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저 새들이 무슨 새지?”

아내가 내게 물었다. 춘심산촌 농장이 산속에 있어서 주위에 새들이 많다. 참새처럼 자잘한 종류는 물론이고 꿩 멧비둘기 파랑새 왜가리 등 제법 큰 새들까지. 꿩은 모습 보이기보다는 '꿔엉꿔엉'하며 숲속에서 울 때가 많고  멧비둘기는 늘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농장 안팎을 날아다니고 있고 파랑새는 간혹 가다가 나타나곤 한다. 왜가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소나무 위에 나타나 이웃집 연못의 물고기를 노렸다. 가끔은 금붕어 따위를 사냥하는 데 성공해서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활짝 펴고서 먼 하늘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 아내가 내게 묻는 새는 처음 보는 놈들이다. 꿩보다는 작고 멧비둘기보다는 큰데 몸의 색이 검다.

까마귀 같은데.”

그 말에 아내가 반문했다.

까마귀는 까악까악울잖아? 그런데 쟤네들은 울지도 않는데?”

 

 

그럼 다른 새들인가?”

나는 그 새들의 정체 파악에 자신이 없어졌다. 까마귀는 지능이 아주 높아서 침팬지만큼 영리하며 게다가, 까악까악 우는 소리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자기네끼리 간단한 대화도 나눈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지금 궁금해 하는 그 새들은 생김은 까마귀 같으나 한 번도 까악까악 울지들 않아서나는 영 정체 파악을 못하겠는 것이다. 나름대로 유식한 남편을 믿었다가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못하자 아내가 이랬다.

독수리인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독수리는 저 새들 크기의 서너 배 이상 큰 새다. 게다가, 철원평야같이 특정 장소에 해마다 겨울에 월동하러 집단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원래 고향은 중국의 북쪽 추운 지방에 있다. 요즘 같은 초여름 날 춘천에 나타날 리 만무할뿐더러, 크기도 전혀 맞지 않는다. 색깔 또한 독수리는 거무칙칙한 데 비해 눈앞의 저 새들은 그냥 까만색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까마귀 같다. 하지만 울지 않으니 어쩌나.

 

 

나는 생각다 못해 내 입으로 까악까악소리 내 보았다. 아내가, 남편 하는 짓이 애들 장난 같은지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쉬지 않고 까악까악했다. 그러자 그 검은 새들이 우리 부부가 앉아 있는 농막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날아왔다. 구체적으로는 오동나무 가지에서 잣나무 가지로다. 그 잣나무 가지에서 우리 부부가 앉아 있는 농막과의 거리는 15미터쯤?

그러더니 놀랄 일이 벌어졌다.

까악까악까악!“

내 까악까악 소리에 응답한 것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멀리 날아가 버렸다. 짐작대로 까마귀들이 맞았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 중 한 놈이(아무래도 수놈 같다.) 내게 그리 응답할 때 분명히 감정 내지는 간단한 의사(意思)가 느껴지던 것이다. 굳이 통역한다면 쓸데없이 까마귀인 척 하지 마!” 였다.

 

구봉산 밑 외진 산골짜기에서 밭농사 짓기 8년째. 주위의 새들이 친숙하게 여겨지다 못해, 이제는 놀러온 까마귀들이  감정 내지는 간단한 의사까지 나타낸다.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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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유정의산골 나그네를 처음 읽은 때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비록 짧은 단편이지만 그 강렬한 인상에 한동안 다른 소설들을 볼 생각을 못했다. 소설 보는 재미에 밤잠을 지새우곤 하던 때였다. 학점 따는 일보다는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찾아 읽는 일에 영일이 없었던 거다. 사실 당시 어려운 집안의 형편을 생각한다면 나는 만사 제치고 학점 따는 일에 우선을 두어서, 학업성적 우수생에게 주는 장학금이라도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힘들게 살던 부모님의 이마 주름살을 조금이나마 펴 주는 효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무심한 아들이라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참회한다.

 

얘기가 옆길로 나갔다. ‘(2차 세계대전)전후문학 전집의 실험적인 소설들에 빠져 지내던 내가 우리나라 30년대 향토 작가 김유정의 산골 나그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병든 남편을 챙기기 위한 들병이 여인의 행각은 내용상 비극이지만 외관상으로는 희극이었다.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스토리 전개.

특히 소설 끝의 문장이야말로 반세기가 돼가는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선연히 남았다.

 

<어디선지 지정치 못할 늑대 소리는 이산 저산서 와글와글 굴러 내린다.>

 

한밤중에 병든 남편을 이끌고 달아나는 들병이 여인.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특히 늑대 소리가 와글와글 굴러 내리는 것으로 표현한 데에는, 청각적인 대상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기법이라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싶었다. 30년대 김유정 작가가 구사한 첨단의공감각적 표현이라니!

소설 앞부분에, 홀어머니가 장가 못 간 아들을 둔 간단치 않은 시름을 에둘러 표현한 구절이 있다. 이 또한 압권이다. 옮겨 본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몰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 퐁 퐁! 쪼록 퐁!>

 

나중에 알았는데 이 좋은 표현들을 다른 사람들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의암댐 부근 길가에 세운 김유정 문인비에 동판으로 새겨놓았다.

김유정 문인비

돌아가신 아버지가 예총 강원도 지부 일을 할 때 (196870) 세운 비라서 사실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다. 요즈음은 어쩐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예총 일은 무보수 봉사 직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문인비 건립의 주무를 맡아 부족한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거두리의 야산을 팔았다. 누님이 내게 한 말이다.

글쎄, 아버지가 그 야산을 팔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기만 했어도 후손들에게 대단한 유산이 돼서, 사는 고생이 덜하지 않았겠니? 아버지가 그 때 야산 팔아 문인비 세우는 데 보태고 책도 낸 뒤 남은 돈 몇 푼으로는 뭐한 줄 아니? 집에 전화 한 대 놓았단다. 기가 막히지.”

그 시절 우리 집은 전화도 있는잘사는 부자집처럼 남한테 보였었다. 사실 독채 전세로 사는 집이었는데.

아버지는 김유정 문인비를 세운 뒤 김유정 전집도 펴냈다. 당시 대학생이던 내가 그 전집을 읽다가 산골 나그네에 이르러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 일은 너무 앞선 일이었다. 그 후 30년 가까이 흐른 뒤 김유정 문학촌이 춘천에 들어섰으니. 아아 아버지. 저는 불효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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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아폴로 싸롱을 매일같이 갔던 것은 아니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가지 않았을까.

72년 초겨울에는 한 열흘만에 아폴로 싸롱에 갔다. 커피 한 잔 값을 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업공간이 분명함에도, 나는 왠지결석하다가 오랜만에 출석한교실인 듯 감회가 남달랐다. 그럴 만했다. 외수 형을 따라 그 먼 인제의 어느 깊은 골짜기 분교에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직후였으니 말이다. 춘천교대를 7년인가 다니다가 중퇴하고 고향 인제로 내려가 취직했다는데 인제읍내도 아닌, 하천을 따라서 20여 리는 걸어가야 나타나는화전민 아이들 대여섯이 전부인골짜기 분교가 형의 직장이었던 거다. 한낮에 형의 수업이 끝나면 그 때부터는 둘이 부근 하천에서 가재를 잡았다. 붙잡은 개구리를 나뭇가지 끝에 매달아 하천 물에 담그면 얼마 안 돼 가재들이 붙었고 그러면 그것들을 솥에 넣어 쪄먹었다. 고소한 가재 맛도 하루 이틀이지 사흘째는 질려서 더 못 먹고 다 버렸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라 밤이 되면 석유냄새 나는 호야 불을 켜야 했다. 전임자들이 몇 달을 못 가 사직했다는 벽지 분교의 임시교사가 형이었다.

문학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지 라디오 청취로 밤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기이한 것은 우리 남한의 방송보다 북한의 방송이 잘 잡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인제는 북한이 가까운 접경 지역이었다. 남한에 밀파돼 있는 자기네 간첩들에게 보내는 이상한 숫자 방송.

나는 차마 사흘만에 춘천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못하다가 일주일이 됐을 때에야 말했다.

. 제가 춘천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그만 가 봐야 됩니다.”

형은 외롭고 쓸쓸한 골짜기 분교 생활에서 하루라도 함께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포기했다. 나는 그런 형과 헤어지고서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것이다. 1972년 당시 춘천은 인구 10만 내외의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거리에 2층 건물 하나 찾기 힘든 인제 읍에 비해서는 호화찬란한 대도시 느낌이었다.

어쨌든 나는 오랜만에 아폴로 싸롱에 들어와 앉았다. 일주일을 보냈던, 저 먼 인제의 외진 골짜기는 돌이켜볼수록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었다. 그곳에 형이 남아 있었다.

상념에 잡혀 있을 때 오우오우오우예이하며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가 어둑한 지하공간에 흘러나왔다. 형이 인제 내려가기 전, 석사동 자취방에서 기타 치며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닌가. 아아, 형과 나의 젊은 한 계절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GKnSdikqjw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f4984/6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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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때 피란가지 못하고 춘천에 남아 있다가 중공군들까지 봤다는 장모님이다. 중공군 장교가 당시 한창 젊은 친정아버지를 수상하게 여겨 총살하려 하자, 열다섯 살 나이 장모님(현재 80대 중반인 장모님의 소녀 모습을 상상하려니 감이 안 잡힌다. 상상력 하나로는 알아주는 사위이지만 이럴 때는 한계를 느낀다.)이 그 장교 바지를 붙잡은 채 땅바닥에 뒹굴며 울었단다. 말은 안 통하지만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하는 몸부림의 뜻은 통했다. 중공군 장교가 마음이 흔들려 권총을 다시 갑에 넣고 친정아버지를 그대로 살려주는 기적이 일어났단다.

나는 그런 정도로 장모님의 지나온 삶을 대충 얘기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장모님은 일흔 나이를 지날 즈음부터 몹쓸 당뇨가 시작돼 여든 중반의 현재 병석에서 지내는 생활이다. 고생 많은 삶의 여정 속에서 학교 가기는 언감생심. 그저 한글을 가까스로 읽는 정도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따금 문학적인 표현을 해서, 글 쓰는 사위()를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끼는 큰딸(내 아내)이 남편()과 둘이서 척박한 골짜기 땅을 일구어 밭농사는 물론 화초들까지 키워 꽃밭 천지가 되자 이런 표현을 하던 것이다. 큰딸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내 평생소원을 이루었구나!”

좁은 마당이거나 답답한 아파트 내에서화초 키우기로 낙을 붙이고 살아온 당신 눈에 800평 밭 곳곳의 꽃들은 바로 평생소원의 광경이었던 거다. 문학 하는 내가 듣기에는 정말 뜻밖의 문학적인 표현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하긴, 문학과 상관없이 살아왔다고 해서 문학적인 표현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어쩌다가 그런 표현이 나온 거다.’

 

그런데 어제 오후 늦게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가 무슨 전화를 받아 잠시 통화하더니 잠깐만하며 내게 전화를 넘겨줘 벌어진 사건이다. 바로 장모님의 전화였다. , 그 전에 빠트린 얘기가 있다. 빠트린 얘기부터 해야 한다. 내가 두 번째 작품집으로 ‘K의 고개를 내자 아내가 그 중 한 부를 친정집에 주었는데장모님이 병석에서 며칠째 그 책을 계속 보고 있다지 않은가. 당뇨 악화로 시력도 안 좋은 거로 아는데 노인네가 그러는 거 같아 나는 좀 걱정도 되고 도대체 이해도 되지 않았다.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고대소설을 읽는다면 이해됐을지 모른다. 사위의 ‘K의 고개라니. 나약한 현대 지식인의 어떤 표상을 다룬 작품집인데 그걸 노인네가 읽는다고?

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당뇨악화로 치아들이 부실해져 발음도 잘 안 되는데 사위인 내게 이러던 것이다.

책 내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다 읽었는데 잘 썼더라고. 내가 말이야, 옛날에 책 읽는 걸 좋아했다니까? 이광수의 유정도 읽었고 김래성이가 쓴 탐정소설들도 읽었지. 뭐야, 닥터지바고도 읽었다니까.”

그 충격이라니. 솔직히 나는 닥터지바고 같은 경우, 영화로나 봤지 책은 못 읽었다. 장모님은 이런 말도 했다.

, 소설을 읽으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지는 게 있잖아.”

세상에. 그건 내가 ‘K의 고개앞에 썼던 작가의 말에 등장했던 말과 똑같다! 작가의 말에서 나는 소설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소설 쓰기를 그만 둘 수 없는 건 책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상맛을 못 잊어서라고 했다.

소설 쓰는 당신의 맏사위를 자랑스러워하는 말로써 장모님의 얘기가 끝났다. 통화가 끝났다. 뜻밖의 통화 내용에 놀란 내게 아내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가 예전에빙점이라고, 일본 사람이 쓴 소설도 보고 그랬어.”

빙점은 내 사춘기 적 감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준 장편소설이다. 아내가 또 말했다.

우리 엄마 무식하지 않아. 당신이 늘 무시하는 것 같은데그렇지 않다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2년여 전 첫 번째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을 냈을 때도 장모님이 다 읽어봤다는 말인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으니 이상하다. 아내가 이런 내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당신이 지난번 첫 번째 책을 냈을 때에는 엄마가책을 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국어선생을 하다 퇴직한 사위였으니 말이지. 그러나 이번에 두 번째로 책을 내자 사위가 취미가 아닌 전업으로 소설 쓰는구나여긴 게 아니겠어? 그래서 눈도 안 좋은데 며칠 걸려서 다 읽은 거지. 왜정 때 여고를 다녔다는 시어머니보다 우리 엄마가 책도 더 많이 보고 더 똑똑한지도 몰라.”

잘 나가다가 이상하다. 내가 얼른 제동을 걸었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쩌거나 장모님이 내 두 번째 소설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는 건사건이다. 그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우선은 이 정도로만 알고 있자. 또 다른,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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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낯선 그가 싸롱에 나타난 건 오후 늦은 시간이다. 머리털이 어깨 가까이 드리워질 만큼 긴 장발에 왠지 숨 가빠 보였다. 어두운 실내조명 탓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마나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혀 있을 듯싶었다. 그는 문 열고 들어서자마자 빈자리부터 찾는 모습이었다.

공교로웠다. 하필 그 시간대에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굳이 빈자리라면 벽 옆의 전등 빛에 의지해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 자리뿐이었다. 그녀 혼자서, 넷이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을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 탓에 그 자리 합석은 언감생심.

그런 경우, 대개의 손님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문을 열고 사라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싸롱 안을 서너 번 돌면서도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때 맷 먼로의 감미로운‘Walk Away’가 흘러나왔다.

“Walk away, please go

Before you throw your life away

당신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다.

하필, 앉을 자리를 찾아 싸롱 안을 헤매는데 부디 떠나달라는 노래가 나오다니!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하긴 그 노래를 귀담아 들을 만한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실 같은 남자로서 우리(나와 친구 녀석)가 나서서 그에게 합석을 권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낯선 이와 합석했을 때 그 어색함이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Walk Away 노래가 끝날 즈음에 항상 고고한 자세로 시집을 보고 있는 예쁜 여자애의 자리에 앉았다. 옆이 아닌 마주보는 자리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싸롱에 문 열고 들어왔다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앉아 있는 장면으로 오해했을 게다. 이어지는 맷 먼로의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영화 모정의 주제가)”노래 소리에 우리는 그가 여자애한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물론 예쁜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못 들은 것처럼 계속 시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30분 가까이 그는 예쁜 여자애와 말없이 합석했다가 다시 문밖으로 나가면서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앙로 거리에서 순경들이 가위를 손에 들고 장발 청년들을 단속했다는 사실을. 장발의 그가 다급하게 지하공간에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일 영화(映畵)였다면 그런 해프닝을 계기로 그는 예쁜 여자애와 썸씽이 시작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예쁜 여자애는 그 후로도 변함없이 항상 혼자 그 벽 옆 자리를 지켰으니 말이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이 수필에 나오는 아폴로 싸롱은 70년대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음악다방의 이름입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종일 팝송과 송창식 같은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흡연은 허락됐지만 음주는 허락되지 않았던 나름의 멋진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싸롱’이란 이름 때문에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오해 살 수 있어서 뒤늦게 무심이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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