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부근에 작은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햇볕 잘 드는 자리에할머니들 카페가 있다. 그 명명(命名)은 사실 내가 속으로 한 것인데, 할머니들이 각양각색의 의자에 앉아 환담을 나누거나 햇볕을 쬐며 졸고 있거나 하는 모습에 근거했다. 어제 눈이 내리며 겨울이 바짝 다가온 추운 느낌에서일까, 오늘은 할머니들이 한 분도 자리에 없었다. 카페는 오랜만에 개점휴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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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18-11-2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린 사진입니다.

무심이병욱 2018-11-26 21:46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이 여기저기 버려진 의자들을 갖다 놓고 앉아서들 종일 햇볕 쬐며 소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동네마다 노인들을 위한 경로 공간이 마련돼 있겠지만 그분들은 답답한 실내보다 그렇듯 산 아래 길 옆이 마음에 든 듯 보였습니다. 환담을 나누는 모습보다는 햇볕 쬐며 졸고 앉아 있을 때가 많아, 무심은 왠지 가슴 한켠이 아리곤 했습니다.
 

 

 

 

 

오늘 새벽 5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외수형의 추천사를 받았다. 이메일로 받았다. 올 연말 발간예정인 두 번째 단편소설집 ‘K의 고개추천사다. 19727월 어느 날 석사동 허름한 대폿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형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감사합니다고 전화하려다가 참았다. 형이 밤을 새운 뒤 먼동이 트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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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종열이와  만났다. 30년 만에 보는 종열이 얼굴이 별로 안 변한 것 같아  놀랐다. 머리칼만 희끗희끗 셌을 뿐이다. 얼굴만 안 변한 게 아니다. 옷차림도 30년 전처럼 검정색 반코트 차림이었다. 다만대학 노트에 전위적(?)인 소설을 써 갖고나오지는 않았다.

태원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열이가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학창시절에 소설 써서 상을 타고 그래서, 머지않아 대작가가 나타났다는 신문기사가 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선생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기만 했다니 참 어이가 없구나. 뭐 그래도 늦진 않았어. 요즈음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50대 중반은 젊은 나이거든.”

종렬이는 고향이 양구이다. 춘고로 진학해서 전태원 최종걸과 함께 셋이 춘고 미술반의 전통을 이었다. 태원이와 종걸이가 미대로 진학할 때 종열이는 진로를 바꾸었다. 그림을 그려서 캐나다로 수출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일컬어수출화 (輸出畵)’라 했다. 한때 잘나갔다. 태원이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종걸이와 나는 종렬이만 만나면 술값 걱정 없이 술 마셨지. 감자바위들이 돈 잘 버는 친구 하나 둔 덕에 호강했지.”

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나는 종렬이가 같은 회사 여직원과 늦게 결혼했으며 아직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니, 나이 50을 넘었는데 아직도 자식을 낳지 않았더니 너무 늦은 게 아냐?”

하는 내 말에 종열이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시로 중국 출장이라 어디 마누라 얼굴이나 볼 새가 있어야지.”

수출화 그리는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쓰기에는 너무 고임금이라 하는 수 없이 저임금의 중국에서 현지 사람들을 써서 할 수밖에 없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바람에 수시로 중국 출장이란다. 밤늦게 투다리 앞에서 헤어질 때 내가 물었다. 그 물음은 사실 30년 전과 똑같았다.

춘천에 잠잘 데나 있어?”

종렬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늘한 가을 밤 거리로 사라졌다. 30년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나 집이 있어. 거기서 잘 거야. 누나가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거든.”

3년 지나 2008년경 가을이다. (연도를 확실하게 못 박지 못하는 건, ‘오래 전 일은 기억을 잘해내지만 근래 일은 기억이 분명치 않기때문이다. 노화의 한 현상일까?) 종열이가 불쑥 이른 아침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 지금 니네 동네에 와 있어. 해장국집이야. 이리 와.”

해장국 집으로 찾아가자 종열이가 이미 술 한 잔 걸친 얼굴이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내게 알렸다.

내가 중국 출장 갔다가 귀국해서 회사에 출근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니? 글쎄, 내 자리가 사라진 거야. 중국의 저임금이 고임금으로 바뀌자 회사에 적자가 나기 시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담당자인 나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다니! 회사에 사표 내라는 거거든. 나 참!”

비극을 쾌활하게 말하니, 나는 뭐라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듬해 종열이가 폐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다. 태원이, 종걸이가 그의 장례에 다녀온다 하여 나는 부의금이나 건네고 말았다. 당시 내게 무슨 바쁜 일이 있었을 게다.

이종열. 그는 내 기억 속에 가을바람처럼 허허로운 친구로 남았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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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만 하면 글이 물 흐르듯 줄줄 쓰일 줄 알았다.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서재에 앉아 컴퓨터를 켜 놓고서 글쓰기는커녕 인터넷 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뉴스도 보고 유투브 동영상으로 가수들이 노래하는 것도 많이 봤다. 어느 날은 갓 제대한 무명 가수가 기막히게 노래 잘 부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얼마 안 가 톱 가수가 됐는데 바로‘김범수’다. ‘사랑이 나를 또 아프게 해요’ 하며 시작되던 ‘하루’.

김범수가 부르는‘하루’는 사랑의 아픔이 주제였지만 명퇴한 내게‘하루’는 그저 막막한 시간일 뿐이었다. 집 밖에는 별나게 화창한 봄 햇살이 범람하고 TV 뉴스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먼 시골로 하루 출장 가는데 차를 몰아 달라’고 제의했다.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남편이 폐인 될까 걱정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오랜만에 아내의 일일 장거리 운전기사를 맡아 춘천을 떠났다.  

150리는 달려 도착한 시골 읍의 모 컨벤션홀. 정문 앞에 아내를 내려다놓고는‘오후 5시 반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뒤 혼자서 여기저기 차를 몰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뜻밖에 생각도 못한 시설물들이 시골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개인이 폐 분교를 분양받아 차린 미술관이다. 내가 차를 주차장 (예전에는 운동장이었으므로 그렇게 널찍한 주차장도 없었다. 주차된 차라고는 낡은 중형차 한 대뿐. 나중에 깨달았는데 그 차는 미술관 관장의 차였다.) 나무그늘에 주차시킨 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화가이자 관장 되는 분이 몸소 반가이 맞았다. 꽤나 적적해서 방문객을 학수고대했던 게 아닐까. 관장실로 나를 안내하더니 커피를 대접하며 자신의 대단한 작품 활동을 자랑하기 바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어째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미흡한 수준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친구도 화가인데 이름이 ‘전태원’입니다. 아십니까?

관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만했다. 그는 강원도 사람이 아니고 먼 남쪽지방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강원도에 와 화가를 자임하면서 ‘전태원’을 모른다니 더 대화 나눌 게 없었다. 나는 ‘참, 제가 다른 바쁜 일이 있거든요’ 하며 간단히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봄이 가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글 한 줄 안 쓰이는 공황(恐惶)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전년도 늦가을, 명퇴 신청을 생각할 때다. 모처럼 만난 명퇴 선배 태원이가 내게 말했다.

 

“명퇴, 다시 잘 생각해 봐. 물론 나는 명퇴했지만 그렇다고 너도 명퇴하라는 말은 못하겠어.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 내 결심대로 명퇴하고 만 것이다. ‘직장 생활만 그만 두면 소설이 술술 쓰일 텐데 무얼 망설여?’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 한 줄 쓰이지 않는 현실에 자존심 상 태원이한테 내가 먼저 전화 걸어‘만나서 술 한 잔 하자’는 제의를 할 수 없었다. 그랬더니 태원이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인데‘이종렬’이 나를 찾았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떠서 받았더니 종렬이 목소리였다.

“태원이한테 얘기 들었어. 명퇴해서 글을 쓴다며? 잘했어. 너는 진작에 직장을 관두고 글을 써야 했어. 그 길이 너한테 맞아. , 만나서 자세한 얘기 나누자.  어느 술집에 잘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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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덧없다. 40년 전 무심이 양양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분장 업무상 연구과 소속이었는데 연구과장님 고향이 금강산 내() 온정리라 했다. 과 회식 자리에서 무심이 이런 질문을 드렸었다. 한 잔 술에 취기가 올라 그랬다.

과장님 고향이 금강산 온정리라고 제가 알고 있거든요. 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해 궁금한데 정말 금강산이 아름답습니까?”

그러자 과장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걸 잘 모르잖소? 늘 보는 경치이니까. 그런데 내 고향 금강산은 그렇지 않았다니까. 625 동란 중에 부모님과 짐을 꾸려 온정리를 떠나올 때가 가을이었거든. 단풍 들고 낙엽 지고해서 얼마나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지글쎄, 총에 맞아 죽은 시신 하나가 개울가에 있는데도 무섭다기보다 주변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그 또한 그림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보이더라니까? 자네 이런 내 말이 믿어지나? 글쎄 이 이상으로 금강산 경치가 아름답다는 걸 표현 못하겠네그려.”

그러고는 술김에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휴전선 때문에 가 볼 수 없는 고향 금강산을 눈감고 그리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 정도로 금강산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까?

남북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가 풀려 올가을에는 무심도 금강산에 가 볼 수 있는가 했는데 이미 늦가을이라 틀린 일인 듯싶다. 내년쯤에는 가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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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8-11-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 말씀만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표현한 말도 드물 것 같습니다. 금강산의 가을, 아~ 저도 꼭 한 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심 선생님과 함께 ^ ^

무심이병욱 2018-11-20 21:06   좋아요 0 | URL
내년 가을에 기회가 되면 연락해서 같이 구경 갑시다

2018-11-20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0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