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김갑수 외 지음 / 615(육일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이시우, 이병창, 손우정, 김갑수 등 공저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를 읽고 / 2013. 11., 245쪽, 615출판사


지난 8월 28일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한국사회에 내던져진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

모든 언론을 떠들석 난리를 떨며 시작된 이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만4개월이 지났고, 작년 11월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지난 2개월 간 진행된 법정 공판에서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증거 채택 여부와 공소 적절성 등을 다투었고, 그 결과 녹취파일 원본의 상당수가 훼손되거나 제대로 증거로서 적법성이 상실당했으며, 당시의 녹취록에서 제기한 주요 문장과 맥락이 270여 곳 이상 조작, 변조되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제보자로 불리는 프락치의 증언을 통해 'R.O'라는 존재 자체가 추측과 망상에 근거했다는 것도 재판을 통해 대부분 드러났다.
처음부터 국정원과 검찰의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무리한 수사와 기소였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http://blog.daum.net/hy2oxy/8691760)

이 책은 재판이 공식적으로 진행되기 직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녹취록이나 내란음모의 팩트 또는 진실에 대해 명확한 근거나 팩트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국정원이 언론에 흘리면서 시작된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언론과 정치권에서 구체적인 근거나 논리적인 사실취재보다 국정원이 흘려주는 '카더라'식 정보를 마구잡이로 확대재생산하면서 마녀사냥식 언론재판을 벌이는 것에 대해 저자들이 대응하기 위해 서둘러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국정원이나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내세우는 논리나 주장에 대한 비판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책에 담긴 세 명의 공저자의 글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다. 바로 김준식 작가와 이시우 작가, 그리고 이병창 교수다.(물론 다른 분들의 글 역시 큰 도움이 되며 한꺼번에 대할 수 있는 장점도 책을 구입한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하다..^^)
세 명은 작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 때에도 사실관계를 근거로 사태를 바라보는 식견과  언론과 지식인 그룹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여론몰이가 어떤 토대에서 발생하는지 철학적, 심리적, 사회학적, 논리적 식견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즉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을 뜨게 한 것이다.
특히 이병창 교수의 사이비 언론인에 대한 비판은 냉엄하고도 준열했다.(http://blog.daum.net/hy2oxy/8691761)

 


8월 말 이후 한 달 가까이 모든 언론에서 국정원이 흘린 녹취록과 각종 수사 정보를 받아쓰기 하면서 크게 다루었다. 그 결과 이석기 의원과 구속된 진보당 당원들은 하루아침에 '국가 중대 범죄자'로 마녀가 되었고, 박근혜 정권은 이를 근거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을 헌재에 청구했다.
명색이 진보언론이나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글이 고작 당시의 당국의 발표나 언론보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견과 추측에 기반한 혐오스러운 표현들, 진영논리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정치적 마타도어, 중립이나 중도를 내세우며 날을 세우는 양비론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작년에 이어 다시 한 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말 언론보도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당시 경악하고 흥분하며 핏대를 올리고 조롱하던 많은 이들이 머쓱해져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전제로 내세웠던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자체가 사실이 아님을 국정원이 스스로 인정해 버렸고, 언론과 종편에 도배되었던 수많은 선정적 보도들 역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물론, 사실관계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여전히 종편이나 조중동만 읽으면 결코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이전에 접했던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 의도된 조작이고 편집이었음을 안다면, 그런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누군가를 공격했고 종북몰이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알았다면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지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굳이 공개적으로 자기비판할 것까지는 필요한 게 아니라...(특히 얼토당토 않은 시리즈 인터뷰를 연재한 오마이뉴스와 시리즈 연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한 권영길, 주대환, 조승수, 김창수, 이진경, 김기식... 김영환은 기대도 하지 않음..ㅋ)

몇 년째 내가 고민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중 하나가 소위 진보진영의 분열과 비이성과 비겁함이었다. 사상의 자유(주의)니, 민주주의니, 사회민주주의니, 인민주권이니 하는 고상한 담론들이 현실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한 때는 그런 철학적, 정치적 용어들이 경멸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김준식, 이시우 작가, 이병창 교수의 글이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실, 사건사고 속에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정치적 언행과 철학적 연관성 등을 연결시켜 보는 관점과 기준을 제시해주었고 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다시 한 번 도움이 되었다.

* 인상 깊은 문장 :

"이렇게 글과 문장이 악의적으로 쓰이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는 작가들에게서 일제시대 친일작가와 지식인의 잔영을 본다. 아니, 조중동 등 거대언론에 순치된 우리 문단의 구조적인 모순과 나약함을 다시금 절감한다. 지금 국정원과 박정권이 문장 조작으로 범죄를 만들고 있는 것, 이건 단순히 녹취록이나 기소문 등 실용문을 작성하는 일상적 차원으로 볼 수 없다.
그 안에는 우리말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과정이 있으며, 이후 그런 방식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려는 저의가 담겨 있다. 더구나 저들은 논리적 추론만으로 사람을 범죄로 몰고 압살하려한다. 그런데도 글을 다루며 산다는 사람들이 이토록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건 분명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 자제력은 아닐 것이다."(p.112)

“진보적이고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현상에 압도되어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매카시즘의 노예들과 별 차이가 없다.” 김대규(서울 디지털대 교수, 법학)

“결국 이들은 사회적 약자였고, 평균적 국민들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먼저 느끼고 울음을 터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준식(소설가)

“어마어마한 사건의 증거는 달랑 내부 협력자, 즉 프락치가 구해준 정체불명의 녹취록이 전부였다. 그만큼 남재준 원장은 다급했던 것일까?” 문경환(‘동북아의 문’ 대표)

“‘헌법 밖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라는 식의 요상한 말들은 스스로 체제의 안전한 공간에 둥지를 틀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손우정(시사평론가)

“일단 주체사상이 대한민국에서 금지된 것이라고 하자. 지금 진보당 안에서 주체사상이 공적으로 표현되는가? 진보당의 어디에서도 그런 조짐은 발견할 수 없다.”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철학)

“우리 역사에서도 법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기각했지만 전두환의 내란죄는 확정했다. 자유국가가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반혁명세력이다. 진정 자유로운 국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혁명하라.” 이시우(사진작가)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도 설마 뭔가 했으니까 구속된 거 아니냐고. 국정원이 언론을 동원해 엄청난 여론몰이를 해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임이화(구속자 가족)

[ 2014년 1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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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제국
김민웅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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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김민웅 저 <밀실의 제국 : 제국 수호의 메카니즘>을 읽고 / 2003. 03., 350쪽, 한겨레출판


그동안 김민웅 교수는 '좌파 목회자'이자 '좌파 지식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좌파'라는 단어는 "서양(서구)의 사상을 동양이나 한국사회의 역사, 문화,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직수입하는 '교조주의 또는 사대주의 사조'"라는 편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를 종합하면, "저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내 관심의 정도였다. 최근 1~2년 사이 한국사회 내 진보진영 사이에 횡행하였던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맹목적 반북 이데올로기나 마녀사냥에 동참"한 것과 관계없이...

그런데 올해(2012년) 가을 쯤 그가 '겨레하나'라는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 단체의 대표직을 수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자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언론에 기고했거나 인터뷰했던 기사를 찾아보았고, 그의 입장이나 논리가 담겨 있을 만한 책을 구해보았다.
이 책은 그런 이유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김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을 예정이다.(물론, 박세길 교수처럼 어떤 이론이나 생각을 책으로 발간했어도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생각이 바뀌거나 전혀 다른 정치사상적 입장으로 변경(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때는 2003년 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초창기에 군사, 외교, 남북관계에 대한 정책의 차이로 한-미관계가 악화되고, 부시 정권이 대 이라크 전쟁을 종료한 직후 곧바로 북한을 겨냥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인 학자가 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중요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의 요지는 여는글의 제목인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를 거부하며"라 할 수 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는데,

먼저, 저자는 미국의 군사팽창주의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관철되며, 힘을 갖는지 살펴보고 당시 미국이 보이고 있는 여러 행태를 '전쟁국가의 강화'라고 규정한다. 전쟁은 제국(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적을 만들어내고 국가 위기를 조장하면서 제국이 성장한다고 보고 있다. 
제1부 '제국의 역습'에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이 밀어붙이는 '대테러 전쟁'의 본질을 분석하여 '전쟁국가'와 '제국주의적 세계화'임을 고발한다. 
제2부 '제국의 밀실'에서는 CIA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지배층의 정치공작의 역사, '펜타곤 자본주의'의 실상, 전쟁국가에 복무하는 언론의 폐해 등에 다루면서 '위기를 파는 자들'에 대해 분석한다.
제3부 '제국의 대변자들'에서는 제국주의 세계화에 기생하는 미국 내 지식인들의 가면을 벗기고, 서방 언론의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대변하는 각종 매체와 인물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미국 내부에서 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활약을 소개한다.

이에 저자는 남한이 주도하여 민족공멸을 막고 한반도 민족화해와 평화정착이라는 대의를 실현시킴으로서 미국이라는 제국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북한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설정이 관건이라는 것 등을 말하고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에 대해 결론짓고 있다.
제4부 '제국의 논리와 본심'에서는 한미 관계라는 '동맹의 허상'을 드러내고,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본심이 '남북간 결속 강화 저지'라는 것을 지적한다. 결국 '한미동맹'이라는 허울 속에 가려진 식민지 체제의 극복이 남한이 가야할 방향임을 천명한다.
제5부 '아메리카 제국이 폭력, 우리의 평화'에서는 북미 제네바 합의를 부시정권과 네오콘이 무시하고 북한에 대한 봉쇄정책으로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미국에 대한 '역봉쇄전략'을 구사해야 만이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능함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최종 통일방안은 '영세중립화'다.

미국의 각종 정책과 전략을 분석하여 '팍스아메리카나'의 본질을 파헤치고 미국의 전략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미국에 대한 '역봉쇄전략'과 '영세중립화 통일'이라는 결론을 제시하는 저자의 논리는 전체적으로 합리적이라 느껴지고 공감이 된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사실 관계와 정보에 대한 근거와 출처가 명시되지 않아 이 책을 토대로 다른 곳에서 사람들과 논의하거나 논리를 제시할 때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실제로 대이라크 정책은 원유 확보라는 숨겨진, 그러나 공공연한 목적을 향한 제국주의적 점령정책이 그 본질이다. 서방 국가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침묵하거나 협조하는 이유는 전쟁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다."(p.51)

"미국에 대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라. ... 결국 초강대국 미국의 힘 앞에서 우리 자신의 패배주의적 식민지 근성을 척결하고 자주적 처신을 견고하게 갖추어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평화의 길이다. 우리에게 평화는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하지 않는 한 확보되기 어렵다. ... 우리 민족을 지난 반세기 이상 미국의 식민지적 상황에 처하게 하고 민족 내부의 분단과 적대관계를 심하시켜 온 일체의 종속적 냉전체제를 극복하는 데 역량을 총결집해야 할 것이다."(p.73)

"그런 점에서 향후 한국 정치개혁의 본질적 요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놓인 식민지 정치를 청산하고, 이에 기초한 일체의 지역분열주의 내지 지역패권주의를 격파하며, 미국의 패권전략에 민족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사대주의적 냉전 특권세력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가운데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자주적, 민주적, 평화적 토대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 알게 모르게 장치된 미국의 지배질서를 하나하나 해체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중차대한 일차적 과제다. 그러써 지난 100년간 우리를 옭아맨 제국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을 완결짓기 위한 결의에 찬 행보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p.74)

"이들 CPD(Commottee on the Present Danger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대응위원회) 세력의 압력 아래 카터 정권은 임기 말년에 강경한 군사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이른바 혁명 예방적 조치로 한국의 1979년 말과 1980년 5월 정세에 개입하지만, 레이건에 패배함으로써 CPD 재등장의 길을 열게 된다."(p.114)

"1942년 6월 루스벨트가 설치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비밀공작국)는 한국 현대사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이 이승만의 정치적 부상과 OSS와의 관계다. ... OSS에서 도노번의 작전부 참모로 있던 프레스턴 굿펠로우 중령은 이승만을 환대했고, 이승만은 그의 소개로 전쟁성으로부터 조선인 출신 OSS 요원 충원작업의 권한을 얻어 워싱턴 내 정치적 입지가 급상승하게 된다. 해방공간에 귀국하여 추구하게 될 친미 정치노선을 다지는 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p.122)

"1980년 전두환 체제가 등장하자 레이건은 즉각 F-16 전투기 36대를 한국에 판매했으며, 100만 달러에 달하는 최루 가스와 경찰용 소총 판매를 허가했다. 이 기간 중에 발생한 노스럽 사의 로비 자금 추문은 바로 군부의 무기구입 증가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미국에 의한 한국의 무장국가 체계 강화과정의 산물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미 군수산업의 최대 시장의 하나가 되고 있으며, 엄청난 민족자원을 비생산적으로 탕진하고 있다."(p.149)

"<AP통신>이 타전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과 최근 또다시 <AP통신>이 전세계에 타전한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 공군이 저지른 민간인 폭격도 모두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중대한 전쟁범죄 행위이므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분명한 논란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유고를 공습한 더 본질적인 이유가 발칸반도 지역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야기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기를 든 신유고 정부에 대한 통제와 이 지역의 군사적 장악에 있었다는 측면에 주목하면, 미국과 나토가 최우선 보호대상인 민간인들의 생명을 경우에 따라 희생시킨 것은 미국의 정책논리상 모순이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한국전 때도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롭게 확보한 자신의 식민지체제 방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민간인들의 생명은 일차적인 배려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약소국들의 현지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p.185)

"<뉴욕타임즈>의 기사에서 새롭게 조명된 부분은 한국에서 자본시장 자유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대목이다. 미국이 김영삼 정권하의 한국정부에서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수용할 경우 서방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당시 한국정부는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절차를 밟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 내 금융시장이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도 않은 채 단기성 자본의 이동을 허용함으로써 일거에 자본이 대규모로 투입되었다가 한꺼번에 빠져나갈 경우 외환위기가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토대를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갑자기 급증한 단자회사들이 이러한 자본시장의 자유화 정책을 타고 생겨난 투기자본의 공급처가 된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난 시절 겪은 외환위기에는 정책 선택상의 문제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 자체의 문제도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p.194)

"미국이 패권정책은 언제나 대상 국가 내부에서 적극적인 동조자를 물색하고 그를 권력의 정점에 세우기 위한 정치공작에 몰두한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지난 반세기의 미국 대외정책사가 고스란히 입증하고 있다. 부시 정권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그러한 각도에서 제국의 대본영과 식민지체제의 하부구조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나라당과 그 지지세력의 집권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p.228)

"우리의 현대사적 진실은 해방의 진정한 성과물을 몰수당한 채 미국의 식민지 체제로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극복의 단서를 포착하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제국주의 패권체제의 질곡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다."(p.256)

"결론적으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며 우리는 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 놓인 식민지라는 사실, 이러한 식민지적 주종관계를 청산하기 전까지는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언제나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의 제1차적 과제는 따라서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족해방투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이미 낡아버린 구호가 아니다. 엄연하고 절박한 현실인 것이다."(p.270)

[ 2012년 12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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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7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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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 2013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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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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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나름대로 선정한 책 중에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시리즈, <대한민국사(한홍구)> 시리즈, <우리역사 이야기(조성오)> 시리즈,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 이어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시리즈를 읽었다.
여러 국내 저서 중에서 강준만 교수의 저서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다른 저서를 통해 내가 인정했던, 자료와 정보수집 능력 등을 고려한 것이고,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중도'적 관점에서 현대사를 서술하겠다는 서문을 존중한 것이었다.

강 교수는 현명(?)하게도 책의 서문에서 한국사회에서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아직 저술가들이 안전하지 않다(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 등)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에서 40년대 후반을 '오늘'의 관점을 벗어나서 새롭게 보려고 애쓰는 건 결코 안전한 일은 아니다."(p.17)
그럼에도 강 교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 걸쳐 종합하여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특유의 방식인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을 떠나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강 교수는 자신의 관점과 집필 방향에 따라 적지 않은 다른 저자의 저술과 정보를 참고하여 한국현대사를 저술해 나갔고 가급적 최신판 발간자료를 활용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국내 학자였고 일부 외국 학자의 출판물도 참고했다. 
예를 들어 김동춘, 오기영, 최상용, 서중석, 조순경, 이숙진, 박명림, 김상웅, 이기백, 지명관, 여연구, 도진순, 송광성, 부르스 커밍스, 구종서, 송광성, 김송달, 양동주, 히라야마 타츠키, 김학준, 신복룡, 이우진, 돈 오버도퍼, 하리마오, 김창훈 등이다.
강 교수가 인용한 저서와 정보를 내가 일일이 검증하지 못했고 저자들의 학문성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저자의 저술에 비해 강 교수의 정보 및 자료 인용에서 아쉬운 점은 본인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서 걸쳐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여 현대사를 '새롭게 보여주'겠다는 애초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많은 경우에 한국현대사학계의 주류 입장에 필요한 정보와 주장을 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강 교수의 그러한 정보와 출처의 수집에 있어서의 편향은 저자가 현대사를 집필하고 정리하는 방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해방 후 5년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라고 규정한다. 
그는 해방 후 한반도의 사회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한과 욕망의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적용한다. 그러면서 해방 후의 사회상황과 사람들의 욕망을 21세기로 투영하여 독선, 오만, 도덕적 우월감, 과도한 인정욕구, 선악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해방 후 정치상황을 좌우익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21세기의 정치상황 역시 진보-보수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강 교수의 그런 지적이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해방 후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21세기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그런 식으로 '선악 이분법'으로 극단화시키는 것이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분석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2권을 읽으면서 저자의 역사 서술과 해석 방향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제점 중의 첫째는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몰이해 내지 간과라 할 수 있고, 둘째는 '이분법' 해석에 갇히는 바람에 '거악'이자 역사적 상황에서 주요 대립구도를 간과해버렸다는 점이다.

1945년 해방 당시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는 당연히 친일파의 청산과 자유, 평등, 독립, 인권이 보장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강제 합병은 봉건적이고 농업관료체제였던 조선을 조선인 스스로 주체적으로 개혁 또는 혁명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자주자립적인 국가를 건설을 가록막았던 것이고, 해방은 한민족 스스로 그런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나마 완성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일제 패망을 이유로 한반도를 임의로 무력 점령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를 인수한다는 식으로 대처하면서 조선(한국)인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조선(한국)을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가로막은 가장 주된 세력은 미군정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같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알기에 숨 죽이며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강제 점령하면서 친일파를 불러내고 일제의 총독부를 유지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한민족의 노력을 무력으로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이다. 좌우익 대결이나 이분법 역시 미군정 하에서 미군정이 한민족간의 내분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셈이다.

강 교수에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 교수 스스로가 여러 자료와 저술을 인용하면서 미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해방 후 남한 인민의 자유와 자주독립을 유린하고 탄압했는지 보여주었(아래 부분 '1. 미군정에 대한 재인식' 참조)으면서도 미군정의 역사적 책임과 범죄행위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준만 교수가 '머리말'에서 주장한 국내 좌우익간의 '선악 이분법'이라는 해방 후 5년사 해석을 동의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은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였다. 백범 선생은 기존에 '통일조국의 지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통일조국의 지사'라는 상징이 대부분 깨졌다.(아래 부분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참조)
강 교수가 정리한 내용으로 볼 때, 백범 김구는 해방 전부터 부패한 장개석 중군 관벌과 손을 잡았고 미군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올 때부터 암살 당하기 직전까지 미군정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셈이다.
백범은 국제정세와 세력관계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미군정이나 이승만 만큼이나 극단적인 반공주의만을 신념화하였고, 대중정치인이라기 보다 일제시대의 테러리스트의 연장이었고, 해방 후 정치적 야욕을 위해 친일파와도 손을 잡았으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폭력과 테러와 선동의 정치를 남한에 뿌리 내리게 했다. 
결국 백범 김구는 미군정의 충실한 여러 명의 꼭두각시 중 하나의 역할을 했고, 이억만리 타향에서 이름없이 허송세월하던 이승만이 상당한 정치세력을 규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죽어가던 친일파가 부활하는 데 엄청난 디딤돌이 된 후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지난 역사는 교과서나 언론, 인터넷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공부할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와 사실을 파악하면서 종합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1. 해방 후 미군정의 만행 ] 

○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이 주동이 되어 조동우, 현우현, 김진우, 환운, 이석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체로 전국에 걸쳐 약 7만 명의 맹원을 확보하였다. 건국동맹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국내에서 조직된 유일한 건국준비 조직으로서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p.34,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김재영)

○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8일 사이에 식민 경찰의 50%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경찰관의 80%가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에게 쫒겨나거나 도망쳤다. 같은 시기에 일본인 경찰관의 약 90%가 그대로 직장에 머물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37, 미군점령 4년사, 송광성)

○ "식민통치안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미국 루스벨트가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구상해 둔 것이었다.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시켰을 경우, 좌익이 정권을 잡을 위험이 높은 지역에선 신탁통치를 실시함으로써 그 기간 동안 친미 정권을 수립케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겠다는 것이었다."(p.41, 해방전후사의 인식, 박현채 외)

○ "이미 1920년대에 상해 임시정부에는 27개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최악의 분파주의을 노정했고, 이러한 현상은 그 후에도 지속되어 해방 직전 미국 전략국(OSS)의 정보보고서는 임정의 분열상과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의 수권능력의 불신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p.44, 한국정치사, 신복룡)
=> 임정에 대한 재학습. 김구, 김규식, 김원봉의 입장은 누락. "과연 상해 임정은 분파주의가 대세였나? 그렇다면 분파주의의 원인은?"

○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경제부장 하필원, 체신부장 신익희 등 국내외, 좌우를 망라한 인사들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인공의 선포는 미 점령군의 진주라는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각 부를 담당할 중앙인민위원의 임명도 국외에 있고나 국내에 있더라도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광이 될 수 있었다."(p.60,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허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 여운형과 박헌영, 허은의 주장은 누락. 인공 간부들 중에서 사전 동의 없는 당사자는 누구? 친일파는 누구?

○ "인공의 급조는 여운형의 조급한 판단과 재건파 공산당의 좌경 헤게모니의 의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해방정국을 급격한 좌우 대결 구로도 몰고 가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p.62,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건, 밖으론 인공이 여운형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인공의 급조로 좌우 진영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p.63)

○ "미군의 친일본, 반조선 자세는 이미 9월 6일 준장 찰스 해리스가 이끄는 37명의 미군 선발대가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조선호텔에 투숙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미군 선발대는 일본 관리와 장교들을 만나 곤드레만드레가 된 채 흥청거린 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의 접견 요청은 모두 거부하였다."(p.65)

○ "조선을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9월 7일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건준 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선인민보'의 창간호 1면에는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렸고, 왼편에는 역시 '연합군을 환영함'이라는 기사가 실렸지만, 미군은 그런 환영을 외면하였다."(p.67)

○ "1945년 8월 30일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대표들은 중경의 미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 정치고문 배닝호프는 미 국무성에게 공산주의자들 마저 중경의 임정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구 세력을 횔용하는 것이 미군정에 매우 유리하다고 보고했다.(서중석)"(p.122)
=> 사실이라면 임시정부의 커다란 정치적, 도덕적 과오

○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홀대했다. 더이상 귀국을 미루기 어려워진 임정은 결국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받아들였다. 11월 23일 임정요인 환국 1진이 미군 수송기에 올랐다. 김구, 김규식 등 15명이었다."(p.123)

○ "미군정은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임정을 인공의 경쟁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정용욱)(p.124)

○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은 인공이나 조공과의 연대를 거부했고, 여운형의 방문마저 거부했다."(p.127)

○ "임시정부측은 인공과 조공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친일 협력자들에 대패선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 이처럼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김구와 임정은 친일 자본가와 한민당의 접근은 받아들였다. 김구 역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p.128)

○ "미군정은 임정 내의 우익이 먼저 귀국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서 일부러 작은 비행기를 보내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따라 임정 내부에서는 누가 먼저 귀국할 것이냐를 놓고 내분이 벌어졌다."(p.134)

○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남조선에서 실제적인 정부는 미군정 뿐'이라며 공식적으로 인공을 불법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19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인민이원회를 습격했다."(p.142)

○ "1945년 11월 15일 남원에서 인민위원회 해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미군이 발포하여 사망 3명, 부상 50명이 발생하였다. 이 폭력사태는 당시 진행 중이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4대국 신탁통치안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p.142)

○ "미-소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악의적 오보는 미국 내 통신사로부터 전달되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오보가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의 단순실수인지, 아니면 반소 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모종의 국제적(?)인 음모가 개입된 것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p.147)

○ "1945년 12월 (교묘하게 조작된) 신탁통치 보도에 격분한 임시정부가 신탁통치 반대와 더불어 미군정청을 반대하며 파업을 주장하자 1946년 1월 1일 하지는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파업을 해제할 것을 위협하자, 임시정부는 다음날 파업 중지를 호소했다."(p.155)

○ "미군정은 1945년 9월 '절대적인 언론자유의 보장'이라고 한 약속을 뒤집고 1945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정간 명령을 내렸다. 이 신문이 해방 후 사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뢰를 결성하였고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아놀드 성명의 게재를 거부하는 등 미군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p.159)

○ "1945년 9월 15일 미군정은 서울중앙방송국 등 남한의 10개 방송국을 모두 접수하여 군정정책에 대한 홍보매체로 이용하였다. ... '정당 방송' 시간에는 좌익 정당에 매달 30분, 우익 정당에 매달 4시간 30분을 힐애했다.(좌익정당 방송을 언제 금지했는지는 아직 모름)"(p.166)

○ "미군정은 1945년 10월 미국의 독립기념이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을 공휴일로 지정했는데, 어쩌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훗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미군정의 가장 성공적인 홍보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p.167)

○ "1945년 9월 16일 미 군정청 학무국장 락카드 대위는 조선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7명의 조선인 교육위원을 선정하였다. 김성수, 한상윤, 백낙준, 김활란, 김성달, 최규동, 유억겸 등이 그들이다.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었다."(p.172)

○ "해방 직후 교육정상화의 가장 큰 장애 중의 하나는 미군의 교육시설 점유였다. 점령 직후 내려진 명령 중 하나가 모든 학교의 휴교였는데, 학교 건물들은 미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곱게 사용했으면 모르겠는데, 약탈적 점령으로 시설, 특히 도서관 파괴가 심각했다."(p.173)

○ "물론 이는(해방 직후 일제의 화폐남발과 인플레이션) 미군정의 정책부재가 겹쳐 악화된 것이었다. 일제가 퇴각하는 순간에도 수탈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이 각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은 10월 13일에야 미군이 총재로 임명되었다."(p.185)

○ "반면 미군정은 남한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만 관림을 기울인 나머지 일본인 기술자들을 붙잡아 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거의 다 귀국시키고 말았다."(p.186)

○ 46년 전반기까지 미군정의 점령정책은 소위 '질병과 소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점령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질병과 소요'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할 뿐 피점령국의 경제는 점령 측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p.18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박찬표)
=> 정치,경제,행정,사법,사업체까지 장악하고서 경제정책 방치하는 것을 그냥 미군정의 입장이라고만 설명?? : 총독부 유지, 총독부 정책/인물 유지, 친일파 군경 보호/조직, 일제 사업체 접수(생산액의 35%), 방송국 장악, 금융기관 전부 접수(늦장부렸지만), 일본 기술자 귀국, 물가폭등, 토지개혁 저지, 

○ 정치의 과잉, 그건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분명 해방정국의 비극이었다. 그건 오래송안 막혔던 둑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나타난 현상인지라 통제가 어려웠고, 통제를 시도할 주체도 없었다. 남은 건 욕망의 적나라한 대립과 투쟁뿐이었다. 그 욕망은 '애국심'으로 포장되었기에, 갈 데까지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p.189)

○ 미군정은 1945년 10월 15일 뉴욕타임즈 리차드 존스턴과 조선공산당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조작해 미국의소리 방송 -> 동아일보를 통해 언론공작을 펼쳤다.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12개 신문,통신사 기자들이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미군정은 사실을 알면서도 방송과 한민당, 친일우익단체를 동원하여 반탁운동을 부추겼다.((p.195~197)

○ 1946년 1월 7일 반탁전국학생연맹(대표 이철승)이 결성되면서 서울운동장에서 1만명이 반탁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내 학생들은 방학 중임에도 학교와 교사의 지시로 동원된 것이었다.(p.198)
=> 교육부처를 장악하고 있던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배후였던 셈이죠.

○ 1946년 1월 8일 반탁학생연맹은 반탁시위를 벌인 뒤 조선인민보사로 몰려가 인쇄기를 부수고 건물을 피괴했고, 조선인민당으로 몰려가 건물과 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서울시 인민위원회 및 부녀총동먕 사무소를 부수었고 신문로에서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다음 날 새벽 장택상의 지휘로 (친일파 출신) 경찰은 반탁학생연맹의 파괴행위의 책임은 묻지 않고 충돌의 책임을 학병동맹에게 묻겠다며 사무실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총격전이 발생하여 학병동맹원 3인이 죽었다.(p.199)

○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진실(미국이 먼저 제안, 미국측이 주장한 10년을 소련측이 5년으로 축소, 임시정부 먼저 구성 등)이 미군정과 관제언론에 의해 왜곡 조작된 것에 대해 소련측이 항의함에도 미군정 하지 중장은 소련의 주장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통제하였다.(p.201)

○ 신탁통치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자 1946년 1월 7일 한민당(김병로,원세훈), 국민당(안재홍,이승복,백홍균), 인민당(이영성,김세용,김오성), 공산당(박헌영,이주하)과 중경 임시정부측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인공측 홍남표, 이강국 등이 참석하여 모스크바 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초하여 신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을 결이했다. 다음 날 신한민족당까지 가담하여 5당 회의를 진행하였으나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사 반대하고 김구의 한독당마저 반탁을 무조건 고집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4당 코뮈니케, p.204)

○ 미군정은 1945년 10월 경찰을 보완할 목적으로 국군을 창설키로 결정하고 11월 13일 군정 법령을 발표한 후 국방부를 설치하고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미군정은 경비대의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을 배제시켰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만주군 중좌), 제1연대장 채병덕(일본육사 49기), 2연대장 이형근(일본육사 56기), 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만주군관학교), 5연대장 백선엽(만주군관학교)는 모두 친일파였고 미군정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 대좌출신이었다.

○ 1946년 1월 미군정의 지시를 받은 경찰과 미 헌병부대는 서울에 있는 인민공화국 산하 국군준비대 본부와 양주군 훈련학교를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이 습격에는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의 대원들도 가담했다.(p.208)

○ 1946년 6월 15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경비대의 명칭과 목적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조선경비대로, 국방부를 경무부로, 군사국을 경비국으로 바꾸었다.(p.210)

○ "미군정은 어리석게도 1945년 10월부터 조선의 실정에 전혀 맞지 읺는 자유시장 정책을 실시하여 쌀 투기만 불러 일으켰다. 쌀의 도매시세가 3개월 만에 한 석당 650원에서 5천600원으로 폭등했다."(p.213)

○ "미군정은 1945년 10월 소작제를 철폐하지 않은채 소작료의 상한선을 1/3 정했다. 하지만 위반시 처벌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대부분의 지주는 이 법령을 지키지 않았고 관개시설 사용료 등 모든 비용을 소작인에게 전가시켰다."(p.215)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 "미군정은 1946년 2월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를 신한공사로 이름만 바꾸었다. 신한공사는 남한 전 경지면적의 13.4%, 전체 농가수의 27%, 쌀 생산량의 25%에 달했다. 직원들에게 소작료 징수량의 일부를 떼어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신한공사 직원들은 소작료를 받아내는 데 경찰보다 더 혈안이었다.(아마 직원들은 일제의 수탈에 부역하던 사람들 그대로였겠죠)"(p.216)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령에 의한 미곡 공출은 소작인이 직접 납부하고 지주는 직접 받을 수 없도록 되었는데,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속여 직접 현물로 받아 소작인의 불공출을 권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소작농에 대해서만 가록하게 대응했다. 미곡 수집과정에사 처벌한 소작인만도 1946년 8천600백 명에 이르렀다."(p.217)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미곡 공출 역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강제로 공출하였기 때문에 자영농과 소작인들은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 "미군정은 미곡 공출로 도시민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를 취했는데, 지주의 저항과 속임수로 공출 목표가 미달하고 쌀값 폭등과 더불어 턱없이 모자라는 배급량으로 인래 도시에서의 쌀 위기는 계속되었다.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미군정은 쌀 수집과 배급 절차를 통해 좌익을 통제라고 탄압했다."(p.218)

○ "민주의원을 거부한 세력들은 다음 날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조선문학작가동맹 등 29개 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되었다. 민전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주장하며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자 등을 제외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체임을 선언했다."(p.225)

○ "(북한의) 토지개혁 발표 후, 남한의 신문들은 이를 톱기사로 보도했으며, 사설들은 남부에서도 유사한 개혁을 할 것을 주장했고 비판은 거의 없었다. 그후 북한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남부 각 도에서 산발적아로 일어났다. 당시 남한 신문들을 숙독하면 한국의 추진력은 북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남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p.232)

○ "미군정은 1945년 9월 정당신고재를 택한 지 5개월 만인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읓 발표하였다.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체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는 이에 대해 '일제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p.233)

○ "1946년 미군정은 방첩대를 동원하여 좌익인사들에 대해 집요하게 전향공작을 펼쳤다. 급기야 불법적이고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천 민전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봉암 전향사건으로 이어졌다. 전향공작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점점 심해졌는데, 1947년 10월 민전 경기도 부위원장 작일원의 전향공작시에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p.242)

○ "미군정은 1946년 5월 뚝섬에서 체포된 위조지폐단 용의자 26명 중에 포함된 조선공산당원 한 명을 빌미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미군정 법정은 공산당원 16명에게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p.243~244)
=> 이 사건은 수많은 의혹만을 남긴 상태로 남아있다.

○ 대한민청은 한민당을 비롯한 호남 (친일)지주들의 지원을 받았고, 김두한은 때로 협박,공갈을 구사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친일경찰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활동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권력과 깡패가 본격적으로 야합하기 시직한 것은 이때부터였지만, 단초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p.262)

○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껴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 사람을 특파하여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읓 결성케 하였다. 단장은 이범석. 이범석은 중국의 조선광복군 2지대 사령관을 지내면서 미국 정보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이었다.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다.(p.267)

○ 19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텔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p.269)

○ 미군정의 좌익 탄압은 교육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하여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를 폐쇄하였다. 또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문맹퇴치운동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좌익이 문맹퇴치를 정치 이데올로기를 삼투시키기 위한 기초공작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p.272)
=>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가 왜 무조건 '좌익'인가? 이것은 미군정이 일제처럼 제국주의적 사고를 지닌 것이고 강준만이 다음에 거론하듯이 전민중의 공부 열기에 따른 자발적인 모습일 뿐이며, 미군정은 좌익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 뿐이라는 걸 왜 인정하지 않는가? 문맹퇴치운동이 '좌익이 이용한 것'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 1946년 7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진행된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 파동은 교육 영역이 그렇게 이념적, 정치적 논란의 주요 이수로 등장(?)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국대안 반대투쟁은 미군정 지시 하에 서북청년회와 김두한의 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탄압함으로써 진압되었다.(p.273~279)
=> 강준만 본인도 뒤에서 과정을 밝혔듯이, 교육이 정치적으로 변질된 이유는 미군정과 친일극우가 유도하고 저지른 때문이었다. 어떤 면으로 보아도 미군정이 국대안을 실시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미군정이 기존 학교시설을 점거하고 파괴했는데, 문맹퇴치와 사설교육기관을 폐쇄했는데 갑자기 조선의 교육을 위해 힘쓴다? 

○ 1946년 6월부터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여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지지하면서 민주의원괴 민전 사이의 논의로 급진전되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의 조건으로 5개항을 제시하고한민당측은 8개항을 제시했다. 미군정은 1946년 9월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박헌영과 이강국 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좌우합작을 다시 밀어붙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7원칙에 합의했는데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을 한민당이 반대했다. 이에 반발하여 한민당에서 원세훈, 송남헌, 김병로, 김약수 등이 탈당하였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외면했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조직하려고 좌파와 중도파를 이용한 것이다.(p.284~305)

○ 1946년 10월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근거로 민선 45명, 관선 45명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간접선거) 설치를 강행하면서 제2의 중추원으로 비판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세력은 이를 거부했고, 중도좌파 대부분 사퇴했다. 결국 과도입법의원은 다수의 우파와 친일파 세력, 일부의 중도우파세력으로 구성되었다.(p.306~309)

○ 1946년 9월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는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는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계열이 기존의 미군정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이른바 '신전술'의 일환으로 벌인 대대적인 파업이었다. 한달 전인 8월 경찰이 전평 서울본부를 습격하여 문서를 압수하였고, 인민보와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익계열 신문을 포고령법 위반으로 폐간시켰다. 미군정은 경찰과 김두한 등 우익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습격하여 간부와 노조원을 죽이고 폭행하고 체포했다.(p.289~293)
=> 그렇다면 강준만은 미군정의 정당, 노조, 언론탄압에 무릅 꿇고 죽으라는 것인가? 미군정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탄압에 아무런 입장이 없는 것인가?

○ 1946년 10월 대구에서 "쌀을 배급하라!"며 시작되어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과 민간인 1천 명 이상이 피살되었으며,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에 이르렀다. 10월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루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에서 제반 개력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 대구, 경북의 항쟁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 김두한 등 정치깡패 등의 폭력과 학살은 끊이지 않았다.(p.296~300)

○ 10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돈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남로당은 급진화되었으며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p.301)
=> 미군정과 친일파와 극우들이 친일경찰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농민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두른 것을 직접 보고 겪은 농민들이 이승만을 지지했다? 웃기는 소리. 1948년 단독선거 거부투쟁과 그뒤 빨치산 유격대 투쟁 등을 고려하면 강준만 교수의 염원일 수는 있으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죠. 이승만은 모든 선거에서 부정과 폭력을 일삼았고, 그런 행위가 농촌에서 더 쉽게 먹혀들어간 것 뿐...

○ 미군정의 최대 관심은 '예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 미군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극장에 대해 조선 영화인의 의견에 따라 불하한다고 공언했지만 친일 지주와 친미 자산가, 친일 예술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그 약속을 어겼다. 여기에 1946년 10월 미군정은 영화 포고령을 발포하여 사전허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영화,예술 등에 대한 창작의 자유를 억눌렀다.(p.325~327)

--- 아래부터는 1940년대 2부 ---

○ "미군정과 우익단체들은 전국적으로 열린 민전 주최의 1947년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탄압하였다. 부산과 제주도 등 지방에서는 경찰 발포로 16명이 죽고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p.19)
 
○ "제주도에서 발생한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사상이 바로 그 다음해에 일어난 비극적인 4.3항쟁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씨앗이 되었다. 경찰이 사과하고 수습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군정은 사건을 크게 키우려고 작정이나 한 것처럼 계속 적반하장을 일삼았던 것이다."(p.21)
=> 강준만 교수의 순진함 또는 무지함 또는 비겁함이 드러난 대목. 미군정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단을 점령하면서 일제의 점령지를 이어받은 '점령군'으로 스스로를 자임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령군으로 행사하면서 남한 민중의 자주적 자발적 독립국가 건설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는데 이제와서 3.1절 발포사건과 수습과정을 문제삼는 것은 왜??

○ "미군정과 우익의 3.1 기념대회 탄압에 항의하여 전평은 3월 22일 전국 총파업을 진행하였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민전과 그 산하단체들을 습격하였다. 3월 29일까지 3천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독립투사이자 민족혁명당 김원봉도 검거되어 노덕술 등 친일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p.21)

○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신탁통치반대'의 현수막이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p.39)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 씨 집권과 그의 타라그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p.39) - 리영희 <역정>(창비 1988) 중에서 재인용

○ "미군정은 2차 공위 시작 전인 1947년 5월 17일 법령 제161호를 공포하고 6월 3일 남조선과도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과도정부의 한인 고위관리 115명 중 70명이 일제 총독부에서 관직에 있었으며, 23명은 일제 하에서 공공 및 개인기업의 소유자, 지배인이었다. 전체 줓 조금이나마 항일활동 경력을 가진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p.44)

○ "1948년 2월까지의 미군정 각 부처장급 한인 고위관료 30명의 출신지역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북 출신자들이 39%였는데 이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추천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군정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p.45)

[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

○ "미군정은 1946년 2월 반탁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치던 우익(?) 지도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켰다. 여기에 1월 김구와 이승만이 결성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 전원이 민주의원으로 임영되었다. 여운형 등은 불참을 선언했다. 불참한 세력은 이를 일제의 '중추원'으로 비난하였다."(p.221)
=> 이로써 김구와 김구식은 그동안 완강하게 고집하던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스스로 부정해버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왜 이런 들러리 단체에 참여했는가? 미군정의 협박과 정치자금 때문에??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첫 번째....

○ "민주의원 설립 후 김성수가 사적으로 100만 원을, 대지주 중심의 단체인 대한경제보국회가 200만원을 기부했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해방정국의 '3거두'를 비록한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물론 이승만은 따로 1천만 원을 제공받았다."(p.223)
=> 친일파들에게 정치자금을 받고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겠나?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번째....

○ "1946년 3월 1일, 평양역에서 진행된 3.1 운동 기념식에서 김일성에 대한 폭탄테러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이 테러 미수사건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라고 하는 전문 테러단체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에 따라 저지른 짓이었다. 암살단은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을 갖고 있었다."(p.230)
=>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세 번째.... 임시정부와 김구, 김규식, 신익희 씨에 대해 결정적으로 실망한 대목. 해방 후 그많은 친일파와 일제부역자들에게 테러 한 번 못하고 정치자금을 받으면서 자주독립통일국가를 꿈꾸었다니..

○ "1946년 3월 22일 미소공동위원회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반탁투쟁을 했어도 삼상회의 지지를 표명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좌익과 우익의 합작파는 즉시 찬성을 표했지만, 김구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승만은 한 달 후 공동성명 5호에 동의했다. 그래도 여전히 민주의원 일부가 지지를 거부하자,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사전 상의없이 신탁통치 여부를 불문에 붙인다고 발표했다."(p.236)
=>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네 번째....

○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 전주, 이리, 군산에서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6월 11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회의 진행시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 이승만 박사에게 복종라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이승만이 민족통일본부라는 단체를 만들었을 때 김구는 부총재에 취임했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하게 대접했다. 김구의 그런 지원으로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p.258)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다섯 번째 이야기...

○ 1946년 봄 300명이 모여 대한민주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조직원은 종로,명동 일대의 폭력조직 대부분이 망라되었다. 명예회장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회장은 유진상, 감찰부장은 김두한이었다.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염동진이 만든 테러단체 백의사 비밀조직원인 김두한은 극단적으로 반공을 내새운 깡패였다.(p.260)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섯 번째 이야기...

○ 이승만과 김구가 가장 믿음직한 단체의 하나로 아끼고 사랑했던, 반탁학생연맹의 후신인 전국학생총연맹이 1946년 7월 결성되었다. 김구와 조소앙은 청년,학생단체의 소속원들이 체포되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시켰다. 이들 단체의 자금은 김성수로부터 나왔다.이 단체는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김두한은 자신이 1947년 근로인민당의 당사까지 빼앗아 이 단체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했다.(263)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곱 번째 이야기...

○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 1946년 3웣 10일에 결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결성대회에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대한노총은 출발부터 단순한 노동자 조직이 아니라 우익 깡패와 정치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대한노총의 조직은 미군정 차원에서 구상되고 실련되었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대한노총의 제1차 대의원대회에서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에 김구, 전진한을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p.294~295)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덟 번째 이야기...

 

[ 2013년 1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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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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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나름대로 선정한 책 중에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시리즈, <대한민국사(한홍구)> 시리즈, <우리역사 이야기(조성오)> 시리즈,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 이어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시리즈를 읽었다.
여러 국내 저서 중에서 강준만 교수의 저서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다른 저서를 통해 내가 인정했던, 자료와 정보수집 능력 등을 고려한 것이고,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중도'적 관점에서 현대사를 서술하겠다는 서문을 존중한 것이었다.

강 교수는 현명(?)하게도 책의 서문에서 한국사회에서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아직 저술가들이 안전하지 않다(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 등)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현실에서 40년대 후반을 '오늘'의 관점을 벗어나서 새롭게 보려고 애쓰는 건 결코 안전한 일은 아니다."(p.17)
그럼에도 강 교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 걸쳐 종합하여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특유의 방식인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을 떠나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컸다.


강 교수는 자신의 관점과 집필 방향에 따라 적지 않은 다른 저자의 저술과 정보를 참고하여 한국현대사를 저술해 나갔고 가급적 최신판 발간자료를 활용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국내 학자였고 일부 외국 학자의 출판물도 참고했다. 
예를 들어 김동춘, 오기영, 최상용, 서중석, 조순경, 이숙진, 박명림, 김상웅, 이기백, 지명관, 여연구, 도진순, 송광성, 부르스 커밍스, 구종서, 송광성, 김송달, 양동주, 히라야마 타츠키, 김학준, 신복룡, 이우진, 돈 오버도퍼, 하리마오, 김창훈 등이다.
강 교수가 인용한 저서와 정보를 내가 일일이 검증하지 못했고 저자들의 학문성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저자의 저술에 비해 강 교수의 정보 및 자료 인용에서 아쉬운 점은 본인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많은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모든 분야에서 걸쳐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여 현대사를 '새롭게 보여주'겠다는 애초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많은 경우에 한국현대사학계의 주류 입장에 필요한 정보와 주장을 주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실제 강 교수의 그러한 정보와 출처의 수집에 있어서의 편향은 저자가 현대사를 집필하고 정리하는 방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머리말'에서 자신이 해방 후 5년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라고 규정한다. 
그는 해방 후 한반도의 사회정치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한과 욕망의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적용한다. 그러면서 해방 후의 사회상황과 사람들의 욕망을 21세기로 투영하여 독선, 오만, 도덕적 우월감, 과도한 인정욕구, 선악 이분법이라는 잣대를 동일하게 적용한다. 해방 후 정치상황을 좌우익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21세기의 정치상황 역시 진보-보수의 극한대결로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강 교수의 그런 지적이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해방 후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21세기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그런 식으로 '선악 이분법'으로 극단화시키는 것이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분석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2권을 읽으면서 저자의 역사 서술과 해석 방향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제점 중의 첫째는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에 대한 몰이해 내지 간과라 할 수 있고, 둘째는 '이분법' 해석에 갇히는 바람에 '거악'이자 역사적 상황에서 주요 대립구도를 간과해버렸다는 점이다.

1945년 해방 당시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는 당연히 친일파의 청산과 자유, 평등, 독립, 인권이 보장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의 조선 강제 합병은 봉건적이고 농업관료체제였던 조선을 조선인 스스로 주체적으로 개혁 또는 혁명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자주자립적인 국가를 건설을 가록막았던 것이고, 해방은 한민족 스스로 그런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나마 완성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일제 패망을 이유로 한반도를 임의로 무력 점령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를 인수한다는 식으로 대처하면서 조선(한국)인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조선(한국)을 개혁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해방 후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를 가로막은 가장 주된 세력은 미군정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같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알기에 숨 죽이며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강제 점령하면서 친일파를 불러내고 일제의 총독부를 유지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한민족의 노력을 무력으로 부정하고 파괴했던 것이다. 좌우익 대결이나 이분법 역시 미군정 하에서 미군정이 한민족간의 내분을 조장하고 부추겼던 셈이다.

강 교수에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 교수 스스로가 여러 자료와 저술을 인용하면서 미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해방 후 남한 인민의 자유와 자주독립을 유린하고 탄압했는지 보여주었(아래 부분 '1. 미군정에 대한 재인식' 참조)으면서도 미군정의 역사적 책임과 범죄행위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준만 교수가 '머리말'에서 주장한 국내 좌우익간의 '선악 이분법'이라는 해방 후 5년사 해석을 동의할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은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였다. 백범 선생은 기존에 '통일조국의 지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통일조국의 지사'라는 상징이 대부분 깨졌다.(아래 부분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참조)
강 교수가 정리한 내용으로 볼 때, 백범 김구는 해방 전부터 부패한 장개석 중군 관벌과 손을 잡았고 미군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해방 후 남한에 들어올 때부터 암살 당하기 직전까지 미군정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셈이다.
백범은 국제정세와 세력관계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미군정이나 이승만 만큼이나 극단적인 반공주의만을 신념화하였고, 대중정치인이라기 보다 일제시대의 테러리스트의 연장이었고, 해방 후 정치적 야욕을 위해 친일파와도 손을 잡았으며,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폭력과 테러와 선동의 정치를 남한에 뿌리 내리게 했다. 
결국 백범 김구는 미군정의 충실한 여러 명의 꼭두각시 중 하나의 역할을 했고, 이억만리 타향에서 이름없이 허송세월하던 이승만이 상당한 정치세력을 규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죽어가던 친일파가 부활하는 데 엄청난 디딤돌이 된 후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토사구팽 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지난 역사는 교과서나 언론, 인터넷의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공부할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와 사실을 파악하면서 종합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1. 해방 후 미군정의 만행 ] 

○ "건국동맹은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이 주동이 되어 조동우, 현우현, 김진우, 환운, 이석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체로 전국에 걸쳐 약 7만 명의 맹원을 확보하였다. 건국동맹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국내에서 조직된 유일한 건국준비 조직으로서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p.34,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김재영)

○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8일 사이에 식민 경찰의 50%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인 경찰관의 80%가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에게 쫒겨나거나 도망쳤다. 같은 시기에 일본인 경찰관의 약 90%가 그대로 직장에 머물고 있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37, 미군점령 4년사, 송광성)

○ "식민통치안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미국 루스벨트가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구상해 둔 것이었다.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시켰을 경우, 좌익이 정권을 잡을 위험이 높은 지역에선 신탁통치를 실시함으로써 그 기간 동안 친미 정권을 수립케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겠다는 것이었다."(p.41, 해방전후사의 인식, 박현채 외)

○ "이미 1920년대에 상해 임시정부에는 27개 정당, 사회단체가 난립하여 최악의 분파주의을 노정했고, 이러한 현상은 그 후에도 지속되어 해방 직전 미국 전략국(OSS)의 정보보고서는 임정의 분열상과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의 수권능력의 불신에 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p.44, 한국정치사, 신복룡)
=> 임정에 대한 재학습. 김구, 김규식, 김원봉의 입장은 누락. "과연 상해 임정은 분파주의가 대세였나? 그렇다면 분파주의의 원인은?"

○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정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경제부장 하필원, 체신부장 신익희 등 국내외, 좌우를 망라한 인사들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인공의 선포는 미 점령군의 진주라는 급박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각 부를 담당할 중앙인민위원의 임명도 국외에 있고나 국내에 있더라도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승만이 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커다란 정치적 후광이 될 수 있었다."(p.60,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허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 여운형과 박헌영, 허은의 주장은 누락. 인공 간부들 중에서 사전 동의 없는 당사자는 누구? 친일파는 누구?

○ "인공의 급조는 여운형의 조급한 판단과 재건파 공산당의 좌경 헤게모니의 의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서 해방정국을 급격한 좌우 대결 구로도 몰고 가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p.62,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서중석)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건, 밖으론 인공이 여운형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만큼 여운형은 우익진영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인공의 급조로 좌우 진영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p.63)

○ "미군의 친일본, 반조선 자세는 이미 9월 6일 준장 찰스 해리스가 이끄는 37명의 미군 선발대가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조선호텔에 투숙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미군 선발대는 일본 관리와 장교들을 만나 곤드레만드레가 된 채 흥청거린 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의 접견 요청은 모두 거부하였다."(p.65)

○ "조선을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9월 7일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건준 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선인민보'의 창간호 1면에는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렸고, 왼편에는 역시 '연합군을 환영함'이라는 기사가 실렸지만, 미군은 그런 환영을 외면하였다."(p.67)

○ "1945년 8월 30일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대표들은 중경의 미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겼다. 하지만 미 정치고문 배닝호프는 미 국무성에게 공산주의자들 마저 중경의 임정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구 세력을 횔용하는 것이 미군정에 매우 유리하다고 보고했다.(서중석)"(p.122)
=> 사실이라면 임시정부의 커다란 정치적, 도덕적 과오

○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홀대했다. 더이상 귀국을 미루기 어려워진 임정은 결국 개인 자격으로 귀국을 받아들였다. 11월 23일 임정요인 환국 1진이 미군 수송기에 올랐다. 김구, 김규식 등 15명이었다."(p.123)

○ "미군정은 인공에게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임정을 인공의 경쟁자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임정이 정부 또는 내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허락했다."(정용욱)(p.124)

○ "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임시정부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그러나 김규식 등 임정 요인들은 인공이나 조공과의 연대를 거부했고, 여운형의 방문마저 거부했다."(p.127)

○ "임시정부측은 인공과 조공에 대해선 단호한 태도를 취한 반면, 친일 협력자들에 대패선 유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 이처럼 친일파 처단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김구와 임정은 친일 자본가와 한민당의 접근은 받아들였다. 김구 역시 정치자금 문제 때문에 일정하게 친일파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p.128)

○ "미군정은 임정 내의 우익이 먼저 귀국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서 일부러 작은 비행기를 보내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따라 임정 내부에서는 누가 먼저 귀국할 것이냐를 놓고 내분이 벌어졌다."(p.134)

○ "1945년 12월 12일 하지는 '남조선에서 실제적인 정부는 미군정 뿐'이라며 공식적으로 인공을 불법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19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인민이원회를 습격했다."(p.142)

○ "1945년 11월 15일 남원에서 인민위원회 해체에 항의하는 민중들에게 미군이 발포하여 사망 3명, 부상 50명이 발생하였다. 이 폭력사태는 당시 진행 중이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4대국 신탁통치안의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분위기 조성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p.142)

○ "미-소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악의적 오보는 미국 내 통신사로부터 전달되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오보가 언론을 통제하던 미군정의 단순실수인지, 아니면 반소 반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한 모종의 국제적(?)인 음모가 개입된 것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p.147)

○ "1945년 12월 (교묘하게 조작된) 신탁통치 보도에 격분한 임시정부가 신탁통치 반대와 더불어 미군정청을 반대하며 파업을 주장하자 1946년 1월 1일 하지는 김구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파업을 해제할 것을 위협하자, 임시정부는 다음날 파업 중지를 호소했다."(p.155)

○ "미군정은 1945년 9월 '절대적인 언론자유의 보장'이라고 한 약속을 뒤집고 1945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정간 명령을 내렸다. 이 신문이 해방 후 사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뢰를 결성하였고 인민공화국을 부인한 아놀드 성명의 게재를 거부하는 등 미군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p.159)

○ "1945년 9월 15일 미군정은 서울중앙방송국 등 남한의 10개 방송국을 모두 접수하여 군정정책에 대한 홍보매체로 이용하였다. ... '정당 방송' 시간에는 좌익 정당에 매달 30분, 우익 정당에 매달 4시간 30분을 힐애했다.(좌익정당 방송을 언제 금지했는지는 아직 모름)"(p.166)

○ "미군정은 1945년 10월 미국의 독립기념이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을 공휴일로 지정했는데, 어쩌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훗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미군정의 가장 성공적인 홍보전략이었는지도 모르겠다."(p.167)

○ "1945년 9월 16일 미 군정청 학무국장 락카드 대위는 조선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7명의 조선인 교육위원을 선정하였다. 김성수, 한상윤, 백낙준, 김활란, 김성달, 최규동, 유억겸 등이 그들이다.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친일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었다."(p.172)

○ "해방 직후 교육정상화의 가장 큰 장애 중의 하나는 미군의 교육시설 점유였다. 점령 직후 내려진 명령 중 하나가 모든 학교의 휴교였는데, 학교 건물들은 미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곱게 사용했으면 모르겠는데, 약탈적 점령으로 시설, 특히 도서관 파괴가 심각했다."(p.173)

○ "물론 이는(해방 직후 일제의 화폐남발과 인플레이션) 미군정의 정책부재가 겹쳐 악화된 것이었다. 일제가 퇴각하는 순간에도 수탈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인이 각 금융기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은 10월 13일에야 미군이 총재로 임명되었다."(p.185)

○ "반면 미군정은 남한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만 관림을 기울인 나머지 일본인 기술자들을 붙잡아 둘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거의 다 귀국시키고 말았다."(p.186)

○ 46년 전반기까지 미군정의 점령정책은 소위 '질병과 소요'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점령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질병과 소요'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할 뿐 피점령국의 경제는 점령 측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p.187,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박찬표)
=> 정치,경제,행정,사법,사업체까지 장악하고서 경제정책 방치하는 것을 그냥 미군정의 입장이라고만 설명?? : 총독부 유지, 총독부 정책/인물 유지, 친일파 군경 보호/조직, 일제 사업체 접수(생산액의 35%), 방송국 장악, 금융기관 전부 접수(늦장부렸지만), 일본 기술자 귀국, 물가폭등, 토지개혁 저지, 

○ 정치의 과잉, 그건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분명 해방정국의 비극이었다. 그건 오래송안 막혔던 둑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나타난 현상인지라 통제가 어려웠고, 통제를 시도할 주체도 없었다. 남은 건 욕망의 적나라한 대립과 투쟁뿐이었다. 그 욕망은 '애국심'으로 포장되었기에, 갈 데까지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p.189)

○ 미군정은 1945년 10월 15일 뉴욕타임즈 리차드 존스턴과 조선공산당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조작해 미국의소리 방송 -> 동아일보를 통해 언론공작을 펼쳤다.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12개 신문,통신사 기자들이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미군정은 사실을 알면서도 방송과 한민당, 친일우익단체를 동원하여 반탁운동을 부추겼다.((p.195~197)

○ 1946년 1월 7일 반탁전국학생연맹(대표 이철승)이 결성되면서 서울운동장에서 1만명이 반탁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내 학생들은 방학 중임에도 학교와 교사의 지시로 동원된 것이었다.(p.198)
=> 교육부처를 장악하고 있던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배후였던 셈이죠.

○ 1946년 1월 8일 반탁학생연맹은 반탁시위를 벌인 뒤 조선인민보사로 몰려가 인쇄기를 부수고 건물을 피괴했고, 조선인민당으로 몰려가 건물과 시설을 파괴하였으며, 서울시 인민위원회 및 부녀총동먕 사무소를 부수었고 신문로에서 학병동맹원들과 충돌하였다. 다음 날 새벽 장택상의 지휘로 (친일파 출신) 경찰은 반탁학생연맹의 파괴행위의 책임은 묻지 않고 충돌의 책임을 학병동맹에게 묻겠다며 사무실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총격전이 발생하여 학병동맹원 3인이 죽었다.(p.199)

○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진실(미국이 먼저 제안, 미국측이 주장한 10년을 소련측이 5년으로 축소, 임시정부 먼저 구성 등)이 미군정과 관제언론에 의해 왜곡 조작된 것에 대해 소련측이 항의함에도 미군정 하지 중장은 소련의 주장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통제하였다.(p.201)

○ 신탁통치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자 1946년 1월 7일 한민당(김병로,원세훈), 국민당(안재홍,이승복,백홍균), 인민당(이영성,김세용,김오성), 공산당(박헌영,이주하)과 중경 임시정부측 김원봉, 장건상, 김성숙, 인공측 홍남표, 이강국 등이 참석하여 모스크바 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초하여 신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을 결이했다. 다음 날 신한민족당까지 가담하여 5당 회의를 진행하였으나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사 반대하고 김구의 한독당마저 반탁을 무조건 고집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4당 코뮈니케, p.204)

○ 미군정은 1945년 10월 경찰을 보완할 목적으로 국군을 창설키로 결정하고 11월 13일 군정 법령을 발표한 후 국방부를 설치하고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미군정은 경비대의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을 배제시켰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만주군 중좌), 제1연대장 채병덕(일본육사 49기), 2연대장 이형근(일본육사 56기), 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만주군관학교), 5연대장 백선엽(만주군관학교)는 모두 친일파였고 미군정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 대좌출신이었다.

○ 1946년 1월 미군정의 지시를 받은 경찰과 미 헌병부대는 서울에 있는 인민공화국 산하 국군준비대 본부와 양주군 훈련학교를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이 습격에는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청의 대원들도 가담했다.(p.208)

○ 1946년 6월 15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경비대의 명칭과 목적에 대해 문제제기하자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조선경비대로, 국방부를 경무부로, 군사국을 경비국으로 바꾸었다.(p.210)

○ "미군정은 어리석게도 1945년 10월부터 조선의 실정에 전혀 맞지 읺는 자유시장 정책을 실시하여 쌀 투기만 불러 일으켰다. 쌀의 도매시세가 3개월 만에 한 석당 650원에서 5천600원으로 폭등했다."(p.213)

○ "미군정은 1945년 10월 소작제를 철폐하지 않은채 소작료의 상한선을 1/3 정했다. 하지만 위반시 처벌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대부분의 지주는 이 법령을 지키지 않았고 관개시설 사용료 등 모든 비용을 소작인에게 전가시켰다."(p.215)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 "미군정은 1946년 2월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를 신한공사로 이름만 바꾸었다. 신한공사는 남한 전 경지면적의 13.4%, 전체 농가수의 27%, 쌀 생산량의 25%에 달했다. 직원들에게 소작료 징수량의 일부를 떼어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신한공사 직원들은 소작료를 받아내는 데 경찰보다 더 혈안이었다.(아마 직원들은 일제의 수탈에 부역하던 사람들 그대로였겠죠)"(p.216)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수집령에 의한 미곡 공출은 소작인이 직접 납부하고 지주는 직접 받을 수 없도록 되었는데,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속여 직접 현물로 받아 소작인의 불공출을 권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소작농에 대해서만 가록하게 대응했다. 미곡 수집과정에사 처벌한 소작인만도 1946년 8천600백 명에 이르렀다."(p.217)
=> 일제와 미제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미곡 공출 역시 시세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강제로 공출하였기 때문에 자영농과 소작인들은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 "미군정은 미곡 공출로 도시민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를 취했는데, 지주의 저항과 속임수로 공출 목표가 미달하고 쌀값 폭등과 더불어 턱없이 모자라는 배급량으로 인래 도시에서의 쌀 위기는 계속되었다. 그 혼란한 와중에서도 미군정은 쌀 수집과 배급 절차를 통해 좌익을 통제라고 탄압했다."(p.218)

○ "민주의원을 거부한 세력들은 다음 날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조선문학작가동맹 등 29개 정당, 사회단체가 망라되었다. 민전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주장하며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자 등을 제외한 민주주의 민족통일체임을 선언했다."(p.225)

○ "(북한의) 토지개혁 발표 후, 남한의 신문들은 이를 톱기사로 보도했으며, 사설들은 남부에서도 유사한 개혁을 할 것을 주장했고 비판은 거의 없었다. 그후 북한과 같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남부 각 도에서 산발적아로 일어났다. 당시 남한 신문들을 숙독하면 한국의 추진력은 북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남부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p.232)

○ "미군정은 1945년 9월 정당신고재를 택한 지 5개월 만인 1946년 2월 정당등록법읓 발표하였다.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체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는 이에 대해 '일제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p.233)

○ "1946년 미군정은 방첩대를 동원하여 좌익인사들에 대해 집요하게 전향공작을 펼쳤다. 급기야 불법적이고 치졸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천 민전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봉암 전향사건으로 이어졌다. 전향공작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점점 심해졌는데, 1947년 10월 민전 경기도 부위원장 작일원의 전향공작시에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p.242)

○ "미군정은 1946년 5월 뚝섬에서 체포된 위조지폐단 용의자 26명 중에 포함된 조선공산당원 한 명을 빌미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미군정 법정은 공산당원 16명에게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p.243~244)
=> 이 사건은 수많은 의혹만을 남긴 상태로 남아있다.

○ 대한민청은 한민당을 비롯한 호남 (친일)지주들의 지원을 받았고, 김두한은 때로 협박,공갈을 구사하여 자금을 충당했다. 친일경찰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활동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권력과 깡패가 본격적으로 야합하기 시직한 것은 이때부터였지만, 단초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p.262)

○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껴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 사람을 특파하여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읓 결성케 하였다. 단장은 이범석. 이범석은 중국의 조선광복군 2지대 사령관을 지내면서 미국 정보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이었다.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했다.(p.267)

○ 19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텔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p.269)

○ 미군정의 좌익 탄압은 교육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무허가 학교 폐쇄령'을 공포하여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를 폐쇄하였다. 또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문맹퇴치운동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좌익이 문맹퇴치를 정치 이데올로기를 삼투시키기 위한 기초공작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p.272)
=>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학교, 학원, 강습회가 왜 무조건 '좌익'인가? 이것은 미군정이 일제처럼 제국주의적 사고를 지닌 것이고 강준만이 다음에 거론하듯이 전민중의 공부 열기에 따른 자발적인 모습일 뿐이며, 미군정은 좌익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 뿐이라는 걸 왜 인정하지 않는가? 문맹퇴치운동이 '좌익이 이용한 것'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 1946년 7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진행된 국립서울종합대학안(국대안) 파동은 교육 영역이 그렇게 이념적, 정치적 논란의 주요 이수로 등장(?)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국대안 반대투쟁은 미군정 지시 하에 서북청년회와 김두한의 깡패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탄압함으로써 진압되었다.(p.273~279)
=> 강준만 본인도 뒤에서 과정을 밝혔듯이, 교육이 정치적으로 변질된 이유는 미군정과 친일극우가 유도하고 저지른 때문이었다. 어떤 면으로 보아도 미군정이 국대안을 실시할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미군정이 기존 학교시설을 점거하고 파괴했는데, 문맹퇴치와 사설교육기관을 폐쇄했는데 갑자기 조선의 교육을 위해 힘쓴다? 

○ 1946년 6월부터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하여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미군정이 지지하면서 민주의원괴 민전 사이의 논의로 급진전되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의 조건으로 5개항을 제시하고한민당측은 8개항을 제시했다. 미군정은 1946년 9월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박헌영과 이강국 등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좌우합작을 다시 밀어붙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7원칙에 합의했는데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을 한민당이 반대했다. 이에 반발하여 한민당에서 원세훈, 송남헌, 김병로, 김약수 등이 탈당하였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외면했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조직하려고 좌파와 중도파를 이용한 것이다.(p.284~305)

○ 1946년 10월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근거로 민선 45명, 관선 45명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간접선거) 설치를 강행하면서 제2의 중추원으로 비판하면서 여운형을 비롯한 좌파세력은 이를 거부했고, 중도좌파 대부분 사퇴했다. 결국 과도입법의원은 다수의 우파와 친일파 세력, 일부의 중도우파세력으로 구성되었다.(p.306~309)

○ 1946년 9월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는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는 미군정의 탄압에 직면한 좌익계열이 기존의 미군정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이른바 '신전술'의 일환으로 벌인 대대적인 파업이었다. 한달 전인 8월 경찰이 전평 서울본부를 습격하여 문서를 압수하였고, 인민보와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좌익계열 신문을 포고령법 위반으로 폐간시켰다. 미군정은 경찰과 김두한 등 우익단체를 동원해 전평의 총파업투쟁위원회를 습격하여 간부와 노조원을 죽이고 폭행하고 체포했다.(p.289~293)
=> 그렇다면 강준만은 미군정의 정당, 노조, 언론탄압에 무릅 꿇고 죽으라는 것인가? 미군정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탄압에 아무런 입장이 없는 것인가?

○ 1946년 10월 대구에서 "쌀을 배급하라!"며 시작되어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과 민간인 1천 명 이상이 피살되었으며,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에 이르렀다. 10월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루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에서 제반 개력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 대구, 경북의 항쟁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 김두한 등 정치깡패 등의 폭력과 학살은 끊이지 않았다.(p.296~300)

○ 10월 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돈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남로당은 급진화되었으며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p.301)
=> 미군정과 친일파와 극우들이 친일경찰과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농민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두른 것을 직접 보고 겪은 농민들이 이승만을 지지했다? 웃기는 소리. 1948년 단독선거 거부투쟁과 그뒤 빨치산 유격대 투쟁 등을 고려하면 강준만 교수의 염원일 수는 있으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죠. 이승만은 모든 선거에서 부정과 폭력을 일삼았고, 그런 행위가 농촌에서 더 쉽게 먹혀들어간 것 뿐...

○ 미군정의 최대 관심은 '예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 미군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극장에 대해 조선 영화인의 의견에 따라 불하한다고 공언했지만 친일 지주와 친미 자산가, 친일 예술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그 약속을 어겼다. 여기에 1946년 10월 미군정은 영화 포고령을 발포하여 사전허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영화,예술 등에 대한 창작의 자유를 억눌렀다.(p.325~327)

--- 아래부터는 1940년대 2부 ---

○ "미군정과 우익단체들은 전국적으로 열린 민전 주최의 1947년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탄압하였다. 부산과 제주도 등 지방에서는 경찰 발포로 16명이 죽고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p.19)
 
○ "제주도에서 발생한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사상이 바로 그 다음해에 일어난 비극적인 4.3항쟁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씨앗이 되었다. 경찰이 사과하고 수습했으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군정은 사건을 크게 키우려고 작정이나 한 것처럼 계속 적반하장을 일삼았던 것이다."(p.21)
=> 강준만 교수의 순진함 또는 무지함 또는 비겁함이 드러난 대목. 미군정은 1945년 9월 8일 한반도 남단을 점령하면서 일제의 점령지를 이어받은 '점령군'으로 스스로를 자임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점령군으로 행사하면서 남한 민중의 자주적 자발적 독립국가 건설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는데 이제와서 3.1절 발포사건과 수습과정을 문제삼는 것은 왜??

○ "미군정과 우익의 3.1 기념대회 탄압에 항의하여 전평은 3월 22일 전국 총파업을 진행하였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민전과 그 산하단체들을 습격하였다. 3월 29일까지 3천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독립투사이자 민족혁명당 김원봉도 검거되어 노덕술 등 친일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p.21)

○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신탁통치반대'의 현수막이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p.39)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 씨 집권과 그의 타라그 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 찬성 = 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논리의 의미를 내가 꿰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추종세력이 '반탁'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p.39) - 리영희 <역정>(창비 1988) 중에서 재인용

○ "미군정은 2차 공위 시작 전인 1947년 5월 17일 법령 제161호를 공포하고 6월 3일 남조선과도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과도정부의 한인 고위관리 115명 중 70명이 일제 총독부에서 관직에 있었으며, 23명은 일제 하에서 공공 및 개인기업의 소유자, 지배인이었다. 전체 줓 조금이나마 항일활동 경력을 가진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p.44)

○ "1948년 2월까지의 미군정 각 부처장급 한인 고위관료 30명의 출신지역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북 출신자들이 39%였는데 이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추천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군정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p.45)

[ 2. 백범 김구에 대한 재인식 ]

○ "미군정은 1946년 2월 반탁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치던 우익(?) 지도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켰다. 여기에 1월 김구와 이승만이 결성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명 전원이 민주의원으로 임영되었다. 여운형 등은 불참을 선언했다. 불참한 세력은 이를 일제의 '중추원'으로 비난하였다."(p.221)
=> 이로써 김구와 김구식은 그동안 완강하게 고집하던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스스로 부정해버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왜 이런 들러리 단체에 참여했는가? 미군정의 협박과 정치자금 때문에??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첫 번째....

○ "민주의원 설립 후 김성수가 사적으로 100만 원을, 대지주 중심의 단체인 대한경제보국회가 200만원을 기부했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해방정국의 '3거두'를 비록한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물론 이승만은 따로 1천만 원을 제공받았다."(p.223)
=> 친일파들에게 정치자금을 받고서 친일파를 청산할 수 있겠나?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번째....

○ "1946년 3월 1일, 평양역에서 진행된 3.1 운동 기념식에서 김일성에 대한 폭탄테러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이 테러 미수사건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염동진이 이끄는 백의사라고 하는 전문 테러단체가 김구와 신익희의 지시에 따라 저지른 짓이었다. 암살단은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을 갖고 있었다."(p.230)
=>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세 번째.... 임시정부와 김구, 김규식, 신익희 씨에 대해 결정적으로 실망한 대목. 해방 후 그많은 친일파와 일제부역자들에게 테러 한 번 못하고 정치자금을 받으면서 자주독립통일국가를 꿈꾸었다니..

○ "1946년 3월 22일 미소공동위원회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반탁투쟁을 했어도 삼상회의 지지를 표명하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좌익과 우익의 합작파는 즉시 찬성을 표했지만, 김구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승만은 한 달 후 공동성명 5호에 동의했다. 그래도 여전히 민주의원 일부가 지지를 거부하자,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와 사전 상의없이 신탁통치 여부를 불문에 붙인다고 발표했다."(p.236)
=> 김구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네 번째....

○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 전주, 이리, 군산에서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6월 11일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회의 진행시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 이승만 박사에게 복종라기를 맹세합시다'라고 외쳤다.  이승만이 민족통일본부라는 단체를 만들었을 때 김구는 부총재에 취임했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하게 대접했다. 김구의 그런 지원으로 이승만은 우익진영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p.258)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다섯 번째 이야기...

○ 1946년 봄 300명이 모여 대한민주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조직원은 종로,명동 일대의 폭력조직 대부분이 망라되었다. 명예회장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회장은 유진상, 감찰부장은 김두한이었다.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염동진이 만든 테러단체 백의사 비밀조직원인 김두한은 극단적으로 반공을 내새운 깡패였다.(p.260)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섯 번째 이야기...

○ 이승만과 김구가 가장 믿음직한 단체의 하나로 아끼고 사랑했던, 반탁학생연맹의 후신인 전국학생총연맹이 1946년 7월 결성되었다. 김구와 조소앙은 청년,학생단체의 소속원들이 체포되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시켰다. 이들 단체의 자금은 김성수로부터 나왔다.이 단체는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김두한은 자신이 1947년 근로인민당의 당사까지 빼앗아 이 단체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했다.(263)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곱 번째 이야기...

○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 1946년 3웣 10일에 결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결성대회에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대한노총은 출발부터 단순한 노동자 조직이 아니라 우익 깡패와 정치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대한노총의 조직은 미군정 차원에서 구상되고 실련되었고,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대한노총의 제1차 대의원대회에서 총재에 이승만, 부총재에 김구, 전진한을 다시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p.294~295)
=> 김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여덟 번째 이야기...

 

[ 2013년 1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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