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이 가을이 새삼스럽기는 지난여름이 별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름이 더운 철이라지만 섭씨 40도라니! 우리 산하를 불태울 듯한 폭염에 하루하루가 불지옥 같았다. 아내와 나는 그 폭염을 잠시라도 피하는 방편으로 춘심산촌 농장을 거의 날마다 찾았다. 숲속의 춘심산촌 기온은 시내보다 보통 2도 정도 낮다.
그러는 가운데 밭 한가운데에서‘아가리를 벌린 채 폭염에 죽은 새끼 독사’를 목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새끼 독사의 최후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넓은 밭 전체가 비닐이거나 잡초방지 매트로 촘촘히 덮여 있는데 그걸 모르고 들어왔으니 막막한 합성수지 사막에 들어선 거나 같아서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새끼 독사의 최후를 목격하고서 나는 어떤 기대를 품게 되었다. 새끼 독사를 낳은 어미 독사 또한 밭 한가운데에 들어와 같은 모습의 최후를 맞을 거라는 기대다. 작년에‘길이가 두 발 넘는 독사 한 마리가 밭 가장자리 돌무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동네 사람들의 얘기가 떠오르면서, 그렇다면 그 놈이 목말라 죽은 작은 독사의 어미가 분명하고 머지않아 모자가 같은 전철을 밟을 게 빤하다는 판단에서다. 그 동안 농사지으면서‘길이가 두 발 넘는 독사’가 혹시 내 가까이 있나 살펴야 하는 엿 같은 부담감이 이번 기회에 잘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내게‘왜 두 독사가 모자지간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드릴 말씀이 없다. 그냥 느낌상 그런 것 같을 뿐이다. 어쩌면‘자기를 낳은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살모사’얘기가 내 잠재의식 속에서 살아나 작용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폭염이 물러갔다. 가을이 찾아왔다.
결론을 말하겠다. ‘길이가 두 발 넘는 독사’가 끝내 밭에 나타나지 않은 채 가을이 온 거다. 새끼 독사가 폭염에 죽은 지 2달 넘도록 어미 독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이제 나의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역시 어미 독사는 새끼 독사와 달리 영리했다는 것을. 영리했다기보다 나름대로 지혜가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 아닐까. 이런 추측이 가능했다. ‘어미 독사 또한 우리 밭으로 한 번은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밭 전체를 촘촘히 덮은 비닐과 잡초방지 매트에서 나는 합성수지 특유의 냄새를 맡고는 발길을 돌렸다. 맨흙이나 바위나 수풀 같은 자연에서 풍기는 냄새 이외의 다른 냄새는 위해한 사물들에서 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오랜 세월의 경험과 지혜의 결과였다.’
폭염에 죽은 새끼 독사는 사람으로 치면 철부지 사춘기 소년이 아닐까. 위해한 사물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았겠지만 당장은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에 발길을 멈출 수 없었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어미 독사. 그대의 노련함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대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 폭염이 물러간 이 가을, 나는 밭에서 작물들의 수확에 전념하고 그대는 밭에서 먼 숲 같은 곳에서 안 보이게 조용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 길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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