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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30주년 기념판) ㅣ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던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나서 교육이나 학습, 연구, 의식화 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 때 누군가를 통해 '몰래' 추천받아서 읽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저자의 관점과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재수까지 하면서 나름 꿈에 부풀어 대학에 입학했으나 3월 첫 일주일 동안 미적분학, 물리학, 화학 수업을 듣고나서 고등학생 때 꿈꾸면서 동경하던 대학생활이 TV 프로그램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와 전혀 다르다는걸 알아버린 후였다. 대학의 교육은 고등학교 시절 교실의 규모가 좀 더 커지고 고등학교 수업과목에 몇 가지 더 포함시킨 후 '선택'을 위한 강제에 불과했다.
토론과 논쟁은 고사하고 교수는 오간데 없이 조교가 강의실에 들어와 교재를 요약해 설명하고 출석과 주,객관식 시험은 고등학교와 다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선배들에게 들으니 나 뿐 아니라 5~10년 전 선배도 나와 동일한 교재로, 동일한 방식의 수업으로, 동일한 시험을 치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초,중,고 12년간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에 진절머리가 나있던 나였기에 대학의 모습은 충격아닌 절망이었다. 27년이 지난 요즘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1970년 처음 발간된 이 책은 2000년 미국에서 발간된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 피억압자의 교육학) 30주년 기념판의 국역본이다. 우리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아니 어느 한때 금서 목록의 한 칸을 차지했을 만큼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금서 목록에 올라 비합법적으로 유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 학생 들에게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책이자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는 책으로 널리 읽혀진 바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발간하는데 적용된 연구의 대상은 1980년대 또는 2010년대 우리나라의 현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라는 시점의 차이와 더불어 동양권과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졌던 남미라는지역적 특성, 그리고 문맹율(당시 70%)과 경제구조, 종교 등 사회적 특성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브라질의 사정과 한국의 사정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다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 모두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그것은 50년 넘는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저자가 교육과 학습에서 제기하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우리사회 전반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앍는 내내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과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 등 여러 저작들이 오버랩되었다.
프레이리가 인식하는 사회구조는 억압자 대 피억압자의 대립구조였다. '억압'은 폭력을 유발시키는 부당한 질서가 내면화된 결과이며 이는 억압자와 피억업자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인간화의 총체이자 '길들이기'다. 이런 비인간화의 길들이기에 순응하지 않고 의식의 눈을 떠 자신을 찾는 것이 바로 '의식화'다. 사람이 억압의 힘에 더 이상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거기에서 탈츨해서 그 힘에 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의식화'는 '의식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면서 '현실을 변혁시키는 의식적 힘'이다. 의식화는 현실을 단순히 반영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재성찰하는 의식이다. 의식화는 억압적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순종의식에 눈을 뜨고 각성하게 되는 의식이다.
억압자들은 사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태동을 가로막고 그러한 의식을 태동시키는 교육체계를 하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억압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을 재생산해내기 위하여 '은행저금식 교육'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프레이리는 교육방식에 있어 요점정리식 기계적 암기를 통해 지식을 축척하기만 하는 '은행저금식 모델'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은행저금식 교육이 '억압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과 그런 교육의 전제와 개념을 폭로했다. 은행저금식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키게 되고 양자 모두를 '비인간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은행저금식 교육에 대한 획기적 대안으로 프레이리가 제시한 교육은 '문제제기식 모델'이다. 이는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여 상호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결합시키는 문제인식을 갖도록 하는, 곧 이론과 실천의 교육을 지향한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프레이리는 프락시스(praxis)라고 정의했다.
프레이리는 또한 인간집단의 의사소통과 활동에 있어 '반대화'와 '대화'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억압자들은 억압 도구로서 진정한 의사소통을 차단시키는 반대화의 행동이론을 이용한다. 반대화적 행동이론은 정복, 분할통치, 조작, 문화침략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소통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의 수단이다. 대화적 행동이론은 협동, 단결, 조직, 문화통합을 특징으로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요구된다. 대화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대화는 사랑하고 겸손하고 소망을 가지고 신뢰하고 그리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주체적 인간은 '대화적 인간'을 기대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억압자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세계 바깥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어 사물로 전락하는 반면, 피억압자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한 인격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학생들과 교사들이 세계 속에서 주체와 주체로 만날 때 교육은 비로소 교육자와 피교육자,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자유의 실천’이 된다는 것이다.
역자(남경태)는 책의 말미의 해제에서 프레이리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그가 변혁의 대안적 이론으로서 하부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식화 교육)의 연결이 미흡하다는 점, '혁명적 교육'에 대한 언급을 기피한 점, 그리고 '억압'과 '억압자'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주관적이며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받았음을 지적한다.
내가 프레이리의 사상과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역자의 평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할 말이 없다.
교육당국이 말로는 '전인교육' 등을 내세우지만 실제 일류대학을 목표로 교육정책과 학교수업을 진행시키고 사교육을 방치,조장하여 청소년들과 학생들이 입시교육과 성적을 이유로 자살하고 방황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지켜보노라면, 프레이리의 교육관점과 방식이 '꿈나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정부가 재벌과 기득권자를 위해 아이들을 '생각없는' 경쟁의 노예, 소비자 노예, 비정규직 노예를 양성하기로 작심한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굳이 혁명이나 변혁, 억압이나 피억압을 내세우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것이 학습과 교육의 목적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오로자 대학입시를 위해 10대, 20대를 보내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취업을 위해 매달리고 나서 취업을 하거나(이제는 정규직 취업 자체도 바늘구멍이지만..) 전문직에 종사한다 한들 그들의 인생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남는 것은 커녕 그 오랜 과정에서 아이들은 행복이나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자본과 제도의 부속품이 되고 소비의 희생양이 되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죽을 때까지 방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 뻔한데...ㅠ
도대체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원하는가? 자신들도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에 휘말려 개고생하고 있으면서 무언가 집단적, 조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기 보다 아이들마저 학생 때부터 무한경쟁의 정글에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끔 도와주기만 하면 안되는 것일까? 실로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선 교사들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자(선생)이 지식을 알면 얼마나 아는가? 그들이 아이들의 개별 부모들보다 더 잘 알까? 그렇지 않다. 부모들은 나름 자신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일정한 전문가다. 지식이든, 정보든, 업무방식이든, 제도나 이론이든 간에... 아이들에 대해서도 선생들보다 아이들 스스로가 더 잘 안다. 선생들이 학원강사보다 과목에 대한 깊이가 있나? 그렇지도 않다. 선생의 역할은 다른 것이다. 다른 역할 속에서 선생들도 더 배우고 깨닫고 역량을 키워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생의 역할과 권리는 학부모, 학생들의 권리와 역할과 함께 스스로 만들고 갖춰야하는 것일텐데...
[2012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