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시대 임동진의 서재 8
토머스 페인 지음, 임동진 외 옮김 / 알토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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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저, 박홍규 등 공역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을 읽고 / 2012. 10., 402쪽, 알토란

18세기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했던 하여 지지했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 그는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두 번의 근대 혁명에 모두 뛰어든 드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근대 혁명에 대한 토머스 페인의 역할이나 참여보다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몇 권의 책에서 보여준 그의 놀라운 사상과 정치철학, 그리고 종교관이었다.
그의 저서 <상식 Common Sense>과 <인권 Rights of Man>가 근대 서구사회에 '상식'과 '인권'이라는 개념과 정의를 처음 일깨워 주었다면, 이 책 <이성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정부와 인민들, 그리고 종교인들이 썩어문드러진 기독교를 상식과 인권과 이성에 맞게 변하도록 재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구 근대사회에서 '이성'이 자리잡기 위해 100년이 걸렸던 과정을 토머스 페인의 유골분실 사건으로 보여준 폴 콜린스의 <토머스 페인 유골분실 사건>을 읽고서 프랑스대혁명을 다시 공부하다보니 프랑스혁명에서 중세 카톨릭이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카톨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페인의 <이성의 시대>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과 페인의 유골이 서구 방방곡곡을, 구천을 떠돌면서 학대받은 이유가 바로 같은 책임을 알게 되면서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대혁명은 비단 절대왕정에 대한 항거에 그치지 않고 기성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 따라서 왕정의 전보과 동시에 프랑스 전역에서는 부패한 기성교회의 구습을 절멸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사제들을 추방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토머스 페인은 이때 비단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전역과 미합중국을 상대로 하여서도 이제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성을 찾아야한다는 계몽운동에 나설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이 책의 집필로 연결된 것이다.

페인이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르네상스시대 이래 서구에서는 과학적 발명과 지리적 발견 등을 이루었고 이로부터 수학, 기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이 발전되었다. 이런 모든 발견은 인간이 우주에서부터 물질과 생명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질서를 탐구하고 그 원리를 생활에 응용하는 데에서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근대 계몽가들은 우주를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한 신적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즉 무신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신앙인이 유일신에게 기도하고 무조건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고 천당에 간다는 식의 인격신 개념만큼은 철저히 부정했다. 토머스 페인도 이런 신관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유일신(one God) 이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삶이 끝난 후에도 행복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으며, 종교적 의무란 올바른 일을 하고 자비를 베풀며 더 나아가 우리의 동료 피조물들을 행족하게 만들기 위하야 노력하는데 있다고 믿는다.”(p.05)
"나는 유대교당과 로마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와 마호멧 교회(Turkish Church)와 개신교회와 그 이외에 내가 아는 그 어느 교회의 교리(creed)도 믿지 않는다. 내 마음이 곧 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이건, 기독교이건, 마호멧교이건 간에 나에게 제도권의 교회(national institutions of churches)는 하나같이 인류에게 겁을 주고 인류를 노예화하고 또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기 위한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p.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인은 자신과 다른 종교인들과 신자들의 믿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선언을 한다고하여 내가 나와 달리 믿는 사람들을 비난(condemn)코자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내가 나의 믿음을 가졌듯이, 그들 또한 자기의 믿음을 가질 똑같은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정신적으로 스스로에게 충실할(faithful to himself) 필요가 있다. 불신(infidelith)이라 함은 믿거나 안믿거나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믿는척 꾸미는데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믿는양 가식을 꾸밀 정도로 자기마음의 순결성을 타락시키고 스스로를 돈에 팔아넘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다른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p.06)
마지막 문장은 한국 종교계에서 숱하게 나타나는 저질 종교인과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말해주는 대목 같다.

페인은 이 책에서 중세 기독교의 기복신앙 등 인격신 개념과 성경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단지 성경의 내용과 구절에 기초하여 비판한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고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그는 구약성서에서 유대민족이 다른 족속을 정복하게 되면 남녀노소의 구분없이 심지어 갓난아기조차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잔악함에 치를 떨면서, 만약 그것이 구약에 적힌대로 하느님의 명령이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에 다름아닐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만약 인간이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에게 삶과 존재를 허용한 넉넉하고 너그러운 신적 존재를 인정한다면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베풀 의무가 있으며, 심지어 동물에 대한 학대조차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시대에 앞선 주장까지 한다.
그는 또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원수에게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어놓으라고 한 말은 비겁한 수작이라며 정면에서 반박한다. 원수에게 당할수록 더 사랑하라는 말도 결국 범죄를 조장하는 소리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인격신을 내세워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게하는 신앙체계로 서구에서 제도권에 진입한 기독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권력과 재물이며, 그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은 공포와 강제라는 것이다.

토머스 페인을 21세기 대한민국으로 초청한다면 그는 한국사회를 보며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이성의 시대>보다 더 강도 높은 비판을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참사에 대처하는 행정부와 국회와 언론과 종교를 보면서 한국민중들에게 18세기 말 프랑스의 인민들처럼 혁명을 촉구하고 기존 권력을 타도하고 종교인들을 추방하라고 소리 높일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무시하더라도, 만약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썼다는 복음서들이 마태, 누가, 마가, 요한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면 그 복음서들은 처음부터 협잡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네 복음서의 역사기술이 뒤죽박죽이라는 점, 한 책에서 전하는 내용이 다른 책에서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않는다는 점, 네 복음서간에 서로 불일치하는 것이 수두룩하다는 점 등은 결국 이 책들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도 한참 후에, 그것도 저자들간에 아무런 횡적 연락조차도 없이 각자 고립된 상태에서 마치 자기들이 이를 직접 경험한양 자기들 나름의 이야기를 꾸며낸 것에 불과하고, 사도들처럼, 서로 긴밀하게 공동생활을 영위하면서 써낸 글도 아니어서, 결국에는 구약에서처럼 책 제목에 붙여진 이름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p.302)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때로부터 약 350년쯤 뒤에, 내가 말하고 있는 이런 부류의 글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손에 흩어져 있었는데,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가진 성직자계급 내지 교회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것들을 수집해서 우리들이 지금 알고 있는 신약이라고 불리는 경전 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수집한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어느 것이 될 수 없는지를 투표로 결정했다.”(p.331)

“인간이 만든 그 모든 종교의 체계들 중에서, 소위 기독교라는 것보다 더 전능자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인간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이성에 반하며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은 없다. 믿기에는 너무 불합리하고, 확신하기에는 너무 불가능한 것이 많고 실천하기에는 앞뒤가 모순되어서, 기독교는 감동을 주지 못하고, 단지 무신론자나 광신자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것은 권력의 추진체로서 독재의 목적달성을 위한 주구로 되고, 축재의 수단으로서 사제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뿐이다. 보편적 인간의 선에 관한한, 그것은 당장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p370)

[ 2014년 8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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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죽이기
강준만 / 개마고원 / 1995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강준만 저 <전라도 죽이기>(1995.11, 376쪽, 개마고원)

이 책은 1995년 중순 출판계 뿐 아니라 정치권에게까지 큰 화제가 되었던 강준만 교수의 역작입니다. <김대중 죽이기>와 더불어 강 교수의 책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지역주의, 지역감정,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논란이 있었고,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전두환-김영삼 독재정권의 고의적인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실체를 알게되었습니다.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죠.

서평을 쓰기 전에 먼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이 책은 이미 서점가에서 절판된 책입니다. 중고책도 별로 나오지 않아 책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전국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기도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급적 비싸더라도 책을 직접 구입하는 편입니다. 책 값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음식값이나 술값, 휘발류값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고, 출판계의 어려움도 이미 아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새책이 없으면 중고책을 찾고, 중고서점에도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습니다. <제국의 슬픔>이 대표적이었죠.

1990년대 후반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책이면, 당연히 전국의 도서관에 충분히 비치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도서관에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음모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상식과 이성, 양심과 합리성이 실종된 대한민국입니다.

이 책은 제가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해온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의 뿌리와 근본적인 문제점, 해결방안을 이번에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 '지역차별' '지역감정' 그리고 '지역패권주의'를 창조(?)한 것은 박정희 일당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밀리자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불법부정선거로 당선된 이후 그리고 1972년 유신쿠테타를 일으킨 이후 본격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강행하여 남한의 주권자들을 동서로 갈라놓았습니다.

"1971년 이전에는 적어도 지역감정이 정치적 이념을 능가할 만큼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1971년 이후 16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지역감정이 전국적으로 득세할 수 있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역감정의 격화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시기에 지역패권주의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고, 지역감정의 격화는 지역패권주의의 당연한 결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지역패권주의가 등장하여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갈등을 유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패권주의자들의 교언과 요설에 현혹되어 이를 과거의 지역감정의 연장선상에사 이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처럼 지역 감정 자체는 정치적 행위와는 직접적 관게가 없고, 다만 개인적으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인데, 여기에 지역패권주의자가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감정을 지역패권주의의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지역갈등을 극대화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이슈가 지역감정에 함몰되어 결국 지역패권주의 정권의 계속 집권이 가능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역감정도 지역패권주의의 중요한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p.46)

우리는 보통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을 정치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술수' 정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 당연시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무시하게 되죠.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에 대한 일화를 통해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여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야말로 오늘날 가장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그 지긋지긋한 지역갈등을 낳게 된 근본 원인 중의 하나다. 경부고속도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가 지역불균형 발전의 악순환을 낳게 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의 재판이라 할 경부고속전철이 추진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노태우 정권 당시 야당이 고속전철 건설을 반대하자 노태우는 '고속도로 놓을 때 반대했죠. 어떻게 됐나 봅시다. 고속전철 놓는 걸 반대하면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이 고속도로를 반대한 이유를 전혀 몰랐다. 당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었다.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은 좋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됐다. 먼저 국도를 전부 포장해 물동량이 전국에 걸쳐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고도 지나치게 몰린 구역이 있을 때 거기서부터 고속도로를 놓자'고 주장했다.
'국도 포장율이 40%가 안 되는 상태에서 서울과 부산 간에 고속도로를 놓으니 모든 물동량이 경부축에만 몰리고 지역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리고 부산, 울산 등 영남지역도 공해와 교통난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냐?'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노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속전철을 논의하던 노태우 김영상 정권 당시 호남선, 전라선은 철도 복선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남선 복선화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와 동시에 완공했고, 전라선은 2010년에 순천까지 복선화되었다.)
대신 '고속전철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먼저 뚫고, 경부고속도로를 하나 더 만들라'고 충고했다. 경제는 총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배분이 잘못되고 지역불균형, 교통, 공해문제 등 부작용이 유발되면 건전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경부고속도로나 경부고속전철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필시 경제적 입지조건을 들고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적 입지조건이 호남, 충청, 경기보다는 영남이 유리하니 전체 국익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지역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돈으로 따질 가치도 없단 말인가?
도로와 철도에 있어서의 차별은 일단 그것이 저질러지면 나중에 차별이 자연스럽게 '시장기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적인 차별이다. 고속전철에 있어서도 상식 이하의 호남차별이 지금까지 대담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이유도 교통체계에 의한 차별이 갖는 매력을 영남패권주의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48~49)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과 같은 방식으로 지역차별적인 경제정책을 차별적으로 집행해 놓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울산, 구미, 창원 공업단지와 항만 등이 대표적이죠.
그렇게 저질러 놓고 나중에는 기존에 저질러 놓은 시설과 구조를 이유로 '경쟁력' 운운하면서 더 많은 세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이후에는 세금을 쏟아붓지 않아도 경제논리, 시장논리로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이 작동하는 것이죠.

책장을 넘길수록 지역주의 정치의 근원, 정치적 의도,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등이 단순히 지역주의 정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계급계층적 배제와 차별에도 뿌리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된 1995년 이후 거의 20여년이 지난 현재는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가 줄어들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997년 말 IMF 사태와 2008년 국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차별 구도는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구도까지 확대되었고, 특히 후자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지역은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지역차별 또는 지역패권주의는 다양하게 작동합니다. 정치 행정 법조 언론 학계 기업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인맥을 구성하는 세력들의 움직임에서 가장 큽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들어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역패권주의가 인맥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최근의 주요 직책과 출신지역을 통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김기춘(거제) 청와대 비서실장, 정의화(창원) 국회의장, 양승태(부산) 대법원장, 조희대(경북경주) 대법관, 김진태(경남사천) 검찰총장, 박한철(부산) 헌법재판소소장, 박 만(경북구미) 방송통신위원장, 황찬현(경남마산) 감사원장, 유영익(경남진주) 국사편찬위원장, 강신명(경남합천) 서울지방경찰청장, 최동해(대구) 경기지방경찰청장, 김규석(경북)댓글담당 현국정원3차장, 이정회(대구)새 댓글수사팀장, 조영곤(경북영천)서울지검장 악어눈물검사, 김석기(경북경주) 전서울지방경찰청장-용산참사지휘-공항공사사장, 김용판(대구) 전서울지방경찰청장-국정원수사 은폐엄폐조작 무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민주정부'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를 해소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만, 그런 노력은 사회구성원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였고, 이명박 정권 들어서부터 오히려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 기사 : "국세청 고위공무원 41.2%가 대구경북 출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7992)
"고위공직자 영남비중 36%…지역편중"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6/03/0505000000AKR20130603073000001.HTML

강준만 교수가 '전라도 죽이기' 즉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하는 방향도 적절하고 공감이 됩니다. 즉 전라도에 대한 차별은 '호남인'만의 차별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지역차별, 소수자에 대한 차별, 약자에 대한 차별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강준만 교수에 대한 존경이 조금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그의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차별에 대한 저항'이고 '불의한 정치에 대한 질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머리말 제목을 "때로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로 달았습니다.
원래 정치(政治)라는 단어는 인간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목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대상 중 '권력'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을 때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는 양심 뿐 아니라 사실, 진실, 정의, 자유, 평등 등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소중한 가치들을 '강간'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입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분명 '차별'을 받아온 지역이다. 앞으로 호남인들을 차별받는다고 말을 할 때엔 반드시 충청도와 강원도 사람들을 끌어안고 들어가라. 어디 충청도와 강원도뿐이랴. 제주도, 경기도, 경상도, 아니 서울까지 포함해 모든 지역의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라. 그 점을 명심하지 않고선 호남인들의 차별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은 그 투쟁에 동참할 수 있는 막강한 동지들을 오히려 적으로 만드는 지금과 같은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호남인만 사람이 아니다."(p.213)


[ 인상깊은 문장 ]

"나의 적은 오로지 차별일 뿐이다. 나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 지역차별에, 학력차별에, 신세차별에, 남녀차별에, 빈부차별에 저항한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차별은 꼭 척결되어야 한다." (p.08)

"고문보다 더 무서운 건 부드러운 세뇌다. 우리 국민은 60년 넘게 각종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밥상머리 교육에서부터 텔레비전 교육에 이르기까지..." (p.33)

"한국대학에 패거리는 있어도 지식인은 없다. 그걸 정확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식인의 위선과 기만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인이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사람은 없으며,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지식인일 뿐이다" (p.140)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투쟁은 모든 차별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인권의 문제라는 말이다. 예컨대 여성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그 투쟁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지역차별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p.143)

"선생님이 전라도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전라도 사람을 증오하는 선생님의 '죄'를 보기 때문이며, 선생님의 떳떳지 못한 양심이 그것을 견딜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p.180)

"한 아이가 돌을 던지면 다른 아이들도 돌을 던진다. 돌을 던져 놓고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인지 돌 맞은 대상은 돌을 맞을 만하다는 자기기만을 일삼는다. 그것이 바로 남들을 따라 '지역차별'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보다." (p.255)

"호남차별 심리에 물들어 있는 보통사람들이 호남의 몰표를 비웃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심리를 이해는 한다 해도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지역감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 호남 몰표를 호남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87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과 무관하지 않은 노태우 후보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92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들과 합당해 후보로 나선 김영삼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인가?"(p.258)

"순도 100%의 도덕성을 강조하겠다면, 인권유린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군사정권 치하에서 무난히 살았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학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독재자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우리 정치판에 대해 좀 더 깊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p.373)

[ 2014년 8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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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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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서평]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저, 역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 :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모든 리더를 위한 장 자크 루소의 제안>을 읽고 / 2011. 02., 288쪽, 산수야


'세월호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해야할 일 중 하나가 스스로 나태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라 다짐하며...'


프랑스혁명사를 공부하다 보면 당시 혁명가들 중 상당수가 이 책 <사회계약론>을 들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루소가 1761년에 썼던 책이 30년 가량 유럽 대륙 전역에 사상적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서구의 근대사상과 역사 나아가 현재까지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서구의 사상, 문화, 제도가 어디서 기원하고 전개되어 왔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18세기의 프랑스는 새로운 이상과 체제를 모색하는 전환의 시기였다.(당시 한반도와 동양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쪽은 왜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는지...) 사회현상은 정치에 따라 좌우되므로 루소의 방대한 사상체계의 핵심은 정치 사상이 된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봉건적 토지 소유와 신분적 지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 시대에 민중들과 함께 생활한 루소는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절대주의라는 사회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고 자격이며, 인간으로서의 가치였다.


루소는 1749년 "본래 선하게 태어난 인간은 사회와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라는 명제로 논문 공모전에 응모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이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된 것인가?"라는 명제의 논문 공모전에 응모했다. 그는 이 논문을 발전시켜서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하여 현대 사회의 타락과 불평등의 기원은 사회쟈도 자체에 귀착된다고 재시했다. 

불평등 기원에 대한 그의 주장은 "농업과 연금술에서 노동의 분할과 상호 의존관계를, 농작에서 소유가, 소유의 불평등이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법을 만들어 지배자로 군림한다. 결국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제체제를 생겨나게 하여 사회의 불의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루소와 같은 학자가 있었고 그의 논문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학교와 학계, 정치문화계에서 거대한 한 편의 흐름으로 끊임없이 논의되고 탐구되기 때문에 서구사회는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사회적 불평등 및 부의 불평등과 싸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서구에 비하여 동양사회는 인권이나 인간평등론에 기초한 이론이나 주장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채 19세기부터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직면한 셈이다. 제국주의적 침탈의 사상문화적 근거는 루소류의 사상보다 지배자들의 사상, 자본주의적 사상, 제국주의적 사상이 토대였던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다."

<사회계약론>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글이다.


루소가 이 책을 통해 힘의 근원, 정당한 권리, 만민평등, 주권자의 개념, 일반의지, 사회 상태 또는 국가 구성과 관련해 인간이 맺는 관계 그리고 '사회계약'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루소는 특히 '주권자'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설파함으로써 중세 이후 절대권력이라는 개념에 균열을 가져왔는데, 서구 대부분 지역에서는 <사회계약론>이 자유민권사상을 전파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는 사회 구성과 인간 교육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고, 주권자의 개념과 자유민권사상은 프랑스혁명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프랑스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던 당시로서는 너무나 혁명적인 사상이었기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수많은 찬반양론의 중심에 서 있던 <사회계약론>의 자유민권사상과 이상적인 민주주의사회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하며, 자유, 정의, 평등, 법, 인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그 맹아를 보이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정치학의 고전이다. 이 책은 루소의 모든 저작물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심오한 것으로 인간의 선한 본성과 천부적인 자유를 토대로 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와 정부 수립을 논의하고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개인의 행복에 대한 열망과 사회생활의 요구 사이에도 조화와 균형을 찾으려고 했으며, 참된 정치의 원리로 전체의사의 존중과 시민의 자결권, 그리고 주권을 제시했다. 또한 루소는 공동체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을 결정지을 정당한 권리가 있음도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정하고 있다.


한국애서 근대 제도라 할 수 있는 헌법이나 법률, 정치나 정당,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 등애 관심을 갖거나 그 속에서 활동하고 싶은 이들은 근대 제도의 탄생과 전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루소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다.

막연히 자신이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탔다고, 돈을 벌어 사회에 공헌한답시고, 특정 정치인에게 줄을 잘 섰다고 하여 정치가 무엇인지, 정치사상이 무엇인지, 근대 제도의 근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뛰어드는 이들은 아이들과 후손들을 위해 제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 인상 깊은 대목 ]


"어떠한 인간도 자기 같은 인간들에 대해 자연적 권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힘은 어떠한 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계약만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합법적 권위의 토대로 남게 된다."(p.18)


"일본의 약장수들은 구경꾼들 앞에서 아이의 팔다리를 잘라 하나씩 공중으로 던져 올린 뒤 완전히 다시 합쳐진 아이가 살아서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우리 정치 이론가들이 부리는 재주도 거의 이런 식이다. 장터에서 선보여도 될 만큼 능수능란한 솜씨로 사회라는 몸통의 팔다리를 절단한 뒤 재조립하기(그 방법은 알 수 없으나) 때문이다."(p.41~42)


"사전에 어떠한 계약도 없다면 선거가 만장일치도 아닌 다음에야 소수가 다수의 선택을 따라야 할 의무가 어디 있는가? 

다수결의 법칙도 그 자체가 이미 계약으로 이루어진 만큼, 적어도 한번은 만장일치의 결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p.48)


"(인간의)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이므로 결코 양도될 수 없으며, 주권은 오로지 집합적 존재이므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p.69)


"(인간의)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분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전체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p.72)


"법을 만드는 사람은 법이 어떻게 집행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행정권이 입법권과 결합된 것보다 더 나은 체제는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이 정부를 어떤 점에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구분되어야 할 것들이 구분되지 않고 군주와 주권자가 같은 사람이 됨으로써 이를테면 정부 없는 정부가 만들어질 뿐이기 때문이다."(p.90)


"나는 또 여러 도시를 단 하나의 국가도시로 결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며, 이렇게 결합시키면 자연적 장애를 피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겠다. 작은 나라만을 원하는 사람에게 큰 나라의 폐단을 내세우며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큰 나라에 저항할 만큼의 힘을 어떻게 작은 나라에 부여할 것인가* 옛날에 그리스 도시들이 대왕에게 저항했고, 최근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오스트리아 왕가에 저항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만일 국가를 적절한 크기로 축소시킬 수 없다면 아직 한 가지 수단이 남아 있다. 즉 수도를 절대 허용하지 말고 정부를 각 도시에 번갈아 자리 잡게 하며, 그 나라의 신분을 대표하는 모든 의원을 정부가 자리 잡은 그 도시로 소집하는 것이다."(p.123)


"입법권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속해 있으며 국민에게만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p.131)


"그 자체의 본질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협약이다. 왜냐하면 시민적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그의 동의 없이는 그를 예속시킬 수 없다." 


"아이에게 가르칠 학문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인긴으로서의 의무이다." - 루소 <에밀>


"법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법의 경직성은 경우에 따라 법을 해로운 것으로 만들고, 그 때문에 위기에 처한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형식과 절차를 내세우다 보면 시간이 소요되어 이따금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때도 있다. 입법자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부 다 예견할 수는 없다고 느끼는 것은 꼭 필요한 선견지명이다. 그러므로 정치제도를 확립하려다가 그 효력을 정지시키는 권한마저 제거해버려서는 안 된다. 스파르타인들도 그들의 법을 잠재운 적이 있었다."(p.163)


"정치생명의 원리는 주권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상징이고 행정권은 다른 부분을 움직이게 하는 두뇌이다. 두뇌가 사라져도 개인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입법권에 의해서다"(p.187)


"상업 예술의 난립, 이득의 탐욕, 나태 안락의 욕망. 이것들은 개인적 봉사를 돈으로 바꾼다.

자유로운 국가에서 시민들은 의무를 면제받기 위해 돈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돈을 내고 모든 것을 자신의 두 팔로 한다" (p.197)


[ 2014년 6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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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
김호 지음 / 책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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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호 저 <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을 읽고 / 2013. 5., 360쪽, 책문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당 5억'이라는 충격적인 이름으로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든 법원의 판결이 크게 논란이 되었다. 법과 법관이 형벌의 형평성 원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400억원대의 벌금·세금을 내지 않고 출국한 뒤 뉴질랜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모습이 포착된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구치소 노역 ‘일당’을 5억원으로 정하는 등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것은 ‘전관예우’와 지역법관(향판)제의 문제점이 맞물려 가능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08년 12월30일 광주지법 형사2부는 허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덜어주는 ‘작량감경’을 적용해 검찰이 구형한 벌금 1016억원을 절반으로 깎았다. 벌금 508억원을 내지 않을 경우 일당을 2억5000만원으로 계산해 203일 동안 구치소에서 일하게 했다."(관련기사 : "‘먹튀 회장님’ 노역 일당 5억 판결은 전관예우·향판제의 합작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212.html)

신문기사는 '전관예우와 향판제'로 인해 '황제 노역'이 가능했다고 분석하지만, 허재호와 장병주 사이에 발생한 '법의 균형 상실'은 이미 과거에도 숱하게 발생한 바 있다.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하루 일당은 1억 1천만 원, 그리고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벌금 400억원을 선고받았는데, 실제 노역비는 하루 1억 원이었습니다."(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3_201403241135161476)

실제로 한국사회는 80년대 후반 헌법이 개정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 사법부의 '균형감을 상실한 판결'을 수차례 목도하여 왔고, 사법부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헌법을 임의대로 '해석'하면서 주권자들의 사법권력에 대한 불신을 키워 왔다. 주권자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물론 공공부서나 공직자의 '무소불위'와 '전횡'이라는 문제점은 사법부 뿐만은 아니다. 청와대, 경찰, 검찰, 국방부, 법원 등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공공기관이 오히려 불의와 불법에 앞장서는 최근 몇 년을 겪으면서 이 책을 읽으니 대한민국의 공권력과 사법체계는 조선왕조보다 못한 것 같다.
"조선 왕조체제와 대한민국 체제는 껍데기만 다른 착취수탈 체제'라는 어떤 학자의 분석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법률을 채택한 대한민국의 현재가 왕조와 사대부 세력이 갈등, 공존하며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조선시대보다 나은 면이 있기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1822년, 현대인들에게 '시대의 선각자'라 불리우는 다산 정약용은 백성들이 소송을 통해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촌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해도, 그 일이 권세 있는 아전이나 간악한 향리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 노여움을 살까 봐 겁이 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결같이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리니,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다산이 보기에 스스로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병든 아이와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호소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산은 소송을 통해서도 제대로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 형법서 한 권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흠흠신서]다. 
인명에 관한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뜻에서 ‘흠흠신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책은, 다산이 지방관들을 위해 중국과 조선의 법전들과 재판 때 쓰던 조서 등을 모으고 정리한 뒤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형법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다산이 제시한 원칙과 방법으로라도 조선의 형법체계가 구성, 운영되었다면 조선 후기의 비극적인 상황이 변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이런 형법서를 편찬했다고 해서 다산의 생각과 원칙대로 조선시대의 형법이 운영된 것은 아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조선시대 후기에 대한 주된 평가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표현되듯이 다산이 살았던 시대 전후로, 특히 19세기에는 조선의 국가 운영체제 자체가 기득권자들만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기에 그에 따른 민중(백성)들의 저항과 민란이 19세기 내내 끊이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다산이 [흠흠신서]에서 문제제기하는 여러 재판이나 형벌집행을 보면, 조선시대 후기에는 친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관용을 남발하거나 사적인 감정이나 신분질서에 근거하여 엄한 형벌을 내리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검찰과 법원, 그리고 정치권과 재계와 언론과 학계가 결탁하는 모습은 19세기 초 조선왕조의 사법관리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이다. 
저자가 풀이한 다산의 [흠흠신서]는 형법의 원리나 원칙의 측면에서 근대 사상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산의 사상은 토지와 권력을 소유하는 왕조-사대부 계급과 그들의 소유물이자 지배를 받는 평민-하층민이라는 지배-피지배 권력체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산은 "법의 수단에 기대기보다 덕의 교화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유교이념의 원리"에 입각한 형법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흠음신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할 수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주권자의 권력을 위임받아 일시적으로 행사하는 사법부와 검찰, 경찰의 일상적인 부정부패와 정치권과 재계의 전횡과 부정부패, 그리고 이를 감시, 감독,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결탁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모습은 19세기 조선 왕조, 부패기득권 체제의 부활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 [흠흠신서]를 번역한 저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야 가능한 일이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는 행동이 늘어나야 가능하다. 다산의 절절한 마음이 오늘날까지 울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공정한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불의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다산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다산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관리들이 이 땅에 진정한 정의의 마중물을 부어 주길 바랐다. 정의가 흐릿해지고 금권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을 보면, 그가 꿈꾼 정의와 정의로운 나라의 모형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듯하다."

적어도 사법고시나 로스쿨을 졸업하여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산의 [흠흠신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익보다 헌법과 정의와 양심을 되찾기를 바란다.
이 말은 검찰과 형사법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법조인이라고 주창하는 이들 중에서도 사적 감정이나 편견에 무릅을 꿇고 양심과 근거를 멀리하면서 정치논리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조인들이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감싸고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이 법조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존중받으려면 '법조인'으로 대우하고 존중하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전문권력을 위임한 주권자들 편에 서야 할 것이다.

[ 2014년 4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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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 외 옮김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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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저, 한기욱 등 공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를 읽고 / 2001. 10., 751쪽, 창비

박세길, 조성오, 한홍구, 강준만 등 국내 역사학자들의 한국 근현대사를 읽은 후, 미국인 역사학자로서는 드물게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전공으로 하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 대학 교수의 현대사 서적을 반갑게 읽는다. 그는 1986년에 첫 발간한 <한국전쟁(Korean War)의 기원>으로 한반도에서도 많이 알려진 편이다.(두 책 모두 '한국(인)'은 'Korea(n)'으로 남북을 아우르는 표현이며, 역자들이 번역상 편의 때문에 한국(인)으로 표기한 것 같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발간한 이후,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불행하게 이끈 원인과 남북한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이라는 과점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1997년 이 책을 다시 발간했다. 한국어판을 위해서 특별히 원고지 150매 정도를 추가했다고 한다.

책의 원제목은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다. 저자는 원 제목이 '해 뜨는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로 우리의 흥망성쇠와 주기적인 일식을 관장하는 세계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선진산업국들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는 산업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태양게에 한국은 이제 막 합류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제목에서 의미한 바이기도 하다."
커밍스 교수와 <한국현대사> 한국어판이 반가운 이유는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책을 발간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를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 문장으로 말한다. "이 책을 한국인(Korean)의 화해와 통일에 헌정하고 싶다."

몇 마디 문장이 아니라 실제 책을 읽은 후 국내 역사학자들의 역사서와 비교했을 때, 커밍스 교수의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두드러진 차이는 한민족의 5천년 역사 전체에 연속적으로 이어져오는 사상이나 철학, 또는 사회문화적 흐름, 연관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근대 이전의 한국사에서 '미덕'을 발굴하여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공통된 '미덕'을 발견했음을 주장한다.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 형성된 파벌주의와 학벌주의가 현대의 남북한, 특히 남한에 뿌리깊게 잔존하는 모습과 고구려와 발해의 중국에 대한 저항이 북한의 자주독립 정신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신라가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에 승리한 것이 고려 말기의 원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조선 중기 이후 명나라에 대해, 말기에 청나라에 대해 의존한 모습과 연관성이 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도 기득권층이 대부분 친일파로 변졀하였고 미군정이 들어오자 또다시 미국에 굴종하는 모습으로 이저졌다는 역사적 해석이 독특하면서도 시사점이 있다.(학문적 연구로서 타당성 검증과 별개로...)

저자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이 19세기 말부터 싹트고 자라온 내전이자 국제 전쟁이고, 짧게는 1948년 9월 미-소군의 한반도 점령 이후 자주독립과 통일 위한 전쟁이자 길게는 20세기 초에 시작된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한 자주독립 투쟁의 최종전이라는 성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판단은 결코 바뀐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내 책의 전체적 강조점은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그 복잡한 역사를 알고 있는 한, 수많은 요인으로 빚어지는 전쟁에 대해 어느 한쪽을 비난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p.08)
대부분 학자나 정치가, 언론은 "한국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하지만, 저자는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처럼 한국 전쟁 역시 "언제, 누가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쟁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떤 결말을 맺었고 어떤 교훈을 얻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커밍스 교수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증하고자 하는 내용 중 하나로 독자들이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부분이 바로 위 인용문과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며, 그 내전은 가깝게는 1945년 8~9월 미-소 양 강대국이 한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임의로 한반도를 군사점령하면서부터 자라났고, 길게는 20세기 초 미국-영국-중국-일본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군사적 전리품 나눠먹기식으로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합병시키는 것에서부터 자라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커밍스 교수는 이 책 <한국현대사>에서는 현대의 남북한 체제와 문화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 한반도를 격동으로 들끓게 한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어떤 특징과 장단점을 형성하고 있는지 분석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한민족의 사료와 문서들, 즉 고대사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와 조선에 대해 방대하게 연구했다. 서구인으로서 '미덕(美德)'이라는 한자와 '마음(心)'이라는 한글의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열정이 아름다웠다. 실제 그는 그런 노력을 통해 '미덕'과 '마음'이 한국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거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대 남한의 사회체제와 문화는 물론 북한의 사회체제와 문화도 지난 5천년 간 이어져온 한민족의 전통과 뿌리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전통과 뿌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국인을 비롯하여 서구 학자들 중에서 커밍스 교수만큼 한반도와 한민족에 대한 이해와 애정에 기초하여 한국(Korea)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적다는 것이 한민족으로서는 불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게 열 번이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커밍스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냉전과 전쟁, 분단체제라는 민족사적 불행과 아픔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친일파 후예인 수구세력들이 삭제하고 감추어버린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수구세력이나 친일파 후예들이 아닌 모든 한국인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과 관계없이, 남북 갈등과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을 것을 권유한다.
우리의 자식들, 후손들에게까지 분단의 아픔과 분단을 악용하여 부당하게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려는 악당들에게 이 사회를 물려줄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커밍스 교수의 한국현대사 연구에서 아쉬운 점은  미국인으로서 학자적 입장에서 한반도에서 진행된 사건과 상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관련 자료도 한반도와 한민족에 관한 것들을 중심으로 수집하여 연구한 결과인 셈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입장 또는 미국의 국제관계사라는 관점에서 연구하지 않은 한계는 존재한다. 그것이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나 한홍구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등 국내 역사학자들의 현대사 저술과 다른 부분이다. 일종의 당파성이나 주체적인 관점이 없다고 할까...
그런 면에서 커밍스 교수와 이미 작고한 존슨 교수가 함께 한국현대사를 집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같은 미국인 학자로서 찰머스 존슨 교수는 19세기 이후 미국의 군사외교적 정치경제적 역사를 다룬 <블로우 백>과 <제국의 슬픔>을 21세기 상반기에 출간했다. 그 책 안에는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로서 미국이라는 국가 또는 지배집단이 19세기 이후 자국 내에서 어떻게 작동되어 왔으며, 한반도를 비롯한 제3세계를 상대로 어떤 전략과 행동을 취했는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각 장의 내용 소개와 평가는 아래와 같다.

제1장 '미덕'에서 저자는 근대 한국의 배경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으로 서기 1년부터 1860년대까지를 망라한다. 그는 이 장에서 한국의 과거 중 동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건져내려고 한다. 그는 조선을 봉건국가가 아니라 '농업관료제' 사회라 새롭게 규정한다. 타당한 분석이라 공감이 된다.
이 장은 미국인들, 미국 정치가들이나 행정가, 언론인, 학자,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언어, 장단점, 특징과 고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이 한반도와 한민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포함시킨 단락이다.

제2장 '이익'은 1860년에서 1904년까지를 다루는 근대사의 첫 장으로, 이 시기의 한국은 열강의 출현에 의해 근대의 인장이 찍힌다.
왕조와 사대부들의 기득권 정치와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삶. 사회 전분야에서 변화의 흐름이 일어나지만 이를 제도적 문화적 행정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지배계층. 살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항쟁을 일으키거나 만주로 중국으로 탈출하는 민중들. 제국주의 열강들의 제3세계 침탈과정에서 한반도에 들어닥치는 군사력과 한반도 내 전체 민족과 민중의 삶과 국가를 보호하지 못한 채 좌충추돌하는 지배계층. 민중들의 최대 저항인 갑오농민전쟁과 외세를 등에 엎고 지키지도 못할 기득권을 지키려는 특권층들.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이다.
그동안 국내 제도교육 과정의 국사 시간에 수능과 시험만을 위한 역사교육이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커밍스 교수가 인용하거나 분석하는 내용 중에 처음 보는 정보나 처음 접하는 설명구가 많아 유익한 장이다.

제3장 '망국'은 1905년에서 1945년을 다루는 데, 일본의 한국합병, 즉 한국보다 더 빨리 산업시대에 적응한 일본이 한동안 이웃나라를 올라탈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일제 식민지 강점 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하는 한국인과 일제에 머리 숙이고 기득권을 나누어 가지려는 친일파 매국노들, 그리고 이도저도 나서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존을 영위해가며 버티는 민중들이다. 저자는 국내 언론이나 역사책에 누락되어 있는 친일파 매국노와 항일무장투쟁 등 민족지사들을 이름과 사실 행적과 활동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자료를 근거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해방때까지 일제의 필요에 의해 친일파 매국노 한국인들이 대거 식민지 관료체계에 편입되어 5~8년 동안 집중적으로 동족을 착취, 수탈, 탄압,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제4장 '열정'은 1945년에서 1948년까지, 제5장 '충돌'은 1948년에서 1953년까지를 다루는데, 일본 패배의 잿더미에서 시작해 하나의 반도 내에 자리잡은 두 개의 완전한 분단국으로 끝이 난 한국의 결정적인 위기를 탐사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동일한 장이다. 커밍스 교수는 미-소 양대 강국이, 특히 미국이 애초에 한반도를 군사점령하지 않았다면 한국인들이 스스로 친일파 매국노를 처단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세웠을 것이며 한국이 미래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평가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일부 친일파들이 처단되었다 하더라도 1945년~1953년에 이르는 수백 만명의 인명피해는 없었을 것이고 내전과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해방 후 북한사회이 전개과정을 복기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비록 한반도가 일시적으로 사회주의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민족이 판단하여 선택할 문제이고, 마찬가지로 내전을 통해 수백 만명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설사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몇십 년 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결국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되돌아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이 장들에서 그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과 판단, 군사적 강제점령과 친일파 매국노에게 남한의 권력을 안겨주고 남한을 군사경제적으로 종속시킨 것 등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제6장 '한국의 일출(1953~1997)'과 제7장 미덕 II (1960~현재의 민주주의 운동)'은 끊임없이 쑤셔대는 독재적이고 간섭주의적인 남한 정부 아래에서 산업적 힘으로의 도약과, 상대적으로 산업화되고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국가를 궁극적으로 창출해낸 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바라본다.
6장과 7장은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관련된 장이다. 커밍스 교수는 남한의 경제적 성장과 민주주의 정착이 일부 지배계층의 능력이 아니라 남한 민중들의 피와 땀이 서려 일구어진 성과물임을 강조한다.
남한 지배계층의 외세의존적 태도와 군사경제적으로 미국 등 서구에 종속되어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신라의 지배계층이 당나라를 끌여들여 삼국을 통일한 선례와 그 이후 지속된 외세의존적, 사대주의적 경향과 문화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제8장 '태양왕의 나라, 북한(1953~현재)은 김일성의 북한을 탐구한다.
커밍스 교수는 북한의 정치외교 체제나 문화가 한편으로는 고구려에서 시작된 북방민족의 자주적 독립적 성향과 문화에서 비롯된 측면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말기에 나타난 척사파의 노선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북한이 주체사상과 정치체제 및 문화가 고려 및 조선의 사상문화 중 일부를 승계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저자는 정보와 자료 상의 한계로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을 솔직하게 전제한다.)

제9장 '미국의 한일들'은 처음 미국 영토에 도착한 조선인들을 시작으로 그 이후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미국인이자 한국인으로, 중간자로 자리잡은 재미교포 이야기를 다룬다.

제10장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는 김정일의 권력에의 접근에서 시작해, 1990년 한미 관계의 위기, 한국의 통일전망 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장에서 커밍스 교수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막을 내린 직후인 1990년대를 전후하여 남과 북의 정치외교군사적 변화를 분석하고 특히 냉전체제 해체에 상응하는 북한의 변화와 이에 맞서 한반도에서 냉전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 지배집단의 갈등을 살펴본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탄 개발이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북한의 자위이자 자구책임을 보여주고, 미국이 냉전체제 해체에 맞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평화적인 환경으로 변화시켜야 함에도 미국의 내부적인 사정과 목적으로 북한을 계속 군사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위협하여 결국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개발을 강제한 책임이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 제가 개인 블로그에 이 책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소감을 밝혀놓은 게 있습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사 연구에서 인상 깊은 대목"이라는 제목으로... 64회로 나누어 정리하였으니 궁금하신 분은 링크(http://blog.daum.net/hy2oxy/8691691)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 2014년 3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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