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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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E.샤츠슈나이더(Elmer Eric Schattschneider) 저, 현재호/박수형 역 < 절반의 인민주권 The Semisovergreign People >를 읽고 / 2008. 11., 243쪽, 후마니타스

미국 정치학계의 거장인 슈나이더는 최장집, 박상훈 등 한국 정치학계와 정치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마 정치학 전공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온 전공자들이나 정치를 배우러 미국에 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접했던 인물이자 이론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슈나이더의 대표적인 정치 관련, 특히 정당에 대한 저서라 할 수 있다. 그는 '갈등이론'의 창시자이자 전문가다. 그는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등 많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갈등이론'이란, 갈등이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토대이며, 정당 간 경쟁이 갈등의 사회화를 통해 정치참여의 범위를 확장시킬 때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치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고전적 해석과 다르다. 그는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원래부터 환상일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용 불가능하다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와 달리 근대 이후 인류사회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한꺼번에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너무나 복잡하고 정치적 현안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정치현안을 쫒아갈 수 없고, 노예제에 뒷받침 되어 있던 그리스 사회의 시민과 달리 근대 이후의 시민은 먹고 살아가기도 빠듯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현대의 정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다."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정치체제에 지도자가 필요하며, 직접 민주주의 대신 대의제 민주주의를, 참여보다는 선택을 더 많이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절반의 인민 주권"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 같다.
다시 말해 현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지도자들과 조직들이 공공정책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경쟁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경쟁적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나는 갈등이론에 대한 의견 이전에 샤츠슈나이더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와 현실 분석에서부터 동의하기 어려웠다.
먼저 현실 분석과 관련해서 보면, 현대 사회가 인구가 많은 것은 완벽한 인민주권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국가로서 중앙집권 시스템이나 인구의 규모가 문제가 된다면 지방분권과 의사결정 및 집행을 작게 나누면 되기 때문이고, 대의제가 문제가 아니라 대의제에 선출되는 대리인부터 인민주권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즉 우선 중요한 것은 인민주권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국가라는 규모가 중요한 것이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국민국가로서의 크기가 중요한 당사자는 평범한 인민들이 아니라 사회규모를 키워 정치경제적 사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이나 관료일 뿐이다.
현안이 많고 복잡하다는 현실 역시 인민주권의 원리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는 안될 것이다. 소위 전문가나 정치가라 하더라도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많고 복잡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그런 사실에 대해 저자도 책 속에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민주주의를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보통의 인민을 '무지'하다고 단정짓는 엘리트주의와 '진문가'들이 무언가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편견이 작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먹고 살기 빠듯하다는 현실 분석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과 생산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본가의 착취, 수탈, 독점 체제라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 긍정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대안의 사회경제 체제가 아니더라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또는 복지국가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보통의 인민들이 8시간 노동으로 충분한 소득을 올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고 그 여가를 활용하여 얼마든지 정치적 현안에 대해 학습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논리가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샤츠슈나이더는 위와 같은 현실 인식과 전제를 토대로 삼기 때문에 '인민주권'이라는 고전적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절반의 인민주권'을 제시한 것이다. '절반의 인민주권'도 표현만 인민주권일 뿐, '무지한 사람들의 동의에 의한 똑똑한 전문가의 통치'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고, 사실상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를 포기하는 셈이다.

인민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샤츠슈나이더는 갈등과 경쟁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정치를 해석하려 했고,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서로 비슷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갈등이론'은 사회경제 체제나 구조를 분석하려 하지 않고 인류사회에 보편적으로 또는 특수하게 존재하는 여러가지 갈등을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 필요한 요소로 도입하게 된다. 어떤 인간 사회든,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한 사적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적 갈등에 대한 이해관계자가 늘어나 사회적 갈등으로 커지면 그 때 정치와 국가가 개입한다는 것이 갈등이론의 기본 맥락이다. 여기서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국가권력을 다투는 기구 내지 조직으로 정당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이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이론을 체계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은 갈등의 범위, 갈등의 가시성, 갈등의 강도, 갈등의 방향이다. 그리고 정당의 정치 전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갈등의 차원이다. 갈등의 대체 혹은 치환, 즉 갈등을 불러들여 기존 갈등을 대체하는 것이 정치 전략의 핵심 중의 핵심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에서 리더쉽과 지도자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 정치에서 투표 불참자(미국의 투표 불참자는 청년, 빈민, 소수인종에 집중되어 있음)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정당들이 대안을 정의하고 갈등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점차 나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1970년대 미국 정치, 정당의 한계는 21세기 들어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생략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구조와 관계 없는 보통의 갈등을 정치와 정당의 핵심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현실적으로 분석해도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경제적 구조일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먼저 분석하게 되면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대립구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상관 없이 생산(수단)의 문제, 분배(유통)의 문제, 소비의 문제, 공익의 문제 등에서 나타나게 된다.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문제와 과잉생산이나 과소생산이 문제가 될 것이고, 분배의 문제에서는 초과이윤에 대한 분배나 노동가치에 대한 평가 문제가 될 것이고, 공익의 문제에서는 공공재산이나 국가정책의 방향과 제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관계 없이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본권 문제, 인민주권의 절차 문제, 인권이나 자유의 문제, 복지의 문제, 계층의 문제 또한 갈등의 주요한 요소일 것이다.
즉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거한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야말로 저자가 주장하는 '갈등'의 원초적인 모습인 것이다. 미국의 광범위한 투표 불참자의 존재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가 아닌 해당 계급계층의 대표성 문제가 더 본질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주권의 문제는 각각의 사회경제적 모순 내지 갈등 구조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자의 대표를 어떻게 선출할 것이냐, 이해관계에 대한 의사표시와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의사결정 방식과 집행방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로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샤츠슈나이더는 현실적으로 이익집단 또는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차별(경제적, 권력적, 시간적, 문화적)이라는 문제는 무시한 채, 현존 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 체제에서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근본적,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대안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모든 분석과 논리의 전개는 "자유로운 정치체제"와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이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각 계급과 계층의 입장에서 정치체제도 언론도 전혀 자유롭지 않고 일부 군수자본가나 금융자본, 독점자본, 문화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저자의 논리와 대안은 공허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당원이나 의원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꾼이나 정치지망생들이 차지한다. 양국의 주권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주부, 노인층, 빈민층 등이 직업이었거나 그들의 대중조직에서 대표로 선출되어 의회(국회)에 진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자 역사이자 구조이다. 
그런 현실과 더불어 자본가, 기득권층의 합법, 비합법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공개, 비공개, 합법, 비합법 정치자금을 동원하여 의회(국회)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언론 또한 기득권층으로서 서로 야합하거나 자본가와 기득권층의 광고수주로 인해 편파적인 의사표시와 정보전달을 할 가능성이 높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한 조건에서 사회경제 구조와 계급계층의 인적 구성에 맞는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회(국회)나 정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 사회화라기 보다 먼저 정당 및 정치인의 계급계층별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급선무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인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면에서 기본적인 소득과 사회보장은 인민주권을 위한 민주주의 구현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 정치사회적 현실과 비슷하거나 미국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은 친일파와 극우보수세력에게 독과점되어 있는 정치체제와 언론이 심각하게 편파적으로 작동하는 한국에 적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최장집, 박상훈 등 국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관련 전문가들이 워낙 '미국통(?)'들이고 미국 정치학에 치중되어 있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저자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정치상황과 정당의 부침에서 이익집단과 정당의 대응, 연방정부의 거대화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 등에 대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설명하고 있어 그런 부분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2014년 2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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