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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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어서 그런 건지,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어여쁜 여성이 실제 그의 아내처럼 느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이 등장하거나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건물이나 풍경만 등장하는 그림도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란걸 알겠다.

그림들이 쭈욱 하나로 이어진다.

 

글은 17명의 다른 작가가 써서 그런 것이겠지만,

얘기가 하나의 주제나 기획 의도로 모이지 않는 것이 중구난방이다.

17명의 작가가 각자 다른 얘기를 하는데,

작품의 완성도도 다 다르고 하다보니,

시작하자 마자 맥이 빠져 버린다.

 

내가 아는 작가들의 작품은,

(실제론 그렇지 않겠지만,)

과거 어느 작품 속에서 봤던 것만 같다.

그리고 단편소설이야말로 열린 결말이 가능하다고 하고,

그게 단편소설의 묘미라고들 하지만,

무슨 얘길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장편소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장르소설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걸 어떤 부류의 장르소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속내를 들여다본것인지,

이 책의 기획자인 로런스 블록은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이 단편소설들은 장르가 다양하거나 혹은 아예 장르가 없다. 어떤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한 그림과 맞떨어져 캔버스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만 같다. 또 어떤 이야기는 그림이 어떤 식으로 계기가 되어, 캔버스에 모호한 각도로 맞고 튀어나온다. 내가 아는 한 이 소설들에는 단 두 가지 공통분모가 있을 뿐이다.- 작가들 개개인의 걸출함, 그리고 그들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11쪽)

라고 하고 있다.

작가들이 걸출하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작가들이 호퍼의 그림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는 이 책을 꼼꼼이 다 읽은 후에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아는 작가들의 경우,

그림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작가들의 풍이랄까, 작가의 개성이 너무 두드러진채로 나타나서,

그림과, 또는 이 책의 기획의도와 하나로 어우러지지 못하는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은 '니콜라스 크리스토퍼'의 '바닷가 방'이었다.

그림도 알라디너의 서재 대문 그림으로 여러번 보았어서 친숙했고,

작가도 생소한 사람이라서 작풍이나 문체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던 터라 신선했다.

난 그동안 이 그림을 불때마다 바닷가 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선상위의 방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 작품이 만들어낸 줄거리도 기발하다.

 

마이클 코널리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같은 경우는,

'해리 보슈'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어조도 에드워드 호퍼랑 잘 어울린다.

실제로 마이클 코널리의 '블랙 에코'에도 이 그림이 등장했던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일까, 얘기가 그림이랑 가장 잘 어울린것 같기는 했지만,

이 부분이 무슨 얘기인지 몰라 좀 애먹었다.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이 감시 업무를 하러 왔다. 옷을 껴입긴 했지만 지퍼로 연결하는 얇은 안감을 댄 LA의 트렌치코트가 시카고의 겨울 날씨로부터 시베리아허스키를 따뜻하게 지켜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베리아허스키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런 문장이 이어지는데,

금세 해리 보슈의 우울함에 전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슈는 틀에 박힌 이야기 따위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문득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일을 하기에 난 너무 늙었어.(135쪽)

라든지,

그녀가 볼 수 없는데도 보슈는 고개를 끄덕였다.(148쪽)

위에서 시베리아허스키는 고독과 사랑에 민감한 해리보슈를 상징하는 매개이겠지만,

시베리아허스키는 추운 날씨에 잘 적응하는 개라고 알고 있었던 터라,

금방 이입이 안 됐다.

하지만 저 짧은 문장들로 알 수 있듯이,

선천적으로 고독하지만, ㅋ~,

타인을 향해 적당한 온기를 내어줄 수 있는 남자.

그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라는걸 아는 남자여서,

해리 보슈가 멋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이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인데 이 또한 로런스 블록 스타일이다.

하지만 좋았다.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기획 의도는 돋보이지만, (아무렴, 로런스 블록 아니겠나?)

하나로 묶이는 응집력 따위는 없었다.

작품의 수준도 일관되지 않고 천차만별인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애정하는 작가들의 따끈따끈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야 겠다.

 

다 읽고 띠지를 보니,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이 2017년 에드거상 수상작이다.

'역쉬~!'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고독하고 쓸쓸한 정서를 담은 것이 이 가을에 읽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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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15 16:58   좋아요 0 | URL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적극 추천해 주신 글만 날름 읽을까요? ㅋㅋㅋ

한 번 읽어 보려고 했었는데 고민이네요.

2017-09-15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7-09-15 18:43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 어색함을 읽고 싶어지는 책입니다. 그래서 표지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는지도...

양철나무꾼 2017-09-16 09:22   좋아요 0 | URL
낭만인생 님, 댓글 보고 맘이 좀 놓입니다.
저는 한때 장르소설 매니아여서 이쪽으로 두루 섭렵해서 그런 거고,
다른 분들은 좋게 읽을 수도 있을텐데 했거든요.
일단 라인업만 봐도 빠방 하잖아요.
밑에 hnine님 댓글도 그렇고 어찌되었건 읽고 싶어지신다니 다행입니다~^^

hnine 2017-09-16 07:59   좋아요 0 | URL
예, 소문난 잔치 맞는 것 같아요. 소문에 부응하는 잔치였다면 좋았을텐데.
저도 얼마전에 서점 가서 이 책 거의 살뻔 했는데 마침 표지에 뭔가 끈적한게 묻어있어서 서점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그거 한권 밖에 없다고 해서 구입을 보류했었죠.
그런데 양철나무꾼님 리뷰 읽으니, 읽고 싶지 않다기 보다 오히려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건 무슨 청개구리 심사인지 모르겠어요 ^^ 저 시베리아허스키 대목은 정말 양철나무꾼님께서 해석을 해주셨으니 이해가 되었지만 저 같으면 모르고 그냥 넘어갔을거예요.

양철나무꾼 2017-09-16 09:28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약속이 있다면 서점에서 만나게 되지만,
일부러 서점에 책을 사러가진 않게 돼요.
그리고 서점에선 둘러보고 메모만 했다가 집에 와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게 돼요.
그 이유가 다른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들춰보고 손 탄 책을 구입하긴 싫더라구요.
저도 그만큼 책을 깨끗이 보는 편이구요~^^

암튼 다행이예요.
다들 읽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이래서 소신 리뷰를 쓰게 되는가 봅니다~^^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 - 사십대 가장과 세 여자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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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까지 읽었으니 순서 상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박균호 님이 내신 책은 다 읽은 셈이다.

뿌듯하다, 전작주의 목록에 1인을 추가할 수 있겠다.

새로운 책이 나오면 구입해 읽을 의사는 있지만,

혹여 빼놓고 못 읽은 책이 남아있다해도 일부러 사서 읽는 수고는 안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글쓰는 스타일은 이 책'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를 경계로 바뀐 것 같은데,

내가 '독서만담'을 읽고 완전 재밌다고 설레발을 쳤던 그 스타일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재미를 위해 지나친 과장을 한 것 같지만,

그 과장을 걷어내고 내면으로 파고 들어보자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다.

말 그대로 일상적인 하루를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아저씨이다.

 

이 책의 '작가의 말'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이렇게 책으로까지 일상을 엮은 이유는 우리 가족의 역사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내가 기록함으로써 특별한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의 힘을, 기록의 힘을 그렇게 믿는다.(5쪽)

 

나는 글 뿐만 아니라 삶도 그런 것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님의 시'꽃'처럼,

평범해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특별한 역사'가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아내, 딸, 어머니 세 여자 중 어머니에게 감정이입을 하였다.

나도 몇 년전 편찮으신 시어머니를 모셨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것 같은데,

그런 아픔을 담담하게 적어내려가는 것도 좋았다.

일상을 무덤덤히 얘기하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큰 울림을 준다.

위트와 농담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어제 넷상에서 논란이 됐던 '최영미 시인'도 '네티즌들이 위트가 없다'와 '농담이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물론 '갑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빈민에 속하는 최영미 씨가 호텔에 언제 갑인 적이 있었던가'라며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황현산 님의 의중은 알겠다.)

 

최영미 시인이 욕을 먹는 이유는,

아니 적어도 내가 욕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갑질을 해서 욕을 하는게 아니라 철딱서니가 없어서 이다.

그녀는 '위트와 농담'이라고 하는데, 그 호텔에 보낸 메일을 보게 되면 진지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월세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을때,

호텔에 스폰서를 알아보는게 아니라, 형편에 맞춰 살아갈 방법을 궁리한다.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호텔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수영장'이 있는 '특급호텔'을 조건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암튼 삶의 간난신고를 시든, 소설이든, 글로 표현해내는 게 살아있는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박균호 님의 그것이 다소 투박하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박균호 님의 이 책이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글이 뒤로 갈수록 짧고 힘이 없어진다.

그러니 힘 빠진 짬뽕공처럼 '통통~' 튀는 맛이 없다.

뒷 부분을 좀 보완해서 힘을 실어줬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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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12 19:51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이 인용한 책 5쪽의 문장을 보면서 글을 열심히 써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생겼어요. 언제부터인가 글 쓰는 일에 매너리즘을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그동안 기록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건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책 읽고 글을 쓰는 일이 평범해보여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양철나무꾼 2017-09-14 08:57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그래서 좀 뜸하셨군요~^^
님 편하신 대로 하면 되는거죠.
하지만,
But,
님의 것처럼 훌륭하고 좋은 글은 좀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ㅅ!
 

가을은 독서의 계절일까, 여행의 계절일까?

여름 내내 읽던 최명희 님의 '혼불'을 9권까지 읽었고 이제 마지막 10권만을 남겨놓고 있다.

바짝 당겨 읽고 끝낸 후에 어디 단풍 놀이라도 가볼까 했었는데,

마지막 권을 앞에 두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다.

10권짜리 소설에 9권까지 읽었는데 끝이 안보이는데,

이런 상태로라면 미완결의 소설이거나 완결이 되더라도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어 어설프게 끝나버릴텐데,

그렇다면 미완결이라고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미완결이라는 걸 알고도 장장 10권을 내달려왔을까,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다.

 

두산 백과 사전에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된 직후부터 쓰기 시작해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2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제1부가 당선되었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제2∼5부를 연재한 뒤 1996년 17년 만에 전10권(5부)으로 완간된 최명희의 작품이다.

이라고 되어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학대백과에는,

이후 작가는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투병하던 중에도 제5부 이후 부분을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내 집필하지 못하고 타계하여, 1996년에 간행된 판이 최종본이 되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는,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 사이에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고 1996년 한길사에서 10권의 결정본이 발간된 최명희의 미완성 대하소설.

이라고 되어 있다.

 

호남지방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노래, 음식 등을 생생한 우리 언어로 복원해내 ‘우리 풍속의 보고(寶庫), 모국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9권에선 얘기의 대부분을 사천왕상에 할애한다.

그냥 사천왕상 얘기를 할때는 어려운 얘기가 지루하게 펼쳐진다 정도였는데,

선운사의 사천왕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데,

알고나니(시댁이 선운사 근처라서),

더 아름답고 대단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면만 놓고 봤을때는 아쉽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소설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통해서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식이나 교양의 축적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담론이 아니라,

그와 버무려진 이야기의 전개인데,

이야기의 전개는 완전 미미하고 더딘데다가 생략도 많았는데,

그 생략된 부분이 어디에선가 드러날테지 하고 기다렸는데,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랄까.

10권을 다 읽어도 '완결'을 봤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했다는 허무함이 남을 것 같다.
오히려 내 맘대로 그 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게 재미있겠다.

 

오늘 아침 대형포털을 둘러보니 최영미가 핫이슈이다.

어떻게 그렇게 저렴하고 발랄한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해명도 완전 궁색하다.

 

마침 '공지영'의 시인의 밥상'을 겹쳐읽었다.

 

 

 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언제부턴가 '공지영'은 잘 안 읽게 되었다.

미려한 문장이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던가 말이다.

투박하더라도 삶으로 충만한 글들이 더 좋았다.

 

이 책은 '지리산 행복학교'의 곁가지쯤 되려나,

박남준 시인이 요리하고 공지영이 쓴 것이란다.

'지리산 행복학교' 이후로 끈질긴 방문객들에 의해 괴로움을 겪었던 지리산 시인들은 공지영과 소원해졌었단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다시 뭉친 것은 찻잔에 매화 한 잎을 띄우는 박남준 시인의 사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눙을 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박남준의 요리 솜씨는 먹어본 사람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울만큼 좋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그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장례비용 200만원( 요즘 물가를 고려하여 300만원으로 올렸단다)외엔 무소유한 삶을 사는 시인 아파서 큰 수술을 했기 때문이라는 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보다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사연도 다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 그리고 물론 그 과정도 다 다르지만 나의 지리산 친구들의 기본 생각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하여 삶의 대부분 시간을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노동을 하며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겠다. 긍정형으로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원하는 것들을 하며 삶을 누리겠다'일 것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자라며 얻은 비본질적인 욕망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가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투덜거리기도 하는데 그들의 말은 이렇다.

 "나는 다르게 욕망할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려보내기를, 저 산과 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떠나고 누구보다 계절을 깊이 즐긴다.(124~125쪽)

 

공지영은 한 대목에서,

고독은, 배가 오가지 못하는 이 망망대해의 고독은,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만 남은 고독은ㆍㆍㆍㆍㆍㆍ.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혼자 왕따가 되고 혼자 실직하고 혼자 비정규직이 되는 고독과 어떻게 다를까. 절망에 우열을 매길 수 있을까.(268쪽)

라고 하는데, 이 구절이야말로 아무것도 내려 놓지 못하는 자의 가식으로만 읽혔다.

진정 그것이 절실하다는 것은 흠뻑 담굼질해야 느낄 수 있는 것들이지,

말로 이러쿵 저러쿵 미사여구를 쓴다고 하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아무것도 바뀌는게 없다면,

글은 더 이상 울림이 없을 뿐더러,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박남준 시인의 시집과 편지글이 이렇게 저렇게 갈무리되어 나왔다.

공지영 님의 '시인의 밥상'이 박남준 님에게 어떻게 소용이 되었는 지는 모르겠고,

이렇게 두 권이 나온걸 안 이상 지체할 순 없겠다.

 박남준 시선집
박남준 지음 / 펄북스 / 2017년 8월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박남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사람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자기가 내보이고 광고한다고 해서 가치가 드러나는게 아닐거다.

조용히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걸 보고 저절로 느끼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는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 시집 한권과 산문집 한권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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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7-09-11 16:21   좋아요 1 | URL
혼불. 저도 여름에 중고로 세트 들여놓고, 찬찬히 읽다가, 4편 쯤에서 잠시 멈춤 했는데 멈춤이 길어지네요.

양철나무꾼 2017-09-11 18:23   좋아요 1 | URL
저는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대충 지루하게 읽고 있습니다.
‘찬찬히‘ 읽으신다는 문구가 돌출되어 들어옵니다.
나이 들어 찬찬히 다시 읽을 날이 와 줄런지~--;

cyrus 2017-09-11 19:17   좋아요 1 | URL
동아일보 소설 공모에 당선된 《혼불》 제1부가 레어템입니다. 구하기 힘든 책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09-12 18:1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아무리 레어템이어도 전 낡은 책은 책벌레 나올 것 같아 꺼려져요~--;

님의 책에 대한 무한애정에 또 한수 배웁니다, 꾸벅~(__)

munsun09 2017-09-25 12:16   좋아요 1 | URL
혼불에 대한 느낌이 저만 그런게 아니구나? 안도하고 갑니다^^
저는 3권쯤 읽다가 너무 힘이 빠져서 중도포기하고 책꽂이에 꽂혀있는게 불편해서 그냥 중고로 팔아버렸네요.
쫌 찜찜하고 뭔가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조금 놓여나도 되겠다 싶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7-09-25 17:13   좋아요 2 | URL
저도 좀 소심한 성격이어서, 그런 책이 있으면 연연해하게 되는데,
님 덕분에 제가 도리어 위안을 얻습니다.

님에게,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외쳐 봅니다.
세상은 넓고 책들은 많다~^^
 
까짓것 창비청소년시선 9
이정록 지음 / 창비교육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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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들과 교외로 드라이브를 갔다.

햇살은 좀 따가웠지만, 살랑 바람도 부는 것이 시작은 좋았다.

 

문제는 아들의 폰을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음악을 듣는 데서 발생했다.

평상시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좋은 음악에 온몸을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땐...준비가 안 됐었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멀티 테스킹이 안되는 인간이었는데,

그동안 멀티테스킹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었던 것이다.

한번에 여러가지 일을 해내는게 아니라,

여러가지 일을 벌려 놓고 그중 한가지 일에 집중하면 다른 일은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거다.

 

난 운전에만 엄청 집중을 했는데,

아들은 폰만 잠깐 만지작거린거 같은데,

차의 스피커에서 갑자기 음악이 쏟아져 나오니 깜.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뭐냐며 끄던지 줄이던지 하라고 소리를 '빽~' 지르자, 아들도 당황했나 보다.

대화도 안되고, 음악도 듣지 말라고 하고, 그럼 자기더러 묵언수행을 하라는 거냐고 툴툴거리는 거다.

엄마의 음악적 취향이 올드해진거냐며 한숨을 쉬는데, 거듭 밝히지만 그런 건 아니다.

예전엔 여러가지 일을 하더라도 한가지에 집중을 하면 옆에서 굿을 해도 몰라서 괜찮았는데,

이젠 한가지 일을 하는데도 제대로 집중 하기까지 시동이 늦게 걸리니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이 취득하고 기억하는 방식대로,

타성에 젖어 일을 루틴으로 처리한다고 생각을 하면 왠지 슬퍼진다.

 

 

시인의 책들을 '좀' 읽었다.

우연히 만난 '불주사'가 너무 좋아서,

그 다음부턴 일부러 찾아 읽었었다.

 

산문집도 좋았고 그렇게 만난 동화, 동시집 등 리뷰로 옮기진 않았지만 제법 찾아 읽었다.

그리고 요번 청소년 시집이다.

마냥 좋다고 설레발을 쳐야겠지만,

여전히 좋지만,

솔직히 애기하자면,

이제 난 좀 식상하다~--;

 

그렇다고 허투루 읽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책 날개 안쪽의,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인을 꿈꾸기 시작했다'라는 구절과 '열아홉 번의 낙선 끝에'라는 구절이 진지하다 못해 무겁게 다가왔다.

늘 유머 코드가 탑재된, 유머를 해학으로 승화시킨 시를 쓰던 시인이 아니던가.

 

내가 식상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보여주는 언어유희가 늘 그런 식이라는 건데,

뭐, 어쩔것인가,

이제 이런 언어 유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받아들여야 하려나 보다.

 

아무래도 교육현장에 계시다 보니,

청소년의 입장을 잘 이해할테고,

그러다 보니 시 속에선 청소년인 발화자로 등장하지만, 그게 온전히 청소년의 목소리로 들리진 않는다.

 

장담컨대 이 시집에 등장하는 '노동 현장'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청소년들은 이 시집을 사거나 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 시집은 기성 세대라 통칭되는 어른들이 주변 청소년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한걸음 다가가기 위한 매개체 정도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는 이 또한 언어로 발화되고 시로 쓰여지는 순간 올드한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쏠림'이라는 시는 처음 읽으면서 거부감이 들었었다.

시가 그랬다는게 아니라,

시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키워서는 안 될 두마리 개' 얘기가 그랬는데,

전에 어디선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를 실어 신중하게 하는 김국진이 하는 걸 들었었고,

김태균도 비슷한 얘길 하는 걸 들었었다.

물론 그 후로 시는 다른 식으로 전개되니까 표절이나 차용은 아닐테지만,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개' 얘기가 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장악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쏠림

 

실외 조회 시간에

사람이 키워서는 안 될

개 두 마리에 대해 들었다.

그건 편견과 선입견이라고 했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돈으로

편견과 선입견을 분양받았을까

교과서나 문제집에 껴들어 왔겠지

가슴과 머리에 개털이 날린다면

그건 분명 어른들이 버린 개가 쳐들어온 거다

개는 비린내를 좋아한다

참치 갈치 삼치 준치처럼

맛난 물고기 이름은 대개 치 자로 끝난다

그러니까 눈치를 키워야 한다

척허면 척! 월척을 품어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도 눈치코치가 만든 거다

오동잎 하나 지는 걸 보면

천하에 가을이 온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편견과 선입견도 중심만 잡으면

강으로 모여 바다에 다다르고

앞산 뒷산 그러모아 산맥이 된다

올곧은 편견이 우주의 발소리를 듣는다

치우침이 아니라 쏠림이다

사랑은 내 편견의 총합,

처음 네 웃음을 보고

우주에 봄이 왔음을 알았듯

 

*"오동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 사람들 모두 가을이 온 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 청나라 강희제(1654~1722)때 간행된 『御定佩文齋廣群芳譜』에서.

 

'높임말'이라는 시도 같은 맥락에서 별 감흥이 없었다.

'사물'을 높인다는게 물질 숭배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외국 사람이 우리말을 배울때 제일 어려운 것이 '높임말'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사물을 의도적으로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높이고 낮추고, 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배우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는 문제인데,

사물이고 사람이고 간에 높임말 자체가 아예 없는 외국어가 낫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듯이 말이다.

 

좋았던 시는 여럿 있지만 그 중 '고양이'가 제일 좋았다.

 

고양이

 

내가 자동차 밑을 좋아하는 까닭은

덩치 큰 것들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지

나를 만나려면 눈을 내리깔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들어와야 하지

고독을 아는 자는 그늘을 사랑하지

내 몸은 저음을 내쉬는 목관악기

자기 몸을 연주할 줄 안다는 건

어슬렁거릴 특권이 생겼다는 것이지

내가 담장 위를 산보하는 까닭이지

우쭐거리고 싶으면 따라 해 봐

나는 한치 두려움도 흔들림도 없지

내 꿈은 새털구름을 연주하는 것

간혹 발을 들어 구름의 맛을 보지

그러니까 넌 내 친구가 확실해

난 네 가슴속 먹구름의 환한 등짝을 알지

쥐새끼들을 부르르 떨게 할

무시무시한 악보를 협연할 수도 있지

누가 가슴속에다 악기를 넣어 두겠어

스스로 문을 닫고 처박힌 게 아니라

태풍의 눈을 지휘하고 싶은 거지

지금은 속도를 높일 때가 아니라

구름을 깔고 앉아 고독을 정비할때

(언젠가 집앞에서 만난 길냥이 가족)

 

'속도를 높일 때가 아니라, 구름을 깔고 앉아 고독을 정비할때'라니 너무 멋지다.

태풍의 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독의 정점일테니까 말이다.

나도 태풍의 한 가운데서, 홀로 잠잠할 수 있었으면 좋겠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쟁점의 한가운데 보다는 적당히 비켜서 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한걸음 떨어져서 지지해주고 지켜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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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5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09-05 18: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음악적 취향의 문제는 아닌것 같습니다.
제가 쇼미더머니까지 챙겨볼 정도로 힙합을 좋아하는걸 보면요.
듣는건 전방위로 듣는데,
배경음악으로 깔리는거 그런게 거북합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음악만 들어도 음악이 겉돌기도 하구요.
가끔은 음악 사이의 정적이랄까, 그런걸 원하게 되더라구요~^^

북다이제스터 2017-09-05 19:44   좋아요 2 | URL
항상 주변 상황보단 내 마음의 상황이 더 중요한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죠. 우린 부처가 아니죠. ㅎ
충분히 이해될 뿐 아니라 깊이 공감됩니다. ^^

양철나무꾼 2017-09-06 14:28   좋아요 2 | URL
요즘은 한가지 일에만 집중하려고 애를 씁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일에만,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에만,
음악을 들을 때도 오르지 음악을 듣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은거죠.
얘기를 할때도 너무 여러사람이랑 말고,
상대방과 오롯하게 하고 싶고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너무 좋아요, 헤에~^_____^

[그장소] 2017-09-06 00:39   좋아요 1 | URL
편견 , 선입견 , ㅡ 일견도 있네요!^^
일견은 지나가는 개일까요 ? ㅎㅎㅎ

간혹 발을 들어 구름의 맛을 본다 ㅡ 제법 귀여워요.
허공에 헛발질하고 노는 녀석들 모습이 눈에 선해서~

덕분에 개와 고양이 잘 들여다 보고 가요!^^

양철나무꾼 2017-09-06 14:34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백문이 불여일견도 있고, 오십견도 있고요~^^

근데, 두마리 다 고양이인데요~?@@

[그장소] 2017-09-07 13:21   좋아요 1 | URL
아하핫 ~ 고양이 녀석 이름만 편견이 , 선입견이 ~ 그랬던 거라고요?

( 아 ... 아래 사진 !!! 저는 쏠림 ㅡ글 속의 견 , 개 ! 와 아래 고양이 시 , 사진 속 고양이 ㅡ 말한건데~ )

양철나무꾼 2017-09-07 22:23   좋아요 1 | URL
아하~, 그렇군요~^^
전 들여다본다셔서 사진을 말씀하시는줄로 알았어요.
역쉬~, 님은 기발해요, 그래서 댓글도 통통 튀는것이겠지만~^^
 
한식의 품격 - 맛의 원리와 개념으로 쓰는 본격 한식 비평
이용재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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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박찬일'님은 이 책의 발문을 '당대 음식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일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이 책을 훑어봤을땐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재밌고 문제 의식도 겉돌지 않는다고 여겨졌었는데,

주의깊게 읽다보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지만, 난 논쟁이 싫은고로 리뷰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책 뒷표지에도 등장하는 박찬일 님의 발문 한구절에는,

'음식과 식당이 주례사 같은 칭송을 버리고 비평의 대상이라는 걸 입증했으며,

그의 비평은 지식과 관점의 논리적 융합이라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을 보고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그런데 한걸음 떨어져 이 책을 보게 되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박찬일 님이 '백년식당' 등 당신의 많은 책에서 언급했던 '우래옥'을 책의 곳곳에서 대놓고 반박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나가는 방법도 많이 다르다.

물론 세상에 수많은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렇게 대표적인 식당을 놓고 의견이 대립되다 보니(물론 이 책에선 박찬일 님의 의견이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감이 반감되었다.

 

난 저기서 말하는 비평이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러쿵저러쿵 좋지 아니하게 말하여 퍼뜨림'이 아니라,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재 님의 주장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인양 일반화하여 전면에 배치한다.

한식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게 아니라 일단은 한번 비틀어 부정하다 보니,

냉소적이라는 인상은 주지만 전체적인 주제가 자꾸만 모호해 진다.

 

어떤 음식이나 조리법을 가지고 잔뜩 열변을 늘어놓는다.

손맛과 정성이 배제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맛의 짜임새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내겐 어떤 촉매가 없이(손맛과 정성이라는 감성적 매개체 없이)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으로 읽혔다.

 

그렇게 제시하는 조리법은 나을게 없다.

문제점만 잔뜩 나열하는데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일때쯤,

에필로그라고 하여 '한식 발전을 위한 제안 20선'이 등장한다.

암튼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나를 혼란에 빠뜨란 이유를 이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이 사진은 '대한민국 누들로드'라는 2011년에 나온 책 속의 황교익 님 관련 꼭지의 일부이다.

 

'한식의 품격', 이 책에서 '담백함과 슴슴함'을 '인지부조화의 맛'이라고 하며 힘주어 얘기하는데,

황교익 님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책의 출간연도와 '대한민국 누들로드'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을 보건대,

이용재 님이 황교익 님을 따옴표 없이 인용한 것 같다.

 

내용이 이상한 부분도 있었고 논리적으로 취약한 부분도 있었다.

 

123쪽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금도 충분히 하나의 맛을 이루는데,

균형과 색채를 위해 태국음식을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또 143쪽 '쓴맛의 활용법'에서,

주로 약용이지만 감초도 있다. 서양에서는 단맛을 아예 곁들이지 않은 감초맛 젤리를 즐겨 먹는다. 말하자면 은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같은 경우,

감초를 쓴맛으로 분류한 것이 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감초라고 하면 '약방의 감초'라고 하는 '단맛'을 지닌 그것을 떠올렸는데,

그리고 이 감초의 경우, 다량으로 장복하게 되면 부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젤리로 만들어 먹는다고 하니 이 감초와는 다른 종류인가보다.

 

또 351쪽의,

한편 샌프란시스코에는 치오피노(cioppino)라는 수프가 있다.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이탈리아 음식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조금씩 보태다(chip in)'라는 영어 표현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게 정설이다. 부이야베스의 고향 마르세유처럼, 각자 잡아 조금씩 보탠 해산물(특히 팔 수 없는 것)을 같이 끓여 선착장의 공동 끼니로 삼은 음식이라고 한다.(351쪽)

같은 경우,

샌프란시스코는 1900몇년, 이탈리아 이민자가 정착한 지역으로 알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행한 음식이겠지만,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을테니 이탈리아 음식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모든 살아있는게 그렇지만,

음식의 역사 또한 인간과 더불어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을 모르게 되면 근본 없이 뚝 떨어진 음식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감정적인 가치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다며 과학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요리 이론을 얘기하는데,

이용재 님이 쉽게 담그신다는 깍두기만 하더라도,

계절에 따라서 수분의 함량이 다르고,

따라서 레시피대로 뚝딱 담가낼 수는 있으되,

그 오묘한 맛까지 장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러가지 맛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매운 맛은 맛이 아니고 통각이고 고통이라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한식을 얘기할때 매운 맛을 제외하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목표를 높이 잡는다고 품격이 하루 아침에 고상해지진 않는다.

그보단 현 위치를 파악하고 거기에서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적인 상관 관계를 파악하고 모색해 보는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하어 우리는 단독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과 우주의 기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햇볕이나 바람, 비나 눈 따위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음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 거기에 적응을 한다.

사막에선 낙타와 선인장이 생존 방식이고 유목민에겐 목초지와 가축이 생존 전략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서양 요리 이론을 차용하는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은,

그게 전통과 습관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알고 원하는 한식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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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8-24 15:51   좋아요 3 | URL
저도 미국에 감초사탕이 있다고 들었을 때, 한약재인데, 그렇게 먹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어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더 궁금하더라구요.^^
양철나무꾼님, 여기 비랑 바람이 계속 되고 있어요. 축축한 하루예요.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7-08-24 16:40   좋아요 3 | URL
제가 아는 감초는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요.
그렇게 마구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는 거 하나,
거기다가 제가 먹어본 그 감초젤리는 설탕이 들어있는 거였는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맛이었거든요.
같은 감초인지, 자연 의구심이 생기더라구요~^^

이곳은 하루종일 오락가락이예요.
거세다가 잦아들다가요.
비랑 바람이랑 모두 다요.
축축하지만 많이 젖지는 말자구요, 몸도 마음도~^^

박균호 2017-08-24 16:45   좋아요 2 | URL
책은 잘 모르겠고 문학과지성사 건물 지하에 있는 박찬일 세프 레스토랑 가봤거든요. 맛납디다. ㅎㅎㅎㅎ

양철나무꾼 2017-08-24 16:57   좋아요 2 | URL
전 박찬일 님이 직접 만드신 음식은 못 먹어봤고, ㅋ~.
광화문 몽로 한번 갔다가 자리 없어서 그냥 나온 적 있어요.
암튼 제가 왕. 왕. 왕 애정하는 분이세요.
글도 재밌지만,
토욜아침 ‘노중훈의 여행의 맛‘이라는 라디오 프로에서도 맛나기 이를 데 없죠.

박찬일 님은 셰프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신대요.
주방장이라고 불리우는 걸 좋아하신다죠~^^

어쨌거나 ‘한식의 품격‘ 추천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꾸벅~(__)

박균호 2017-08-24 17:21   좋아요 2 | URL
그 책 장바구니에 넣어놨는데요 ㅎㅎ 재미날 것 겉아요

양철나무꾼 2017-08-24 17:42   좋아요 2 | URL
ㅎ,ㅎ,ㅎ...누가 말리겠어요.
암튼 님 책이나 어여 내주세요.
제가 박찬일 님 만큼 애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서니데이 2017-09-01 18:53   좋아요 1 | URL
얼마전까지 더웠는데, 갑자기 서늘한 여름을 지나 따뜻한 오후가 있는 9월이 되었어요.
기분 좋은 일들, 행운 가득하고 재미있고 좋은 한 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2017-09-05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