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악산을 의식하게 된 건 지난 봄, 친구 전태원 화백의 개인전을 보러 이상원 미술관에 갔을 때다. 이상원 미술관은 춘천시 사북면에 있다. 춘천에서 북쪽인 화천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이 깊어지는 위치에 불쑥 나타나는 그 미술관은 외관부터 환상적이다. 보름달 닮은 현대적 건물이 그런 깊숙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을 줄은 그 누구도 예측 못했을 것이므로.

춘천 도심에서 차로 30분 만에 돌연 맞이하는 깊숙한 산지라, 도대체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나 팸플릿을 본 순간화악산근처임을 깨달았다.

강원 춘천시 사북면 화악지암길 99’

 

내가 굳이화악산을 의식하게 된이란 표현을 하는 까닭이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추운 겨울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기상캐스터의 멘트에 반드시화악산의 현재 기온은 영하 하면서 시작되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즉 북한 땅이 가까운 최북단의 산이라는 정도의 인식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날 이상원 미술관 방문을 계기로 그 화악산이 의외로 먼 데 있지 않은 가까운 산일뿐만 아니라, 해발 1,468미터의 높은 산이라는 것까지 알게 됐으니 그 순간 내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한다.

 

이상원 미술관 방문 한 달 뒤에는 이웃한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의 감성마을에 가게 됐다. 문청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이외수씨를 만나 대화를 나누려는 목적이었다. 감성마을 또한 DMZ에 인접한 김화(金化)로 가는 도중에 있어 산지의 골짜기에 있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사실 그런 지형에는 전파(電波)가 날아들기 힘들다. 그러함에도 감성마을에서 스마트폰 사용은 물론이고 TV도 편하게 시청할 수 있었으니 역시 머지않은 곳에 있는 화악산 덕분이었다. 화악산꼭대기에 전파를 중계해 송신하는 탑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아내와 농사짓는 춘심산촌 농장에서 잡히는, 유일한 FM 라디오 전파 역시 화악산 꼭대기에 세운 전파 중계소 덕분임을 뒤늦게 알았다. 아내가 다른 일로 바빠서 나 혼자 춘심산촌에 와 밭일 하다가 농막에서 잠시 쉴 때, 라디오에서 잡히는 FM음악방송 청취의 즐거움! 어느 날인가는 혼자 밭일 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 농막에서 쉬며 FM음악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음악소리가 5평 농막 공간에 꽉 들어찼고 그 바람에 내가 음악에 빠져죽을 것 같은,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잊지 못한다.

 

화악산이 내 노후에 그리도 가까이 다가올 줄이야.

복잡다단한 세상도 알고 보면 극히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화악산은 일대의 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그 바람에 전파 중계 탑이 꼭대기에 섰을 뿐만 아니라 매년 남한에 추운 겨울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기상지표가 된 것이다.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이상원 미술관화천 감성마을춘천 근교의 춘심산촌이 높은 화악산의 그늘 아래에서는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해발 1,000미터 안팎의 다른 산들에 비해 화악산은 400미터 이상 높으니 사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고() 영역이었다. 높으면 주위에 영향을 준다. 세상은 높이라는 단순한 물리적 비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전파 수신 여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고매(高邁)한 인격· 고상(高尙)한 사람 ·고결(高潔)한 품성 등등, 인간의 정신영역 또한 높이로 표현됨을!

화악산.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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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매일 장거리 통근에, 쉴 새 없이 바쁜 회사 직무에, 몸의 이상증세를 무릅쓰고 무리한 몸이 결국 쓰러져 병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면회 온 우리를 보곤 아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면서 간신히 말했다.

목이 붓기는했지만아프진않아요.”

내가 말했다.

이 병원은 춘천에서 제일 잘하니까, 잘 될 거다.”

뒤이어 아내가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없니?”

어요.”

병원비 걱정 마라. 우리가 낼 거다.”

그러시지 말라는 뜻으로 아들이 말하려는 듯싶은데 통증 때문인지 그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았다. 말도 편하게 못하는 아들과 대화는 무리였다. 또 뭐라고 말 붙이려는 아내를 내가 말렸다. 침묵이 흘렀다.

우리 그만 나갑시다. 허용된 면회시간이 20분이라는데 우리가 이러고 있지 말고 남은 10분은 며느리가 쓰도록 해야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들한테 말했다.

우리 갈게. 내일 다시 올게.”

우리는 대기실에서 며느리를 만난 뒤 병원을 나와 건너편 동네로 걸어갔다. 병원 주차장에 못 세운 우리 차가 동네 골목 어둠 속에 있었다. 병원에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좁은 골목에서 우리 차를 간신히 빼냈다.

차가운 겨울 밤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했다. 저녁밥을 먹다가 아내가 말했다.

아들이 아픈데도 이렇게 밥이 넘어가네.”

내가 한 마디 하려다가 그만 두고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었다. 우리 분신(分身)이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데 면회 가는 것밖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니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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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그 어두운 골목이 생생하다. 학천이가 다른 친구 편에오늘 밤에 전매청 앞에서 단 둘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와 그 현장에 갔더니 굳은 낯으로 찻길 건너 어두운 골목으로 앞장 서 가던 것이다. 지금의 강대 정문 부근 뒷골목이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내게 외쳤다.

어서 때려! 씨, 도망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지쳤다.”

나는 맥이 확 풀렸다. 단 둘이 만나자고 했을 때에는 흔한 말로 맞짱(대결)을 뜨자는 게 아닌가. 전매청 앞에서 만나자마자 이 어두운 골목으로 앞장서 가기에 주먹을 단단히 쥐고 한판 싸울 채비를 했다. 그런데 자기를 어서 때려달라니? 그러잖아도 내 마음 한 편으로내가 학천이와 맞장 뜰 일이 있나?’갈등하는 중인데 그리 나오니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참에 좋게 화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화해의 말을 건네야 하나 망설이는데 학천이가 재차 외쳤다.

지겹다! 어서 때려!”

말이 통하는 상황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학천이한테서 소주 냄새도 났다. 하는 수 없었다. 주먹으로 그의 등을 두 대 쳤다. 소리만 요란한, 상징적인 의미의 폭행(?)이다. 그런 뒤 나는 그를 데리고 어디 가까운 막걸리집이라도 갈까 했는데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 먼저 찻길 건너로 걸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 때다. 그의 발걸음이 이상했다. 찻길을 한 쪽 발을 끌듯이 절며 건너가느라 편치 않아 보였다. 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오늘 낮에 발을 다치기라도 했는지 처음 보는 불편한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쫓아가 발이 왜 그리 됐는지묻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가 못됐다. 나는 그 어두운 골목에 그냥 서 있었다. 찻길 건너 전매청 앞에 다다른 학천이는 얼마 후 행인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후 우리는 사실상 절연한 사이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2016년 초여름이다. 내 첫 작품집 숨죽이는 갈대밭의 표지화 문제로 태원이를 만났을 때다. 얘기 나누다가 학천이얘기까지 나왔는데 태원이가 이렇게 얘기했다.

“758월이었지. 내가 입영 영장을 받고 소집 장소에 갔는데 학천이도 오지 않았겠어? 교대를 졸업 못하니까 군대 가게 된 거지. 어쨌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런데 입영 훈련을 앞두고 신체검사 때 그 녀석이 불합격되면서 인제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지 뭐야. 나 혼자 입영하는데 참 마음 쓸쓸하더구먼.”

내 짐작에 학천이는 무릎 관절염을 앓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향 인제에서 방위로 군 복무를 마치지 않았을까?

춘천에서 자취할 때 간장을 푼 냉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해결하고는 온기 하나 없는 방에 이불 펴고 누워서 지내던, 열악한 생활의 결과 같다. 참 안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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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이 여러 번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었다. 얼굴이 많이 밝아진 외수형이 내게 물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어봤습니까?”

서울 1964년 겨울로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김승옥작가를 모른다면 소설 쓰는 사람이 못된다. 더구나무진기행이라니. (정훈희가 안개를 불러 데뷔하자마자 톱가수가 됐는데 그 노래는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이며 그 영화의 원작이무진기행이다.) 내가 무진기행을 읽어본 감동을 말하자 형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제 자취방으로 가서 더 얘기 나눕시다.”

형을 따라나섰다. 2차선 찻길을 건너 시내버스 정류장 판이 서 있는 부근 구멍가게 앞에 형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말했다.

이 가게에서 마음껏 먹고 마실 것을 고르시오. 내 가게나 마찬가지이니까.”

솔직히 마음껏 고르기에는 가게가 너무 작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초면인 처지에 형의 후의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뭐했다. 나는 소주 두 병과 통조림을 집어 들었다. 형이 돈 계산도 않고 가게를 떠나는 것을 보니 외상장부를 만들어놓고 지내는 게 분명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강둑 가까운 곳에 형의 자취방이 있었다. 정말 누추한 방이었다. 5평이 채 안 되는 방에 그림과 화구(畵具)들이 가득했다. 내 지금 기억에 형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색 바지 차림이었다. 페인트가 와이셔츠와 바지 가득하게 묻어 있어서 얼핏 보면 얼룩덜룩한 무늬의 옷차림 같았다.

예술이란 것은

소주 한 잔을 권하면서 형이 특유의 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형의 교대 후배들이 하나 둘 들어와 앉았다. 형은 담론을 펼치다가 문득 나한테 이형은 어떻게 생각하우?’묻기도 했다. 내 의견을 들은 뒤 담론 일부를 수정하고는 잠시 침묵하다가 화제를 바꿔 자신이군대 가서 유격훈련 받던 일을 재미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좁은 방안에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형은 다시 붓을 들어 캔버스의 미완성된 그림에 매달렸다. 얼마간 방안에 침묵만이 있었다. 웬만큼 그림이 마무리되자 붓을 내려놓고는 다시 다른 담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것은

그러면서 날이 밝았다. 그 자유분방함, 남다른 예술가적 모습에 나는 석사동을 찾아온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다. 일주일이나 그 좁은 방에서담론을 듣다가 군대에서 벌어진 일 얘기 듣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다가, 그러다가 문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다가하며 지냈다.

 

고향도 다르고 성장과정도 다르고 어디 그뿐인가. 동년배도 아닌 외수형한테 내가 단번에 빠져든 사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한 때 예술가의 표상 같았던 학천이가 허망하게 스러지자 그 빈자리에 외수형이 홀연 들어선 거라는. 더구나 형은 미술은 물론이고 문학까지 능통한 존재였다. 교대 후배들이 매일같이 그 좁고 누추한 방에 찾아오는 것만 봐도 단순히군대 갔다 온 나이 많은 복학생이 아니었다.

뜻밖에 형과 내가 급격히 친해지자 학천이는 정말 곤혹스런 입장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원수를 처치하려고 자객을 보냈는데 엉뚱하게도 그 자객이 원수와 친해진 경우라 할까. 학천이는 기댈 사람 하나 없는 고립무원 처지가 되자 모든 걸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내가 알아서 병욱이를 찾아가 매를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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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수형은 당시 교대 앞 동네에 살았다. 강이 가까운 낡은 집에서 방을 하나 얻어 자취하는 생활이었다. ‘보다는 그림잘 그리기로 소문나 있었다. 2년제 교대를 몇 년째 다니는 이상한 나이 많은 복학생이라는 것까지는, 나는 미처 몰랐었다.

생면부지의 외수형을 만나러 석사동을 간 건 727월 초다. 당시 강대 교지 편집을 맡았는데 아직 미술교육과 같은 과가 강대에 없던 때라 표지화가 걱정이었다. 혹시나 싶어 이웃한 교대에서 표지화 그림을 그려줄 만한 사람을 찾았더니 누군가이외수라는 학생 화가가 있다.’고 귀띔했다. 그 길로 석사동 가는 시내버스를 탄 것이다.

물어물어이외수를 찾았더니 교대 옆 작은 대폿집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즈음 외수형은 외수형대로 나를 찾고 있었다. 강대 다니는, 아는 후배들한테도대체 이병욱이가 어떤 놈이냐?’고 묻는 탐색부터 시작했다. 뜻밖에글 쓰는 애.’라는 얘기밖에 얻어듣는 게 없어서 다소 혼란스런 상태였다. 어쨌든 불원간 이병욱을 찾아가든지 해서 고향 후배 학천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외수형은 당시 그림 외에 석사동 일대에서 한 주먹 하는 것으로도 알아주었다. 특히 젓가락을 표창처럼 날려 맞히는 솜씨까지 갖춰 어떤 면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사실까지는 미처 몰랐던 나.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앉아 있는 당사자한테 다가가 이렇게 물었으니 얼마나 웃기고 황당한 일인가!

저 혹시, 이외수씨 되십니까? 저는 강대 다니는 이병욱이라 하거든요.”

나중에 친한 사이가 되면서 외수형이 실토한 말이다. ‘내가 그 순간 얼마나 놀랐겠니? 찾는 병욱이란 놈이 제 발로 걸어 나를 찾아왔으니. 나는 여차 하면 젓가락부터 날릴 각오였지.’

왠지 긴장한 낯으로 맞는이외수란 화가한테 나는 찾아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술 한 잔을 권했다. 외수 형과 나의 반세기가 돼 가는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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