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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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저, 안규남 역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을 읽고 / 2013. 08., 123쪽, 동녘

이 책은 공부모임 선정 도서인데, 제목부터가 한국사회에서도 필요한 문제제기라 생각이 들어 흔쾌히 주문한 것이다. 얇은 책 두께도 선택에 한 몫..ㅎ

왜 사람들은 불평등을 감수할까? 저자는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회적 원인을 따져 보고 이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려 한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고, 저소득층은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지옥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정치적,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는 21세기 한국사회 그리고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은 저자의 말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라는 저자의 말이 실감나는 현실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불평등은 이전의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르다. ‘20 대 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 ‘0.1 대 99.9’의 사회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돌연변이다. 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종의 출현이다.
그런데도 언론과 학자, 전문가들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불평등의 찬가,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한다. 우리는 애써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마트에 가서 웃으며 물건을 사고 백화점에서 대기업이 유혹하는 상품을 바구니에 담기에 바쁘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쇼핑을 하고 웃고 떠든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된 일인가?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왜 불평등에 동의하는가?

저자는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그 대표적인 새빨간 거짓말 4가지를 바우만은 이렇게 제시한다.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왜 우리는 이런 거짓말에 속고 있을까? 바우만은 이 책 3장에서 왜 우리가 이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다.

그렇다고 거짓 믿음들을 버리기만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현실의 힘, ‘운명’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거짓 믿음에 근거한 잘못된 선택이 바로 우리를 옥죄는 구조화된 현실을 만들고 공고히 하는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패배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바우만은 말한다.

"패배했다는 것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지 그리고/또는 무시로 인해 승리가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p.112)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에서 미국이 "부자들은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자녀들을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내고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는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기껏해야 보통 수준의 교육과 배급제와 다름없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자감세'와 과태료 과잉징수, 폐지 노인들에 대한 과세와 ‘부유세’ 등의 논란 속에서도 1퍼센트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꼰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p.22)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이미 폐기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2013년 들어서도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아니 시민들은 점점 그 효과를 의심하는 데 반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어용방송과 보수(극우)언론은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선전하고 세뇌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전면적 경제 시스템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는 요즘 '철도 민영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지금 정부의 눈길은 온통 민영화에 쏠려 있다. 정부와 여당은 공개적으로는 '민영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민영화를 추진할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방만하기만 하고 인건비만 더 투입되는 철도공사의 자회사를 만들어 흑자 노선인 KTX를 분리시키려 할까? 왜 의료법인의 자회사가 영리사업이 가능하도록 만들려 하는가?
이러한 정책은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또 다른 불평등을 낳을 것이고 우리는 결국 다시 좌절의 늪에 빠질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가 우리들의 시선을 끈 것은 그가 언급한 미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못지않게 한국의 불평등 정도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모든 불평등은 시장의 정치적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나고 이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바우만은 사회학자답게 정치나 경제적인 측면 외에 더 나아가 한 사회적인 상황도 주목한다.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다. 그리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고분고분히 선택할 때 받게 되는 보상처럼 압력을 받고 있는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도 주로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이라는 소중한 통화로 지불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 비용들은 불평등과 불평등의 공적, 사적 결과들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된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p.41)

바우만은 이렇게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회적 원인을 밝힌 뒤, 이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3~114)

저자는 이 책에서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그리고,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하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나는 저자의 제안대로 '사유'만 해서는 이 사회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사유'와 '실천'이 병행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상승작용을 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미래를 없을 것이다.

[ 2013년 1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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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조국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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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조국 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를 읽고 / 2010. 07.(개정판), 198쪽, 책세상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파업의 자유, 신체의 자유, 이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헌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 조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권자들의 의식과 제도가 필요하다. 주권자들의 의식이 바로 여론이고 문화인 셈이고, 제도가 바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이다. 그리고 행정, 입법, 사법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헌법을 해석하고 실제 행동하기 때문에 종종 또는 오랫동안 헌법을 훼손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 제정된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1987년까지 헌법은 어두운 참고에 박혀 있었고, 학살자 독재자들이 맘대로 정한 법률로 행정, 입법, 사법을 휘둘렀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역시 노태우 정권에서 현재의 박근혜 정권까지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유린되어 왔다.
한국에서 헌법을 토대로 실제 법률을 제정하고 운영하는 현실은 아직 미숙한 단계에 불과하다.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그런 대표적인 사례, 특히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긴급한" 폭력의 위험이 없는 한 보호되어야 할 생각이나 양심이나 사상이나 표현이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표방하는 한국은 헌법 제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헌법학계는 이 조항에서의 양심의 의미는 널리 사상의 자유까지도 포괄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실제로 보장되고 있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가보안법, 색깔론, 종북공세, 사상공포증이 일소되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조국 교수가 2007년 이 책을 출간하면서 우려한 일들이 2012년부터 전사회적으로 시작되어 올해에는 한국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근거도 없고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특정 개인과 정치세력의 생각과 사상을 캐묻고 단정하고 낙인찍고 매도하고 처벌하고 있다. 좀 바웠다는 이들까지 헌법과 양심,사상의 자유를 앞장서서 침해한다.
헌법을 지키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앞장서서 보호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같은 국회의원의 생각과 사상을 재단하고 낙인찍고 마녀사냥식으로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데 협조했다. 조폭 수준도 안 되는 정보기관이 불법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찌라시 수준도 안 되는 언론이 여론몰이에 나서고 정당과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여론의 마녀사냥에 굴복해 숨을 죽이고 있다. 저자 자신도 움추러든 모습이 느껴진다.
부정하게 권력을 쥔 자들이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소수 야당에 대해 정당해산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다른 야당과 정치지향적인 세력들은 내년 지방선거의 유불리를 계산하느라 더 분주하다.

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조국 교수의 저서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민주를 위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만 명시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 사회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받고 통제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 비판하고 있다.
그는 한국사회가 여전히 ’준법서약제’나 ’양심적 집총거부권’, ’빨갱이 콤플랙스’와 같은 우리 정신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고 있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지탄받는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고 있다. 
책은 법 앞의 평등을 침해하는 보호관찰법, 대체복무제 도입을 고민해야하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빨갱이 콤플렉스와 사상을 표현하고 실현할 자유, 국가보안법 총비판 4가지 핵심쟁점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담고 있다.

그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근거로 밀의 <자유론>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 어떤 생각과 사상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 어쩌면 그 사상이 진리일지 모른다. 다른 말로 우리는 진리를 억압함으로써 진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효용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둘째, 설사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통상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할 문제이다. 셋째, 진리라고 널리 인정되는 사상의 경우도 그것에 대해 진지하고 활발하게 논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치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힌 것처럼 생각하여 그 사상의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기 어렵다.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교설 자체의 의미가 없어지거나 약화되어 그 사상이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동하는 영향력이 상실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쓴 글을 혐오한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당신에게 보장해주기 위해 나는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즉 누군가에게 생각을 표현할 권리를 인정한다고 그것이 곧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문장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한 말로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의 권리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나의 의사를 표현하고 또 표현하지 않을 권리,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법과 제도뿐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경제 학술 문화 생활 영역에서도 통제를 받는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이라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조국 교수는 민주국가라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이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의 수준은 소수자의 양심과 사상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햇볕정책,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애써 일궈놓은 북한과의 평화적 흐름은 이명박 정권 하에서경색되었고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공과 안보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북한을 '한 민족'과 ‘한 나라’가 아닌 적국,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비롯한 인권 관련 국제법규에 따라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할 것을 주장한다. 좌 또는 우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에 충실해서 완고하게 정립된 고정관념을 반성적으로 재검토하자고.

조국 교수의 2010년판 개정판을 끝까지 읽으니 책의 끝 부분에 아래와 같이 결론을 스스로 요약해 놓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법조계, 학계, 정치계, 언론계, 시민운동,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진보적' '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1.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비전향 사상범에게 추상적인 미래의 재범 위험성을 이유로 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내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 보안관찰법 비판
2. 양심적 병역거부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리로 인정하고 있고 국제법도 승인한 인권의 문제다. 국가는 이를 강제해서는 안되며,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
3. 사상의 자유는 사회 진보의 필수요건이며, 진리는 사상의 충돌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사상 간의 경쟁을 봉쇄하는 '빨갱이 콤플렉스'는 사라져야 한다.
4. 체제를 비판, 부정하는 사상의 표명과 실천도 그것이 폭력과 파괴 행위를 수반하는 등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한 사상의 자유의 하나로 보장해야 한다.
5. 국가보안법은 통일의 한 주체인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통일 지향을 가로막는 법률이며,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하여 시민의 정치적, 시민적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침해하는 법률이므로 페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더라도 국가안보에 구체적이고 실질직어니 위험을 주는 행위는 형법 기타 다른 법률로 제재할 수 있다.

결론과 관련하여 보충하는 몇 개 문장도 소개한다.

"양심수란 폭력을 주창하고나 직접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여타 양심에 따라 형성된 신념을 이유로, 또는 인종적, 성적, 피부색, 언어, 민족적, 경제적 지위 때문에 투옥, 구금, 육체적 제약이 부과된 사람들이다" - 국제사면위원회

"기존의 제도와 통념, 다수의 목소리를 무조건 추종하기 보다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공비판적이며 전복적인 사상을 만들고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회는 모순이 조기 잘견되고 해소되어 지금만큼이라도 진보할 수 있었다"

"시민이 자신의 양심과 사상을 지니고 실현하는 자유에 대한 국가의 제약은 가능한 한 억제되어야 하며, 제약할 때는 엄격한 요건에 따라, 자유를 최소한도로 침해하는 범위와 정도로 해야 한다."

"다를 수 있는 자유의 실체는 기존 질서의 심장을 건드리는 사안에 대하여 다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검증되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 스톤)

"진리 여부를 가리는 최고의 검증 방법은 그 사상이 시장의 경쟁 속에서 수용되는 힘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 홈스)

[ 2013. 11.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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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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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저, 박홍규 역의 <상식 Common Sense 인권 Rights of Man>을 읽고 / 2004. 12., 435쪽, 필맥

이 책은 미국 독립혁명 및 프랑스혁명 시기의 혁명적 정치사상가였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대표작 <상식>과 <인권>을 한데 묶은 것이다.
<상식>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의 인민들에게 자주독립 및 대의제에 입각한 공화국 수립을 촉구함으로써 아메리카 독립전쟁을 혁명의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인권>은 프랑스혁명을 비난한 보수논객 에드먼드 버크에 대항해 프랑스혁명을 옹호하면서 자연권에 입각한 인권의 관점에서 국가의 바람직한 모습과 역할을 논했다.

두 책은 독립혁명기의 미국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영국의 제국주의적 횡포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오늘날 미국이 스스로 제국건설에 나서면서 자신의 건국이념을 어떻게 배신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20세기 전반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참혹한 인권유린을 겪은 세계는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해 선포하고,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평등, 인종차별, 성차별 등으로 인해 인권유린은 계속돼왔다. 최근에는 테러와 대테러 전쟁, 경제적 세계화에 수반된 불평등 심화, 종교간 갈등 등으로 인한 인권유린의 참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13년 한국의 정치와 사회처럼 '상식'과 '인권'이 간절할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보수'를 주창하는 이들은 상식이나 인권을 벌레보듯 하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중 일부는 상식과 인권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 보인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상식'과 '인권'을 이야기하면서도 서구에서 넘어온 '상식'가 '인권'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개념인지 잘 모르고 떠들었다. 이제 '상식'과 '인권'을 서구사회에 전격적으로 제기했던 페인의 팜플렛과 책을 읽으면서 그 개념의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책을 번역한 박홍규 교수가 추천서에 쓴 글도 의미심장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소용돌이를 겪은 후, 이 책을 번역하여 출판했던 박홍규 교수가 '옮긴이의 말'에 남긴 문장이 9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공감이 된다. 공직자라 하여 정상적인 비판이 아니라 근거도 없이 감정섞인 마녀사냥식 비난을 퍼붓는 이들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2003년 초부터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한 점에 본노했다. 그 분노는 대통령이나 국민이 갖는 상식적인 인권을 국회가 비상식적으로 침해한 민주주의의 원리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국회의 도전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아직도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상까지 도사리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보다 더 부패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당시 분노의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탄핵반대 의견이 거세었다가 과거 독재자 대통령의 딸이 국회 다수당의 새 대표로 뽑히자 그 반대가 삽시간에 수그러든 점은, 대통령에 대한 권위주의적 생각이 국민 대다수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현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인권과 민주주의가 상시이 아님을 웅변한다."

박 교수의 해석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자만, 대통령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상식 아닌 상식이 광범위하게 도사리고 있으니 국회의원, 그것도 소수당의 국회의원 한 명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인권이 쉽사리 짓밟히는 것이 어찌보면 한국사회에서 상식이 제대로 자리잡기 쉽지 않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정치인과 지식인, 언론인은 "일반 국민에게는 인권이 있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검찰총장에게는 인권이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주장은 인권이 무엇인가에 대해 철저하지 않은 생각이 문제일 것입니다.
인권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지위나 출생, 직업이나 재산정도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보편적으로 불리우는 '상식'이라는 개념이 서구에서 어떤 과정으로 탄생하였는지 공부하다 보면 상식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인식에 도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도 아니라면 서구처럼 식민지 지배자와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혁명과 전쟁을 통해서 한국인 개개인들이 인식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는 상당한 인명의 희생이 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미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여전히 많은 정치인, 지식인, 개인들이 개념과 적용에서 '아전인수'하는 경향이 많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지난 2008년 이후 지속적으로 후퇴하고 있으니 걱정이 걱정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데 있어 서구의 사상에서 늘상 나타나는 두 가지 경향은 잊지 말아야한다. 첫째, 토머스 페인이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애초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부당하게, 짐승처럼 ?i아낸 것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나 논리에 포함시켰는지 둘째, 200년 전에 처음 제기된 개념이고 동양과 서양이 진화해온 사회와 문화가 다르니 우리에 맞게 다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18세기 미국과 영국 그리고 21세기 한국과 미국
페인의 저술 중에서 일부를 소개한다. 당시의 시대를 21세기로 바꾼 후, 아래 문장에서 영국을 미국(아메리카)로, 프랑스/스페인을 중국으로 바꾸어 읽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당시 미국의 종속과 그에 따른 위협은 지금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21세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셈이다.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이 우리를 보호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영국이 자신의 비용과 함께 우리의 비용으로 대륙을 방어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어는 보호라기보다는 독점이며, 영국은 같은 동기, 즉 장사와 영토를 위해서라면 그게 아메리카가 아니라 터키라도 방어했을 것이다.
가련하게도 우리는 낡은 편견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섰고, 미신에 엄청난 희생을 바쳤다. 우리는 영국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이익'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영국의 보호를 자랑해왔다.
그러나 영국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기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 것이었고, 그 적은 '이와 다른 이유로' 우리와 싸운 적이 없지만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이율'로 우리의 적이 될 것이다.
영국이 더 이상 대륙에 그런 거짓 주장을 할 수 없게 하거나 대륙이 더 이상 영국에 종속되기를 거부한다면,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과 전쟁을 해도 우리는 그들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p.48)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런 동맹을 파기해야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영국에 복종하거나 예속된다면 아메리카 대륙은 곧장 유럽의 전쟁과 분규에 말려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아무런 불평이나 감정도 갖지 않은 나라들과도 사이가 틀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유럽은 우리의 무역시장이므로 우리는 그 어느 부분과도 편파적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유럽의 투쟁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참된 이익이다. 그러나 아메리카가 영국 정치라고 하는 저울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한 부속물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p.52)

나는 복수심을 도발할 목적으로 공포를 심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확고한 목적을 단호하게 추구할 수 있도록 치명적이고 비겁한 반수면 상태에서 우리를 일깨우고자 하는 것뿐이다. '머뭇거림'과 '비겁'으로 인해 아메리카인들이 스스로 정복당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영국이나 유럽은 그들의 힘만으로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없다.(p.56)

영국이 다시는 우리을 찾취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것은 헛된 환상이다. 우리는 인지조레가 폐지되었을 대 그렇게 생각했지만 불과 일이 년 만에 진실은 드러났다. 따라서 한번 패배한 국민은 그 패배한 일에 대해 절대로 다시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리라고 가정해도 좋다.
영국은 이 대륙을 정의롭게 통치할 힘이 없다. 그 일은 너무 버겁고 복잡해서,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 나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p.57)"

영국과 전쟁을 통해 미국이 독립한 후 미국이 제대로 된 사회와 국가로 정비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과 영국의 관계가 공정하고 평등하고 평화롭개 변모했듯이 미국과 한국의 관계도 한국이 미국에 대한 종속, 예속에서 벗어날 때만이 미국과 진정한 '동맹'이든 '동반자'든 가능할 것이다.
당시 미국 내에 존재하는 친영파가 현재 국내에 친미파로 존재하고 있고, 영국의 보호를 주장하는 이들처럼 작전지휘권을 돌려받기를 겁내하면서 어처구니 없게도 그 댓가로 미국 무기를 사주려는 작자들이 있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미국으로부터 심리적, 군사적, 정치외교적,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주권을 세우는 과정과 동전의 양면이 될 것이다. 지난 20년 과정에서 보았듯이 북한 문제는 '권력쟁탈'과 '이익'을 위한 핑계일 뿐이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인권선언

인권의 기원은 1789년 프랑스 국민회의가 선포한 인권선언, 즉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다. 인권선언 17개 조항 중에서 인권선언의 토대인 몇 가지 조항을 살펴 보면 아래 네 가지다.

제1조,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도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 따라서 사회적인 차별은 공공의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 등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은 본질적으로 국민인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명백히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제4조, 정치적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이 동일한 권리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필요한 제한 외에는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
제6조, 법은 공동체 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를 통해 법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법은 보호를 하든 처벌을 하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해야 한다.
제11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 중 하나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단, 법으로 정한 경우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 (토머스 페인의 <인권> 중에서...)

따라서 이 인권선언을 2013년 대한민국에 적용할 경우, 작년 대선에서 51.6% 득표율로 당선된 정권이라 하여 48.6%의 유권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할 권리는 없다. 다수당이라고 하여 소수당을 다수결로 차별할 권리도 없으며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다고 하여 다른 정당, 단체, 개인, 정책을 차별할 권리도 없는 것이다. 그런 차별을 허용한 법과 제도는 인권 침해이므로 바꾸어야 한다.
또한 강정마을, 쌍용차 해고자, 밀양 송전탑, 용산참사에 대한 정권의 강제와 폭력은 주권자이자 인권을 가진 사람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인 자유, 안전, 저항권을 침해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 공권력의 행사는 폭력일 뿐이고 자연인의 저항은 권리인 것이다.

시민과 유권자가 스스로 법 제정에 참여할 권리를 제한한 현행 헌법과 법률은 한국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와 주요 임명직 공직자에 대한 주권자의 대표 선출권도 강화되어야 한다. 스위스처럼 일정한 규모의 주권자가 요구할 경우 법률 제정권과 공직자에 대한 탄핵권을 가져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되지 않는 이상 한국사회에 인권이 보장되었다거나 민주화되었다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국가 안보는 국민의 안전과 자유, 저항권, 평등, 생존권이 보장되었을 때 국민들의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정부와 정권을 반대하는 개인, 단체, 정당의 주장과 노력을 '종북' '빨갱이'로 매도하는 모든 언행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특히 언론과 배운 것들의 행태는 헌법과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올해 지속되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 극우언론의 탄압과 여론몰이는 인권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침해다. 소위 진보정치인과 진보지식인의 비판을 위장한 비난 역시 인권이나 정치적 자유, 공공의 이익이나 사상 의견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 종파적 이익 또는 극우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당시 토머스 페인의 한계를 지적해야 한다. 그는 "노르만의 윌리엄으로부터 시작하면, 영국이라는 국가는 본래 침략과 정복에 기반을 둔 전제정이었음을 알게 된다."(p.279)고 저술했지만, 미국의 독립 이전에 수백 년간 서구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 원주민, 인디언을 ?i아내고 학살하여 토지를 장악했던 것 역시 침략이자 정복이기 때문이다. 페인은 책 어디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 2013년 10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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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저, 김진준 역 <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 >를 읽고 / 2005. 12., 752쪽, 문학과사상사

이 책은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전세계 인류의 불균등한 삶과 생활을 이루어살고 있는 이유, 더 나아가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대량 학살한 이유를 진화생물학적으로 연구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자연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이래 진화론은 유전학, 진화생물학, 그리고 사회생물학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가운데, 진화론은 그 과학적 객관성과 타당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경우 정치적, 인종주의적 목적으로 '악용'되어 왔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인종주의적 설명이 아닌 다른 과학적 분석으로 가능할까?
"왜 어떤 민족들은 다른 민족들의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왜 원주민들은 유라시아인들에 의해 도태되고 말았는가. 왜 각 대륙들마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 차이가 생겨났는가.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명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저자는 위 질문에 대해, 광범위하게 나타난 인류 역사의 경향을 실제로 만들어낸 환경적 요소들을 밝히려고 시도한다. 그는 뉴기니 원주민과 아메리카 원주민에서부터 현대 유럽인과 일본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인간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나간다.
이 책은 서구인들에게, 그리고 서구인들의 편견에 물들어 있는 한국인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인류가 아직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13,000년 전 석기 시대가 화석과 유물로 남겨놓은 흔적들을 분석하면, 그때부터 각 대륙에 살고 있던 인류 사회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중동지역), 중국, 중앙아메리카, 미국 동남부와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야생 동식물을 일찍부터 가축화.작물화한 사실은 그 지역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앞설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왜 밀과 옥수수, 소와 돼지, 그리고 현대의 주요 작물이 된 농작물과 가축들은 특정 지역에서만 작물화? 가축화되었을까? 저자는 그 원인이 관습도, 인종차도 아닌 환경임을 밝힌다. 다시 말해 기후와 지리, 위도, 강수량 등 환경이 대륙 간 인류 문명의 발달 속도 차이를 불러온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곳곳에 정착한 이후 서로 고립된 상태에서 수백 ~ 수천 년 간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 적응하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감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고 다른 양식의 생활과 정치사회 제도를 구성했던 것이다.

즉,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 다르게 전개된 것은 각 대륙의 민족 또는 인종이 인종적, 유전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인간종의 이동 과정과 각 대륙의 환경 및 조건의 차이에 맞게 적응해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환경에 적응해 왔던 인류의 문명이 상이하게 발달한 과정에서 특히 '총기'와 '병균'과 '금속'이라는 무기를 매개로 하여 역사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일단 수렵 채집 단계를 넘어서 농경을 하게 된 사회들은 문자와 기술, 정치제도(중앙집권),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사악한 병원균과 강력한 무기들도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러한 사회들은 질병과 무기의 도움으로 다른 민족들을 희생시키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했다. 지난 500여 년간 유럽인이 자행한 비유럽인 정복은 이러한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간 후 질병과 전쟁으로 95%의 원주민이 죽고 만 것이다. 일단 앞서게 된 유라시아 대륙은 지금도 세계를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책의 서두에 자신의 연구결과가 "과거의 대량학살을 미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닐 뿐더러 미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의 말에 회의가 든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류의 문명과 행위를 '생물학적 범위'로 분석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생물학적'이라는 설명은 다분히 인간의 의지나 집단적인 세계관의 반영이라기 보다 동물적인 또는 자연스러운 본능에 근거한 행위라는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식량생산과 인구의 증가, 그에 따른 중앙집권적 제도와 무기의 발달이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침략하거나 학살하는 근거로 제시했는데, 생물학적인 이유라 할 수 있으려면 침략한 민족이나 인종이 식량 부족 또는 거주지 부족 등과 같은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는 그렇다는 근거나 증거는 없다.

저자가 예로 든, 1835년 뉴질랜드 북부섬에 살던 마오리족 일부가 채텀 제도에 살고 있던 모리오리족을 공격하여 거의 멸족시킨 것은 환경과 조건의 차이가 아니었다.
저자는 두 종족의 차이를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와 잉여생산물에 의한 무노동 집단의 탄생, 그리고 높은 인구밀도로 영토와 식량을 둘러싼 경쟁에 익숙한 마오리족이, 낮은 인구밀도 조건에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위계질서가 약하고 싸울 줄 모르는 모리오리족을 공격하여 멸족시킨 것이다. 이것은 결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상황, 즉 생물학적인 전개과정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오히려 그러한 마오리족의 침략 행동은 말 그대로 '비인간적'인 행위이고 마오리족이 아직 '인간성'을 취득하고 계발하지 못한 짐승 수준의 제도와 문화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설명을 고려하더라도 마오리족은 높은 생산성에 근거하여 집단 내부에 잉여생산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다른 종족을 학살한 이유가 식량부족일 수는 없다. 더많은 잉여생산물과 권력, 그것을 위한 영토의 확장인 것이고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존중하지 못하는 문명상태, 즉 '필요'에서 벗어난 동물이지만 아직 '문명'이라 할 수 없는 경계상태의 인류가 '학살'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1532년 신성로마제국(스페인)의 피사로 군대 170여명이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8개월 동안 포로로 붙잡고 그의 군대 8만 여명을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집단 학살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성로마제국 사람이나 군대를 처음 접하는 잉카 제국의 황제와 잉카인들에게 피사로는 거짓말로 화해와 친선을 위한 만남을 제안(만남 전에 미리 공격 준비를 한다)했고, 스페인 군대에 소속된 기독교 수사는 기독교의 존재도 모르는 황제에게 성경을 강요하여 갈등을 유도했다. 피사로는 잉카 황제를 8개월 동안 볼모로 붙잡아 놓아 스페인으로부터 추가 파병할 시간을 벌었고 잉카 제국으로부터 엄청난 몸값을 받은 후 나중에 황제도 죽였다.
피사로와 기독교 수사는 잉카 제국을 공격한 이유를 "하느님과 그의 성스러운 신앙을 만민에게 알리기 위해"라고 주장다.
즉, 신성로마제국이 잉카제국을 학살한 이유는 진화생물학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인류가 동물에서 인간종으로 변화되는 가운데 과도기에 해당하는 '오만과 독선'이라는 '종교적 질병', 즉 인류의 정신적, 문화적 질병 중의 하나라고 분석해야 한다.(이러한 종교적 질병은 이슬람제국과 십자군전쟁에 이어 현대 사회에도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물론 더 오랜 기간을 살펴보면 유럽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무기의 수준, 유럽으로부터 전염병의 전파, 금속문화 등도 연관이 있다.
즉 저자는 "왜 스페인은 잉카 제국을 침략했는데 잉카 제국은 스페인을 침략하지 못했나?"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그 원인을 환경과 조건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총, 균, 쇠>라는 무기, 병균, 금속, 그리고 문자 등이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그리고 잉카 제국이 스페인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무기, 병균, 금속이 하나의 인간집단(종족, 민족)이 다른 집단(종족, 민족)을 공격할 때 승리하는 이유는 될 수 있지만, '공격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공격하고 정복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당하고 고의적인' 것이다.
만약 저자의 논리가 절대적인 진리라면 인류는 앞으로도 전쟁과 학살, 침략과 정복으로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따라서 스페인인들이 "종교의 전파"를 공식적인 공격과 점령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 의도는 더많은 권력과 부, 영토를 위한 식민지 확장이었고, 그것은 봉건귀족과 자본가들의 탐욕과 착취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 탐욕과 착취욕이 잉여생산물에 근거한 것인지. 잉여생산물에 기초한 착취계급과 그들 사이의 살인경쟁인지, 종교에 근거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 당시 유럽인들은 자신들은 고귀한 인간이고 다른 민족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나 노예로 생각했던 '미개인'이자 '짐승같은' 동물집단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20세기 들어서까지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 만명을 서로 죽였고 그 뒤에야 조금씩 '공존'과 '인간성'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도 전쟁과 증오에 불타는 미개한 종족이 미국과 이스라엘, 한국에 남아있지만...
오히려 처음 만나는 인간집단에게 호의를 보이고 친선을 도모한 아메리카 인디언과 잉카인들, 모리오리족과 다른 대륙의 민족, 종족들이야말로 수백 ~ 수천 년 전에 서유럽보다 먼저 '인간다운' 문화와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유럽은 자신들끼리 두 차례의 거대 살륙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민중들을 학살한 후인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비로소 공존과 공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여전히 인종 우월주의, 국가 우월주의에 사로잡히거나 금융자본과 군수자본 등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 갈등, 착취, 학살은 이루어지고 있다.

즉 저자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인간집단이 대를 거듭하면서 만들어 낸 정치사회 제도와 문화는 천양지차이지만, 다른 제도와 문화가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집단적으로 학살한다는 자연스러운 또는 과학적이거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환경와 조건에 적응하면서 각 인간집단이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내기 시작한 인류의 문명 또는 문화는 더 이상 진화생물학이라는 범주만으로 연구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류 문명의 역사적 발달 과정이 인종적, 유전적 차이가 아닌 환경과 조건에 따른 적응적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총, 균, 쇠, 정치제도, 문자'라는 요인만을 중심으로 문명을 분석하면서 서구의 제3세계 학살이라는 결과를 해석하려 하다가 오히려 서구의 학살을 일면 정당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독후감이다.

참고로, 이 책 개정판의 후면에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특별 증보면이 추가 수록되어 있어서 소개한다. 이 증보면에서 저자는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추적했다.
여기에서 저자는 유전적 분석, 각종 화석과 유물에 대한 분석 결과, 언어학적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일본의 현생 인류는 한반도 인류에서 확산된 결과이며 식량생산과 문자, 언어 역시 한반도에 기원을 둔 것임을 밝힌다.
세부사항은 블로그에 정리(http://blog.daum.net/hy2oxy/8691593)

[ 2013년 10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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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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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저, 최희봉 역 < 노동의 배신 Nickel and Dimed >를 읽고 / 2012. 06., 311쪽, 부키

"최저 임금을 받아서 과연 먹고살 수 있을까?"
"그들이 가난한 게 정말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이 책은 <긍정의 배신>으로 긍정주의 처세술과 긍정신학의 본질과 속셈을 고발했던 저자의 워킹 푸어(working poor, 근로 빈곤층) 생존기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에 걸쳐 미국 내 여러 개 주에서 자신이 직접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가정집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매장 직원 등으로 일하며 최저 임금 수준의 급여로 정말 살 수 있는지를 체험했다.(2012년 현재 미국 연방 정부의 최저 임금은 시간당 7.25달러)

처음 저자의 목표는 단순했다. 일을 구하고 그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음식을 사고 잠자리를 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목표를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직업,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부터 감정과 존엄성을 말살하는 노동 환경, 영양은 커녕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조차 섭취하지 못하는 식생활, 부자들이 집값을 올려놓은 탓에 싸구려 모텔과 트레일러 주택을 전전하며 점점 더 외곽으로 쫓겨나는 주거 실태, 가난하기에 돈이 더 많이 들고 그래서 더 일해야 하고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쳇바퀴까지, 저임금 노동자들을 옥죄는 생활의 굴레를 저자 특유의 위트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미국사회의 중산층 이하 계층의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지 생생하게 말해준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함께. 도시기반시설 차이만 없다면 21세기 미국사회의 속살은 20세기 초 시카고 도시민의 지옥같은 삶을 보여준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더욱 심각한 생각이 들도록 한 것도 있다. 저자가 저임금 체험을 할 당시, 미국은 성장은 지속되면서 물가는 안정된 이른바 '골디락스 경제'에 한껏 취해 있었다.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대다수 임금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하락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집값과 주가 상승 등 자산 거품이 빚어내는 '부의 효과'에 흥청거렸다.
그런 경제 상황이었음에도 당시 미국 내 시간제 노동자의 생존이 '워킹 푸어'라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 내 저임금 노동자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 정부는 세계적인 군사패권전략과 군산복합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다. 중동에서의 전쟁,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훈련, 무지막지한 군사비의 유지가 과연 미국 내 중산층 이하 국민들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지...

참고로, '노동의 배신'이라는 한국어판 제목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노동에 '배신'당하는 워킹 푸어의 역설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원제인 'Nickel and Dimed' 역시 '야금야금 빼앗기다', '매우 적은 돈을 쓰다'라는 두 가지 뜻으로, 푼돈조차 아껴 쓸 수밖에 없으며 가난하기에 오히려 돈이 더 드는 워킹 푸어의 생활을 보여 주는 말이다. 
출판사는 이 책이 15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예일대 등 미국 600여 개 대학의 필독서로 지정된, 온몸을 던져 신자유주의 시대의 빈곤 문제를 다룬 '현대의 고전'이라 평가받는다고 소개한다.

사실 전례 없는 호황이라던 그때, 노동 인구의 30퍼센트가 생활이 가능한 수입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당 8달러 이하의 임금을 받았고(1998년), 최저 임금은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시간당 5.15달러에 멈춰 있었다. 다만 거품에 취해 있던 대다수의 미국인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깊어지는 풍요의 그늘'을 외면했을 뿐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에런라이크는 빈곤층의 열악한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그들이 결코 게으르거나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게 아님을, 그들의 빈곤이 중산층의 안락함의 토대임을 섬뜩할 만큼 몸으로 보여 주었기에 미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5월 초판이 나오자마자 책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생활 임금 운동의 큰 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29개 주가 최저 임금을 인상했고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생활 임금을 지급하라는 법령이 통과됐다. 마침내 2007년 7월에는 연방 정부가 최저 임금을 인상하기에 이른다. 

저자가 처음 맞닥뜨린 저임금 일은 식당 웨이트리스였다. 일을 더 잘하고 싶고 손님들을 잘 돌보고 싶다는 고차원적인 '아가페', 혹은 서비스 윤리는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에 지쳐 어느새 사라진다. 손님들이 적으로 보이는 웨이트리스 일에 필요한 것은 '생각하지 말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니까. 게다가 컴퓨터 터치스크린으로 하는 주문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고 끊임없이 쓸고, 닦고, 썰고, 붓고, 채우는 '잡일'도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체험한 청소 용역 회사의 파견 청소부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반복되는 일이다. 집 안 곳곳의 먼지를 털고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등에 진 채 청소하고 무릎을 꿇어 바닥을 닦고 똥 묻은 변기와 욕조의 체모까지 치워야 한다.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고 곳곳이 아프기 마련. 부상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지만 치료는커녕 마음 편히 쉬기도 어렵다. 가려움증 때문에 나병 환자 같은 몰골이 된 저자에게 사장은 '아무 문제없다'며 일하러 가라고 떠민다. 값싼 진통제나 담배, 술 한 잔에 의존하거나 대부분은 그냥 참는 것으로 버틴다. 
마지막으로 체험한 월마트 매장 일은 '단순노동'. 저자는 숙녀복 매장에 배치돼 손님들이 어질러 놓고 간 옷을 정리하고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이 할 수 있고, 자폐증이 있으면 오히려 더 유리할 것 같은 그런 일이다. 그러나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만큼 양이 많다. 게다가 3일마다 한 번씩 매장 배치가 바뀌는 탓에 그때마다 자리 배치를 다시 외워야 한다. 저자는 근무 시간 초반에 친절한 '지킬 박사'였다가도 끊임없이 옷가지를 헤쳐 놓는 손님들에 지쳐 이내 '하이드'로 폭발하고 만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다. 특히 지배인, 매니저 등 관리자들의 비인간적인 관리 방식이 노동자들을 가장 괴롭힌다. 이를테면 웨이트리스들은 마치 중학생처럼 식당 한쪽에 서서 지배인에게 야단을 맞고, 평소에는 한시도 쉬지 못하게 감시를 받는다. 
청소부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유니폼 자체가 이미 '죄수복'이다. 노란색과 녹색의 요란스런 색깔로 어디서든 존재를 노출시킨다. 집주인들은 청소부들을 늘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한다. 귀중품 옆에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카펫 밑에는 먼지 덩어리가 숨겨져 있다.
무엇보다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에게조차 따돌림당하는 현실은 가슴 아프다. 워킹 푸어의 세계에서는 청소부가 최하층에 자리한 '불가촉천민'인 셈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착취'하는 사장의 인정에 과도하게 매달리게 된다. 아무리 깨끗이 청소해도 누구 하나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면? 사장의 인정이 내 존재 가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거대 기업인 월마트 역시 다를 바 없다. 입사할 때는 하루 종일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동료'라는 말로 다독이고, '우리들이 월마트를 월등하게 만든다'고 추켜세우지만, 그것 역시 직원들을 '길들이는' 과정일 뿐이다. 

처음 저임금 체험에 뛰어들었을 때, 저자는 복지 개혁론자들이 주장하듯 최저 임금을 받는 일자리로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겐 '특별한 절약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가난하기에 돈이 더 드는 상황에 수시로 맞닥뜨렸다.
아파트를 구할 때 필요한 한 달치 집세와 한 달 집세에 상응하는 보증금이 없으면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엄청난 방세를 내야 한다. 조리 기구가 없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면 콩 스튜 같은 걸 미리 요리해 놓고 냉동시켜 먹을 수는 없다. 주로 웬디스나 맥도날드에서 패스트푸드를 먹거나 편의점에서 즉석 식품을 사 먹어야 한다. 의료보험에 들 형편이 안 되니 정기 검진을 받을 수 없고, 처방전이 필요한 약도 살 수 없고, 결국에는 약을 구하지 못해 일을 오래 쉬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2000년, 보스턴에 있는 고용 문제 연구소 '미래의 직업(Jobs for the Future)'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94퍼센트가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을 빈곤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 만큼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풀타임으로, 때로는 두 가지 일을 해도 더 가난해지고 빚만 늘어 가는 워킹 푸어의 수는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2010년에는 미국의 노동 인구 중 7.2퍼센트인 1,050만 명이 워킹 푸어로 집계돼 2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이미 2008년에 전체 노동 인구의 11.6퍼센트인 270만 명이 워킹 푸어로 조사됐고, 최근에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빈곤층이 더욱 늘어나는 데 따라 그들을 백안시하는 문화도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 가난은 거의 범죄가 되었다. 법조차 빈민을 차별한다. 콜로라도 주 그랜드정션의 시 의회는 구걸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논의 중이고, 애리조나 주의 템페에서는 2011년 6월 말에 나흘 동안 극빈자를 단속했다. 또 가난한 사람이 무단 횡단을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가벼운 범법 행위만 해도 필요 이상으로 단속하는 추세다.

일을 해도, 아니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극심한 불평등을 단지 1퍼센트의 탐욕 때문이라고 간단히 결론짓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도끼를 내리친다. 우리의 안락함이 바로 이들의 희생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에런라이크는 우리의 특권과 그들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고 '이 사태에 당신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고 물으며 독자에게 인식의 확장은 물론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절절히 호소한다. 수백만 워킹 푸어가 겪는 빈곤을 '응급 상황'으로 받아들여 이를 개선하자고 외친다. 임금을 올리고, 그들을 범죄자 취급하지 말고, 그들이 조직을 결성해 더 나은 임금과 노동환경을 얻어내도록 하자고 말한다. 무엇보다 넘어져 있는 그들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원칙이라도 필요하다는 호소에는 평소 누구보다 앞장서 사회 운동을 활발히 펼쳐 온 에런라이크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저자의 경험은 불과 십 몇 년전 미국사회의 모습이지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전혀 미국같지가 않았다. 저자의 노동 경험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심각하게 사회문제가 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박근혜 정권이 올해 집권 초기에 선언한 '시간제 노동'이 자리잡은 미국 본토의 현실이다. 과연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그런 '시간제 노동'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려는 정책을 수립한 것인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친미와 종미 사대주의의 필연적인 방향인지 우려스럽다. 
그렇다면 새누리당의 실세 김무성의 주장처럼 새누리당이 한두 번만 더 집권하면 충분히 한국사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로도 제대로 된 식사, 휴식, 휴가, 의료, 교육, 주거를 보장받지 못하는 한국사회는 저자의 경험이 오히려 덜 고통스러울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이미 한국사회 밑바닥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시간제 노동으로 워킹 푸어의 삶을 사는 이들이 무수히 숨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한국 내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가정집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매장 직원 등의 이름으로 스쳐 지나가는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삶과 고민과 고통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는 이 책과 저자를 통해 한국 내 대학교수들과 지식인, 언론인들의 게으름과 안일함 그리고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싶다. 정부, 정당, 기관들은 그냥 재벌과 기득권층의 하수인이라 지탄하고 청산해야할 집단이라 간주하더라도...

○ 인상 깊은 문장 :

- "허스사이드에서 며칠 일하면서 나는 수유 호르몬인 옥시토신 주사를 한 방 맞은 것처럼 온몸이 서비스 정신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고객은 힘든 노동을 하는 지역 주민들이었다. 트럭 운전사, 건설 현장 노동자, 심지어는 식당이 속해 있는 호텔에서 일하는 청소부들도 왔다. 지저분한 환경이 허락하는 한, 나는 그들에게 '고급스런' 식사에 가장 근접한 식사를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손님에게는 '당신'이라고 하지 않고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선생님'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아이스티와 커피를 계속 채워 주는 한편 손님들이 식사하는 도중에 다가가서 음식이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샐러드를 시키면 잘게 썬 생버섯이나 여름 호박 조각, 또는 냉장창고 안에서 곰팡이가 피지 않은 야채를 뭐든 찾아 예쁘게 썰어 위에 얹어 내갔다." ('1장 가난하기에 돈이 더 든다' 중에서/ p.36)

-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페트를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2장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중에서/ p.129)

- "예를 들어 똥에 대해 얘기해 보자. 청소부에게 똥은 피할 수 없는 일의 한 부분이다. 청소부가 되어 처음으로 똥 묻은 변기와 대면했을 때 나는 누군가와 원치 않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어떤 통통한 엉덩이가 이 변기에 앉아 힘을 주었고 나는 여기서 그걸 치우고 있구나." ('2장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중에서/ pp.130~131)

- "6시가 지나 멜리사와 엘리가 퇴근하고 나면, 그리고 9시에 이사벨까지 퇴근하고 나면 그때부터 매장은 '내 것'이 되었다. 저리 비켜요, 샘. 여기는 이제 바브-마트(Barb-Mart)라고요. 카트를 끌고 매장 둘레를 시찰하다 제자리에 있지 않거나 떨어져 있는 상품을 보면 얼른 뛰어가서 줍고 모든 것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탁 치면서 제자리에 놓았다. 똑바로 걸려 있어, 차려 자세로. 아니면 선반에 정연하게 엎드려 있어. 이런 마음 상태가 되면 고객이 상품을 들추고 다니며 매장을 건드리는 게 보기 싫어졌다. 사실은 상품이 팔린다는 개념 자체가 싫었다. 원래의 집에서 뿌리가 뽑혀 상태가 어떤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옷장 안으로 내 옷이 빨려 들어간다는 게 정말 싫었다. 여성복 매장을 거대한 플라스틱 거품 안에 넣어 소매상점들에 관한 역사박물관 같은 어디 안전한 곳에 잘 보관했으면." ('3장 '동료'라는 이름의 노예' 중에서/ p.226)

- "바로 그 순간에 나와 함께 휴게실에 있던 여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텔레비전을 향해 주먹 쥔 팔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빠르게 두 검지를 아래로 향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여기! 우리들!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어요!"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와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당연하죠, 젠장!"이라고 말했다. 발이 너무 아파서 그랬는지 그녀가 '젠장'이라고 욕을 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 휴식 시간을 훌쩍 넘기고 아마도 그녀의 휴식 시간도 지날 때까지 우리는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딸 얘기, 계속 장시간 근무를 하느라 딸과 함께하는 시간을 한 번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얘기, 그리고 아무리 일하고 벌어도 저축할 엄두도 못 내는데 이렇게 일만 하면 뭐 하느냐는 얘기…. 나는 지금도, 만약 월마트에서 조금만 더 일했더라면 그녀와 둘이서 뭔가를 해냈을 거라고 생각한다." ('3장 '동료'라는 이름의 노예' 중에서/ p.257)

[ 2013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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