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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평전 - 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평점 :
추천 [서평] 이원규 저 <조봉암 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를 읽고 / 2013. 03., 한길사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에 기생하고 친일파와 손을 잡은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살자이자 독재 정권일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이승만 정권에게 1959년 사법살인을 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일대기에 대한 평전이다.
2011년 대법원에서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열어 무죄를 확정하였고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고 있으며 추모비 건립도 이루어졌다.
이 책을 통해 죽산 조봉암의 생애는 많은 부분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죽산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죽산에게 불리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조차 있는 그대로 평전 속에 담고자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는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다.
나는 이 평전을 통해 상당 부분 죽산애 대한 오해나 편견을 재거할 수 있었으며, 죽산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청년시절과 한국전쟁 후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세력이 전멸된 상황에서 순수하게 반독재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노력을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다만, 2011년 이후 한국사회에 나타난 죽산에 대한 평가 역시 이 평전을 통해 필요 이상의 거품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책을 통해 본 조봉암의 생애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격변을 온 몸으로 겪은 듯 파란만장했다. 저자가 세세하게 기술한 그의 생애를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조봉암은 1899년 일제강점 직전 강화도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났고 정규학력은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저자는 그가 어린 시절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등으로 일했으나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했다고 평가한다. 고학으로 세이소쿠영어학교와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잠시 수학하기도 했다.
조봉암은 강화도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이 됐으며, 모스크바 공산대학과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일제에 의해 체포당해 7년간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했다.
조봉암은 국회부의장을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이나 차점 낙선을 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그가 선택했던 공산주의가 전향한 뒤에도 원죄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국가변란과 간첩죄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그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사법살인을 당한 것은 2011년 사법부의 판결을 통해 법적으로 사면, 복권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것은 역사적, 정치적 재평가일 것이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저자가 조봉암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서 중요하게 검토한 부분은 두 가지인데 죽산이 일제시대에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고 전향한 이유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기여한 점이다.
저자는 조봉암의 과거 진술을 빌어 일제시대에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의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해방 후 그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우익으로 전향한 이유는 "8.15광복 후 좌익계의 권력욕이 국가를 위해 옳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죽산이 진행한 농지개혁에 대해 "조봉암 덕분에 한국은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으며,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던 당시에 토지 균등성이란 모두에게 잘살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나는 저자가 제기하는 두 가지 사안에 대한 평가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다소 비판적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1~2년 고학을 하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을 읽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1~2년 공부했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제3자가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죽산의 말처럼 일제강점기의 세계사적 사상의 조류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이 제국주의가 되어 조선과 같은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고 독립을 가로막았으니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에 우호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소련이 국가적 이념으로 내세웠던 공산주의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된다.
죽산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우익으로 전향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죽산은 1920년 후반 상해에서 여자문제와 공금횡령, 보신주의 등의 문제를 일으켜 박헌영뿐 아니라 여운형에게도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신의주 교도소에서 출감(교도소 내에서 항일운동을 포기했다는 의혹은 차치하고도)한 이후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 좌익진영에게 제대로 소명하거나 공식적인 징계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좌익진영에서 배제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 방첩대에 체포되어 전향공작을 받는 과정에서 전향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그의 전향 이유를 그의 말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우익으로 전향했다고 하여 당시 대표적인 우익이던 김구나 김규식에게 인정받지도 못했다. 일제 말부터 죽산이 보인 행보는 전향이라기 보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꺽고 일신의 영달과 출세로 나아간 듯 하다.
저자가 두 번째로 중요하게 평가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도 인정하기 어렵다.
일단 무소속 의원인 죽산이 혼자 농지개혁안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어불성설이지만, 죽산이 마련했다는 농지개혁안은 '150% 유상몰수와 120% 유상분배'였는데 일제 강점기 수탈당할대로 당한 소작농 중에서 그러한 조건을 받을 수 있는 소작농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겉으로 나타난 통계 역시 지주들이 저지른 각종 탈법,불법 행위를 고려하면 액면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죽산의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시행되지 못했고 결국 한국전쟁 이후 시작되었다. 즉,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는 저자의 평가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한국전쟁 중 남한을 점령한 북한은 짧은 기간이나마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평전을 통해 알게 된 죽산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2차 조선공산당이 일제로부터 탄압받은 후 3차 공산당 재건과 항일투쟁을 위해 상해에서 다수의 좌익 운동가들이 국내에 들어갔는데 죽산은 이를 회피했다. 죽산에게 나타나기 시작한 많은 문제들이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여자문제, 공금문제, 일제협력문제, 전향문제까지.(역으로 왜 여운형과 박헌영은 조봉암을 비판적으로 포용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아쉬움과 궁금증이 남는다.)
둘째, 김이옥 등 죽산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다. 죽산은 정식 결혼한 부인을 제외하고 평생을 걸쳐 김이옥을 비롯해 3명의 내연녀(?)를 두었다. 당시의 상황이 봉건적인 신분질서나 문화가 완전히 변하지 않은 상황이고 여러가지 사정과 조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존중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특이한 점은 죽산이 매번 새로운 여성들과 관계가 발생하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죽산의 정치적 입지가 아주 나빠졌을 때였다. 상해에서도 그랬고, 해방 후 정치적 입지가 나빠졌을 때 그리고 한국전쟁 후 또 정치적 입지가 나빠졌을 때 그랬다.
셋째,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다. 죽산은 상해에서 모플자금이라는 공금에 손을 댔다. 그리고 신의주 교도소에서 출감한 후 인천지역에서 일제에 협력하고 있던 경제인들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그는 해방 뒤 정치계에 입문한 후 미군정에게 정치자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친일 지주와 자본가들에게서도 정치자금을 받았다.
평전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의혹도 몇 가지 있다.
1. 일제에게 상해에서 붙잡혀 신의주 교도소에 수감된 죽산은 7년 만기를 채우지 않고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일제가 신의주 교도소내 항일투사들의 성향을 기록한 문서에서 죽산은 전향한 그룹에도 전향을 거부한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일제가 전행공작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위키백과의 설명과 달리 죽산은 교도소를 출감한 후 1945년 1월 일제에 의해 예비검속 차원에서 구금될 때까지 항일투쟁 자체를 포기하면서 생계만 꾸렸다. 참고로 일제가 가장 극성을 부린 시점이자 친일파와 변절자가 가장 많이 나타난 시점이 짧게는 1941년부터였고 길게는 1937년부터였다.
3. 평전에 의하면 그는 해방 후 여운형이 최선을 다해 믿고 지지해주었으나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으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에 일찌감치 합류했고,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주독립, 단정반대 세력이 불참한 1948년 5.10 단독선거에 참여했다.
4. 한국전쟁 중 이승만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저지른 폭력사태였던 '부산 정치파동'에서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저자는 이때 미군정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죽산은 이처럼 이승만 정권에 대해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중반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산이 이승만으로부터 사법살인을 당한 것은 저자가 말한 '과거 공산주의 활동이 빌미'가 된 것이 아니라 해방 후부터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협조해 오던 죽산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자 미국과 이승만에게 제거해야할 대상이 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오히려 죽산과 진보당이 탄압받을 당시 같은 야당이고 친일 보수세력인 민주당 등이 정치적인 유불리로 진보당 탄압과 죽산의 살인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1959년 당 강령과 국가변란 혐의로 죽산의 진보당이 등록 취소되고 조봉암 당수가 사형 판결을 받은 것과 2013년 이석기 의원 등이 내란음모 조작으로 구속되고 강령 등의 이유로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비슷한 배경과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민주당 등 야당과 소위 진보진영이라는 이들의 행태까지도...
죽산의 생애 중 정치사상적인 면에 대한 나의 평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출세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패배"다. 죽산은 젊은 시절 "설득의 천재, 조직의 명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똑똑하고 달변이었다. 그래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일찍 높은 직책과 역할을 책임졌다. 그만큼 포부가 컸고 직책과 역할에서 밀려났을 때 좌절에 따른 실망도 컸음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평전 중에 "나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라는 죽산의 말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죽산의 생애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두 가지다. 출세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실패하고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출세주의는 분파와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이고 엘리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포기하면 변절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일상생활도 그렇지만 특히 정치사회 운동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야 만이 많은 약점과 어려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이다.
참고로 평전에서 옮기고 싶은 조봉암의 발언은 두 가지다.
그는 1956년 11월 진보당 창당 개회사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2014년 한국사회에서 죽산 진보당의 강령과 비슷한 수준은 통합진보당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죽산이 남긴 유언 중에도 있다.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사람이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 2014년 1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