 두 번째로 중요하게 평가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어렵다. 
일단 무소속 의원인 죽산이 혼자 농지개혁안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어불성설이지만, 죽산이 마련했다는 농지개혁안은 '150% 유상몰수와 120% 유상분배'였는데 일제 강점기 수탈당할대로 당한 소작농 중에서 그러한 조건을 받을 수 있는 소작농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겉으로 나타난 통계 역시 지주들이 저지른 각종 탈법,불법 행위를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죽산의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시행되지 못했고 결국 한국전쟁 이후 시작되었다. 즉,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는 저자의 평가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한국전쟁 중 남한을 점령한 북한은 짧은 기간이나마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평전을 통해 알게 된 죽산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2차 조선공산당이 일제로부터 탄압받은 후 3차 공산당 재건과 항일투쟁을 위해 상해에서 다수의 좌익 운동가들이 국내에 들어갔는데 죽산은 이를 회피했다. 죽산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많은 문제들이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여자문제, 공금문제, 일제협력문제, 전향문제까지.(역으로 왜 여운형과 박헌영은 조봉암을 비판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아쉬움과 궁금증이 남는다.)
둘째, 김이옥 등 죽산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다. 죽산은 정식 결혼한 부인을 제외하고 평생을 걸쳐 김이옥을 비롯해 3명의 내연녀(?)를 두었다. 당시의 상황이 봉건적인 신분질서나 문화가 완전히 변하지 않은 상황이고 여러가지 사정과 조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존중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특이한 점은 죽산이 매번 새로운 여성들과 관계가 발생하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죽산의 정치적 입지가 아주 나빠졌을 때였다. 상해에서도 그랬고, 해방 후 정치적 입지가 나빠졌을 때 그리고 한국전쟁 후 또 정치적 입지가 나빠졌을 때 그랬다.
셋째,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다. 죽산은 상해에서 모플자금이라는 공금에 손을 댔다. 그리고 신의주 교도소에서 출감한 후 인천지역에서 일제에 협력하고 있던 경제인들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해방 뒤 정치계에 입문한 후 미군정에게 정치자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친일 지주와 자본가들에게서도 정치자금을 받았다.

평전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의혹도 몇 가지 있다. 
1. 일제에게 상해에서 붙잡혀 신의주 교도소에 수감된 죽산은 7년 만기를 채우지 않고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일제가 신의주 교도소내 항일투사들의 성향을 기록한 문서에서 죽산은 전향한 그룹에도 전향을 거부한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일제가 전행공작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위키백과의 설명과 달리 죽산은 교도소를 출감한 후 1945년 1월 일제에 의해 예비검속 차원에서 구금될 때까지 항일투쟁 자체를 포기하면서 생계만 꾸렸다. 참고로 일제가 가장 극성을 부린 시점이자 친일파와 변절자가 가장 많이 나타난 시점이 짧게는 1941년부터였고 길게는 1937년부터였다.
3. 평전에 의하면 그는 해방 후 여운형이 최선을 다해 믿고 지지해주었으나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으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에 일찌감치 합류했고,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주독립, 단정반대 세력이 불참한 1948년 5.10 단독선거에 참여했다. 
4. 한국전쟁 중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저지른 폭력사태였던 '부산 정치파동'에서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저자는 이때 미군정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죽산은 이처럼 이승만 정권에 대해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산이 이승만으로부터 사법살인을 당한 것은 저자가 말한 '과거 공산주의 활동이 빌미'가 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부터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협조해 오던 죽산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자 미국과 이승만에게 제거해야할 대상이 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오히려 죽산과 진보당이 탄압받을 당시 같은 야당이고 친일 보수세력인 민주당 등이 정치적인 유불리로 진보당 탄압과 죽산의 살인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1959년 당 강령과 국가변란 혐의로 죽산의 진보당이 등록 취소되고 조봉암 당수가 사형 판결을 받은 것과 2013년 이석기 의원 등이 내란음모 조작으로 구속되고 강령 등의 이유로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비슷한 배경과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민주당 등 야당과 소위 진보진영이라는 이들의 행태까지도...

죽산의 생애 중 정치사상적인 면에 대한 나의 평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출세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패배"다. 죽산은 젊은 시절 "설득의 천재, 조직의 명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똑똑하고 달변이었다. 그래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일찍 높은 직책과 역할을 책임졌다. 그만큼 포부가 컸고 직책과 역할에서 밀려났을 때 좌절에 따른 실망도 컸음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평전 중에 "나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라는 죽산의 말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죽산의 생애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두 가지다. 출세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실패하고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출세주의는 분파와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이고 엘리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포기하면 변절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특히 정치사회 운동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야 만이 많은 약점과 어려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이다.

참고로 평전에서 옮기고 싶은 조봉암의 발언은 두 가지다. 
그는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개회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2014년 한국사회에서 죽산 진보당의 강령과 비슷한 수준은 통합진보당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죽산이 남긴 유언 중에도 있다.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사람이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 2014년 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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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배신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서평] 바바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저, 전미영 역 < 희망의 배신 Bait and Switch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를 읽고 / 2012. 10., 304쪽, 부키


<긍정의 배신>을 통해 긍정을 강요하면서 억압되고 잘못된 현실을 왜곡하는 '긍정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자신이 직접 산업현장에 뛰어든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노동의 배신>을 통해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가 선의와 성실을 다바쳐도 먹고 살 수 없는 '워킹 푸어' 노동 현실을 폭로한 저자 애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3부작' 완결판..

<긍정의 배신>은 자기계발서, 초대형 교회, 긍정심리학 등 긍정주의가 사람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의 도구이자 신념 체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파헤쳐,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사회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독자들 사이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가 3년에 걸쳐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더 드는 워킹 푸어의 진짜 현실을 드러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신화'를 깨뜨렸다.


저자는 이번에 화이트칼라 구직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배신당하고 일자리 불안과 과다 노동에 지쳐 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미국 중산층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한다.

10개월 동안 이력서를 고치고, 취업 박람회 등 온갖 행사를 쫓아다니고, 화장은 물론 성격까지 고분고분하게 바꾸며, 돈과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기업에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능력과 경력보다는 쾌활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더 중시하는 기업 문화를 목격한다. 

몸 바쳐 충성해도 버림받고 몰락해 가는 화이트칼라의 모습을 그린 이 책은 출간 직후 미국에서 전문직 노동조합이 결성될 정도로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 출간된 직후 수천 건의 공감 댓글이 저자의 홈페이지를 달궜다. 이런 호응을 바탕으로 이듬해 화이트칼라를 위한 조합 조직 'United Professionals'가 설립되기도 했다.


먼저 저자는 구직 세계의 법칙에 따라 자신을 취업의 길로 인도해 줄 커리어코치를 구하고 연줄을 찾아 네트워킹 행사를 쫓아다닌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마주친 것은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다. 저자의 커리어코치는 나이 때문에 걱정하는 저자에게 '본인이 37살이라고 생각하면 37살이 된다'는 황당한 믿음을 강요한다. 또 '전문직 이직'이라는 사이트는 '승리자의 태도'를 가지라면서 예전 고용주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취업하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구직자가 갖춰야 할 가장 '올바른' 태도는 '순응'이다. 외모에서도 기업에 순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올바른 옷차림과 적절한 액세서리'를 갖춰야 한다. 이미지 매니지먼트 회사는 이렇게 조언한다. "권위적이어선 안 되고 가까이 다가가기 쉽다는 인상을 주어야 해요. 같이 일하기 편하겠다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은 <긍정의 배신>이 고발한 '긍정주의'가 재취업 현장에 스며든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인성 검사도 받는데 '고대의 지혜'가 담긴 에니어그램이나 MBTI 등 기업에서 널리 쓰는 이런 검사들은 실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기업이 선호하는 것은 '인성'을 강조해 직원들이 순응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깔려 있음을 간파한다. 이것은 '내가 해고된 것은 결국 내 탓'라는 희생자 비난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 회사에서 쫓겨난 것도, 취직을 못하는 것도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 된다. 이런 식으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더욱이 전문직 실업자들에게는 구직 자체가 일종의 '직업'이 된다. 화이트칼라 세계에는 '실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업'이 아니라 '이직'이며, '실업자'가 아니라 '구직자'다. 커리어코치나 네트워킹 회사들은 예전 직장 생활을 필사적으로 '모방'하고 바쁘게 지내면서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자리를 찾는 화이트칼라들은 구직자라는 '일'을 하느라 현실에 불만을 제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단어와 개념을 조작하여 노동자와 실업자가 처한 심각한 구조와 현실을 가려버리는 상징조작과 말장난이 미국이나 한국이나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자영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주변에서도 친오빠, 형부 등이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험하지 않아' 보이면서도 진입 장벽이 낮은 부동산 중개업은 화이트칼라가 '만만하게' 뛰어드는 업종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실패하는 비율이 86퍼센트에 달하고 '생존자'도 70퍼센트가 연 소득 3만 달러가 안 된다. 프랜차이즈 사업도 마찬가지다. 2008년을 기준으로 자영업자 수가 559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31.1%에 이르고, 그 중 절반이 창업 3년 이내에 문을 닫는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미국과 다르지 않다.

화이트칼라가 선택하는 또 하나의 일자리는 저자가 제안 받은 보험, 화장품 판매처럼 수수료만으로 먹고사는 영업직이다. 그러나 이런 업종에 발을 들였다가 사기를 당해 돈만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사기가 아니라 해도 수수료가 너무 적어 생활이 어려운 실정이다. 1년에 5만 달러 이상 버는 사람은 8퍼센트에 불과하고 절반은 1년에 1만 달러도 벌지 못한다.


저자가 직접 경험한 현실의 대부분은 미국뿐 만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 처한 현실이자 한국인의 일상이고 한국 중산층에게 다가올 미래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중산층과 전문직, 퇴직자를 꼬드겨 빈곤의 나락에 빠뜨리는, 화이트칼라를 꾀는 프랜차이즈, 부동산, 영업직 등의 '미끼 상술'은 이미 한국에서도 IMF 이후부터 판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 밖으로 밀려난 구직자 못지않게 '생존자'인 기업 내의 화이트칼라 역시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다. 이제 기업은 직원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본다. 수익이 나지 않으면 언제든 내다 버린다. 그런 CEO에게는 주주에게 이익을 안겼다며 오히려 높은 보수가 주어지는 상황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서비스직을 아웃소싱 한 50개 미국 기업 CEO의 보수 인상폭은 다른 회사 CEO에 비해 5배나 높다.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이제 기업은 '포식자의 세상'으로 변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정'과 '에너지'와 '헌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특히 의사나 과학자 같은 '진짜' 전문직과 달리 일반 화이트칼라들은 '임원실'을 차지한 이들에게 완전한 충성을 서약하고 '자기 자신'까지 판매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일자리의 안정성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잃는 상황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충성을 바쳐도 '배신'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가장 성격이 좋고, 충성심이 제일 강하고, 가장 복종적인 직원이 감원 1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서 밀려난 화이트칼라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일자리를 잃었다가 다시 취직한 사람들의 수입은 전 직장에 다닐 때보다 평균 17% 줄어든다는 미국의 통계 결과가 이를 말해 준다. 한국의 경우는 17%가 아니라 50%를 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절박함 때문에 학력이나 능력과 무관한 저임금 전업 일자리, 즉 월마트나 스타벅스 매장 직원으로 취업한다. 하지만 이런 '생존용' 임시 일자리에서 온종일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에는 구직 활동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업 안에 있을 때는 '노예'로, 기업에서 밀려나고 나면 빈곤에 대한 공포를 안고 워킹 푸어로 전락하는 화이트칼라.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무너져 가는 것이 오늘날 미국과 한국 중산층의 아픈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이나 대학과 연구소, 지식인들은 한국사회의 중산층의 현실, 재취업 시스템의 붕괴, 해고와 실직과 자영업의 연결구조 등에 대해 애런라이크처럼 대중적으로 고발하는 저서를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김미경이나 박경철 류의 온갖 성공학이나 처세술, 마인드 컨트롤 같은 긍정주의 강사들이 언론과 출판시장을 장악했다.

그런 모습이 더욱 한국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도대체 언론의 왜 존재하며 '지식인'이란 무엇일까...


미국이나 한국이나 행정부와 정치권은 현실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벌, 기득권자들의 편을 들면서 기업들이 해고와 실직을 더 쉽게 만들고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를 더 악화시키는 등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미국의 클린턴/오바마 정부가 집권했을 때나 한국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집권했을 때도 상황이 악화되는 데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했음을 돌이켜 볼 때, 미국이나 한국의 여야 거대 정당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한국의 중산층과 빈민에게, 실업자와 워킹 푸어에게 미국의 민주당과 한국의 민주당에게 정권을 맡기자고 선동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가능한가? 애런라이크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정말정확한 진단이자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중산층이든 빈민이든 자신이 처한 구조와 조건을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당도, 단체도 그냥 대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대중조직을 결성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하며, 그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진보정당과 연합을 하든지 거대 정당을 압박하는 것이 기업과 자본가를, 언론과 사회문화 현상을, 행정부와 입법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범주'에 대한 것이다. 

사실 중산층, 특히 화이트칼라라는 계층 개념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신체와 지능을 포함한) 밖에 없는 '일하는 사람(노동자)'을 생산직과 사무직, 서비스직이나 전문직으로 분리시키게 된다.

노동하는 공간이나 노동의 내용, 방식 등이 달라도 '노동자'라는 큰 범주에 속하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 체제나 신자유주의에서 처하는 조건은 동일한 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4년 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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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모두가 칭찬하는 것은 의심해보고 모두가 비난하는 것은 자세히 살펴본 후 판단하라 <역사여, 다까끼 마사오여!>

 

 

 


추천 [서평] 김갑수 저 <역사여, 다까끼 마사오여! : 통합진보당의 눈물과 이정희를 위한 제언>을 읽고 / 2013. 03., 293쪽, CNC books

저자는 페이스북과 인터넷 언론기사를 통해 알게된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압록강을 넘어서>와 <중경에서 온 편지> 등 역사소설(팩션) 등을 여러 권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통합진보당의 눈물과 이정희를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 바로세우기'라는 관점에서 2012년 한 해 동안 한국 정치계의 진보정치권에서 벌어진 주요한 사건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담은 정치평론집이다. 그리고 작가 본인의 사회역사 인식과 세계관, 인물평, 한국사회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는 식견과 제안도 담겨 있다.
특히 2012년 통합진보당을 둘러싸고 벌어진 몇 가지 중요한 계기를 통해 한국정치권과 지식인층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저자는 먼저 '서언'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글쓰기'로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실제로는 부정적인 인물인데 오히려 긍정적 인물로 미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으며, "역사의 왜곡이란 기실 인물에 대한 왜곡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신은 "인물 비판을 할 때 실명 노출은 기본이며, 논점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가치관인 "긍정적 인물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부정적 인물을 통해 교훈을 얻는 타도가 단연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비판적, 부정적 글쓰기의 이유임을 밝힌다. 그의 페이스북 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역사와 인간'에서 저자는 과거 조선시대와 한국근대사를 제대로 알아야만이 한국현대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으며, 미래의 한국이 '정상화'될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음을 주장한다.
우리가 제도교육을 통해 편집 왜곡된 상태로 알고 있었던 인물들, 즉 친일파 김옥균과 종미사대주의자 서재필, 나혜석과 안창호에 대한 재평가, 박정희와 이광수, 그리고 윤봉길 의사와 장준하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역사 왜곡이 수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보연'하는 이들에게도 존재함을 비판한다.

제2장 '통합진보당의 눈물과 진보의 앞날'에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언제나 금단과 배제의 표적이 되어온 진보정당의 역사'를 통해 2012년 5월부터 12월 대통령 선거 기간에 이르기까지 통합진보당에 가해진 마녀사냥과도 같았던 매도와 배제의 과정을 비교 분석하여 그 근본적인 배경을 '분단과 전쟁'으로 지적한다. 조-중-동뿐 아니라 소위 '진보언론'까지 매일 보도되었던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은 적잖이 충격이며 한국사회의 언론현실이 유신시대 만큼이나 어둡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는 통합진보당이 부당하게 공격받고 배제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현상을 "외눈박이 지식인들의 '주류 콤플렉스'"로 규정하고 소위 '진보매체'와 지식인들의 위선과 비겁함을 지적한다.
'주류 콤플렉스'는 다른 말로는 '극우 콤플렉스'가 될 것이고, 그런 경향을 강제하는 배경은 김태형이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제시한 '우월감 트라우마'와 '분단 트라우마'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제3장 '2012년 대선 분석'에서 저자는 정권교체의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진보언론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가짜 보수'와 '사이비 진보'가 한국의 정치사회에 대한 유권자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2012년 중 중요한 변곡점에서 위세를 떨친 사이비 진보전사들과 정치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나는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진보-보수라는 이념적 경향성 이전에 사실관계나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이 '민주적 기본질서'의 방향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거짓이나 위선, 모략이나 사기 위에 세우는 것은 진보-보수를 떠나 부도덕한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2012년 한 해 동안 민주진보진영의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은 사실이나 진실을 소중히 하려는 노력(과정)보다 정당의 당권이나 정치에서의 주도권, 대통령 선거에서의 권력 획득이라는 목표(목적)에만 집착하는 집단적 광기를 보여주었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라는 정체성에 대해 나도 가끔 "민주당은 진보적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민주당 지도부와 소속 국회의원들의 계급적 구성, 강령과 정책의 모호함, 18~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과의 끝없는 야합과 동조, 정치자금 후원자들의 구성 등을 고려할 때, 나는 민주당 전체를 '진보'로 규정하면서 그 속에 편입되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정치의식에 동의하기 어렵다. 민주당은 냉전수구세력이 강하면 보수쪽으로 이동하고, 진보진영이 강하면 진보쪽으로 끌려가는 '떠돌이' '유랑자' '정체성 없는 정치꾼'이 중심인 정당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진보정당의 현실과 호남지역의 정치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민족진보와 호남지역의 연대'를 제안한다. 독특하면서 나름 의미있는 분석과 제안이다.

제4장 'NLL, 평양, 천안함, 국가보안법'에서 저자는 새누리당이 2012년을 혼란스럽게 한 NLL 논란의 현상과 본질을 분석하고, 신상철 씨의 <천안함은 좌초입니다>와 이시우, 이정희 공저 <법정콘서트 무죄>를 소개하면서 진실과 정의, 남북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한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읽어야 한다는 것..

작가의 저서나 페이스북, 인터넷 언론의 글을 읽다 보면 "모두가 칭찬하는 것은 의심해보고, 모두가 비난하는 것은 자세히 살펴본 후 판단하라."는 공자의 문장이 떠오른다. 그는 내가 스스로 깊이 관찰하거나 공부하지 않은 채 적당하게,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관계나 편견을 여지없이 깨트려 버린다. 그리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던 각도로 상황과 사물을 검토하게 해준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안창호에 대해 다시금 살펴봐야겠다.

○ 인상 깊은 문장 :
- "나는 '종북'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분노라기보다는 아예 절망적인 심정에 빠져들곤 한다. 그들에게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 국민으로 사는 수치심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북쪽을 배격하는 것도 모자라 남쪽의 동포들에게도 이념의 올가미를 씌워 배격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정신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종북'은 정적을 빨갱이와 용공으로 몰았던 매카시즘보다 현저히 조악한 개념이다. 빨갱이와 용공에는 이념배격만 있을 뿐이지만 종북에는 이념뿐 아니라 동족 배격의 모진 악성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분단을 고착화하고 통일을 방해하기 위한 반민족적인 책동으로밖에 달리 이해할 수가 없다."(p.236)

[ 2014년 1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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