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일까, 여행의 계절일까?
여름 내내 읽던 최명희 님의 '혼불'을 9권까지 읽었고 이제 마지막 10권만을 남겨놓고 있다.
바짝 당겨 읽고 끝낸 후에 어디 단풍 놀이라도 가볼까 했었는데,
마지막 권을 앞에 두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다.
10권짜리 소설에 9권까지 읽었는데 끝이 안보이는데,
이런 상태로라면 미완결의 소설이거나 완결이 되더라도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어 어설프게 끝나버릴텐데,
그렇다면 미완결이라고 귀띔이라도 해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미완결이라는 걸 알고도 장장 10권을 내달려왔을까, 그건 장담하지 못하겠다.
두산 백과 사전에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된 직후부터 쓰기 시작해
이듬해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2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제1부가 당선되었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제2∼5부를 연재한 뒤 1996년 17년 만에
전10권(5부)으로 완간된 최명희의 작품이다.
이라고 되어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학대백과에는,
이후 작가는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투병하던 중에도 제5부 이후 부분을 구상하고 자료를 정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끝내 집필하지 못하고 타계하여, 1996년에 간행된 판이 최종본이 되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는,
1988년 9월부터 1995년 10월 사이에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고 1996년 한길사에서 10권의 결정본이 발간된 최명희의 미완성
대하소설.
이라고 되어 있다.
호남지방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노래, 음식 등을 생생한 우리 언어로
복원해내 ‘우리 풍속의 보고(寶庫), 모국어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9권에선 얘기의 대부분을 사천왕상에 할애한다.
그냥 사천왕상 얘기를 할때는 어려운 얘기가 지루하게 펼쳐진다 정도였는데,
선운사의 사천왕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는데,
알고나니(시댁이 선운사 근처라서),
더 아름답고 대단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면만 놓고 봤을때는 아쉽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소설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통해서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식이나 교양의 축적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담론이 아니라,
그와 버무려진 이야기의 전개인데,
이야기의 전개는 완전 미미하고 더딘데다가 생략도 많았는데,
그 생략된 부분이 어디에선가 드러날테지 하고 기다렸는데,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랄까.
10권을 다 읽어도 '완결'을 봤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했다는 허무함이 남을 것 같다.
오히려 내 맘대로 그 후의 이야기를 상상해보는게 재미있겠다.
오늘 아침 대형포털을 둘러보니 최영미가 핫이슈이다.
어떻게 그렇게 저렴하고 발랄한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해명도 완전 궁색하다.
마침 '공지영'의 시인의 밥상'을 겹쳐읽었다.
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언제부턴가 '공지영'은 잘 안 읽게 되었다.
미려한 문장이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던가 말이다.
투박하더라도 삶으로 충만한 글들이 더 좋았다.
이 책은 '지리산 행복학교'의 곁가지쯤 되려나,
박남준 시인이 요리하고 공지영이 쓴 것이란다.
'지리산 행복학교' 이후로 끈질긴 방문객들에 의해 괴로움을 겪었던 지리산 시인들은 공지영과 소원해졌었단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다시 뭉친 것은 찻잔에 매화 한 잎을 띄우는 박남준 시인의 사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눙을 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박남준의 요리 솜씨는 먹어본 사람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울만큼 좋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그 때문만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장례비용 200만원( 요즘 물가를 고려하여 300만원으로 올렸단다)외엔 무소유한 삶을 사는 시인 아파서 큰 수술을 했기 때문이라는 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을 보다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사연도 다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 그리고 물론 그 과정도 다 다르지만 나의 지리산 친구들의 기본 생각은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하여 삶의 대부분 시간을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노동을 하며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겠다. 긍정형으로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원하는 것들을 하며 삶을 누리겠다'일 것이다. 이들은 도시에서 자라며 얻은 비본질적인 욕망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가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투덜거리기도 하는데 그들의 말은 이렇다.
"나는 다르게 욕망할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려보내기를, 저 산과 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떠나고 누구보다 계절을 깊이 즐긴다.(124~125쪽)
공지영은 한 대목에서,
고독은, 배가 오가지 못하는 이 망망대해의 고독은,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만 남은 고독은ㆍㆍㆍㆍㆍㆍ.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혼자 왕따가 되고 혼자 실직하고 혼자 비정규직이 되는 고독과 어떻게 다를까. 절망에 우열을 매길 수 있을까.(268쪽)
라고 하는데, 이 구절이야말로 아무것도 내려 놓지 못하는 자의 가식으로만 읽혔다.
진정 그것이 절실하다는 것은 흠뻑 담굼질해야 느낄 수 있는 것들이지,
말로 이러쿵 저러쿵 미사여구를 쓴다고 하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아무것도 바뀌는게 없다면,
글은 더 이상 울림이 없을 뿐더러,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박남준 시인의 시집과 편지글이 이렇게 저렇게 갈무리되어 나왔다.
공지영 님의 '시인의 밥상'이 박남준 님에게 어떻게 소용이 되었는 지는 모르겠고,
이렇게 두 권이 나온걸 안 이상 지체할 순 없겠다.
박남준 시선집
박남준 지음 / 펄북스 / 2017년 8월
하늘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날아오거나
박남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사람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자기가 내보이고 광고한다고 해서 가치가 드러나는게 아닐거다.
조용히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걸 보고 저절로 느끼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는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오늘 시집 한권과 산문집 한권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