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의 시대'를 읽으면서 춘추전국시대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공원국의 10권짜리 '춘추전국이야기'를 구매했었다.

전에 알케 님이 상찬한 것도 보았고, saint236님도 좋다고 추천해 주셨었는데,

또 다른 친구는 별로라고 하길래 미뤘었다.

며칠전 이 책이 눈에 띄길래 '어디 한번~, 내가 직접 읽어 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펼쳐들었는데,

웬걸, 재밌어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거라.

 

 

 춘추전국 이야기 1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강신주의 책도 좋았는데, 이 책은 강신주와 비교하기 민망찰 정도로 재미있다.

춘추전국 시대와 관중에 대한 얘기니 겹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강신주는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면, 공원국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접근한다.

물론 강신주도 '춘추전국시대'의 무대가 된 중국의 그곳들을 가봤을테지만,

공원국은 지도와 함께 사진을 실었으며,

그 시대의 문헌들을 여러권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데다가,

권말 당신의 여행기를 실어서 현실감과 현장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기존의 고사를 중심으로 한 책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의 기록과 더불어 지리를 특히 강조했다. 사실 황하나 정강, 태행산맥 등 자연이 인간에게 강요한 한계를 이해하지 않고 춘추전국의 극적인 순간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춘추전국의 무대를 구성한 지리를 잘 이해하면 아마도 복잡할 것 같은 열국들의 각축도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책에서 지도가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18쪽)

 

아직 1권만을 읽은 상태여서 속단할 수는 없지만,

2권까지 나온 강신주의 그것들이 더 이상 못 나오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이 좋은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는 현대인의 지혜를 가지고 고대를 상상하되, 고대를 마음대로 비틀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일 뿐, 상상에 의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그 많은 사건들을 기억하며 역사를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낫다. 그러나 역사를 다룬 많은 저작들이 이런 우를 범한다. 그래서 역사를 마치 개인들의 무용담이나 민담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이렇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고 원인과 결과가 아래 위도 없이 춤을 춘다(60쪽)

책을 읽어나갈 방향을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사고 또는 논리적 사고가 굉장히 탄탄하고 정확할 것 같지만,

논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논점의 윤리대로 발화하거나 서술하는지, 의 여부에 따라서 기초부터 어긋나거나 흔들릴 수 있으니 조심하여야 한다.

 

또 한가지, 전제에 편견이 생기면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며, 그것이 역사 해석의 함정이라고 한다.

로마를 제압했던 훈족을 예로 들어,

이길 때는 용감하고 질 때는 비겁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고 유달리 초인적이지 않았다.(62쪽)

얘기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이 책이 좋았던 건 관중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이다.

관중은 인간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이다. 뻔뻔한가 하면 염치는 있고, 몰아치는가 하면 부드러운 마음도 있다. 자신이 다 안다는 듯이 교만하다가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한다.(164쪽)

그는 적이라도 훌륭하면 인정하고, 자신에게 득이 되더라도 적의 배신자는 좀처럼 신뢰하지 않았다. 관중은 이익이 있더라도 인간적으로 호감이 없는 인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348쪽)

 

책을 읽으면서 의아한 부분이 있었는데 토사구팽과 관련해서 이다.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팽 당하는 것은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과는 좀 다른 애기가 아닐까.

 

페이퍼를 이쯤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노무현 대통령 서거 8주년 추도사 때문에,

마음이 어쩌지 못하겠어서 내용이 길어진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추도식 참석이라고 하는데,

그 중의를 알겠는지라...눈물이 났다.

 

분위기를 바꾸어,

읽을 책이 밀렸는데 백승종 님의 신간을 발견했다.

 

 

 

 생태주의 역사강의
 백승종 지음 / 한티재 /

 2017년 5월

 

백승종 님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이란 책으로 알게 되었는데, 나는 참 좋았었다.

공원국도 이제 시작이고,

친구한테 최명희의 '혼불'도 내놓으라고 해서 대기중인데,

언제 읽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책은 들여주셔야지, ㅋ~.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23 21:52   좋아요 0 | URL
권력을 가진 자는 늘 불안할 겁니다. 자신이 믿었던 충신을 의심할 거고, 간신은 권력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약점 삼아 충신을 제거하도록 종용합니다. 토사구팽에 간신의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양철나무꾼 2017-05-29 16:30   좋아요 0 | URL
제가 토사구팽 관련 부분에서 궁금했었던 건,
쓸모 없어져서 잡아먹을 정도면,
이미 ‘권력에 위험이 되는 세력‘은 아니지 않나 하는 부분이었어요~^^

잃을 게 없어서 불안하지는 않은데,
하늘이 무너질까 하는 ‘기우‘를 종종 품고 삽니다~--;

AgalmA 2017-05-24 02:34   좋아요 0 | URL
노무현 대통령 8주년 추모날 그를 탄핵했던 이가 첫 재판을 받는 역사적인 날 역사를 환기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양철나무꾼 2017-05-29 16:3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역사는 주연과 조연이 바뀔뿐 되풀이 되나 봅니다.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안목을 적절히 안배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017-05-26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7-05-29 16:40   좋아요 2 | URL
관포지교의 그 관중 맞습니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에 의해 ‘관자‘라는 책을 쓰게 한 그 ‘관중‘이요~^^

제가 보기엔,
포숙은 완전 학자스타일이었고,
관중은 실전형 정치가 스타일 이었다고나 할까요.

전 관중이 자신의 허물을 그냥 덮지않고,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점이 좋았습니다.

오늘날 관중이 살았더라면, 인기만발이었을 듯~^^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전 넷 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진과 함께 청와대를 산책하는 사진 한장이 화제였다.

사진 한장을 놓고도 다방면에서 여러가지 정치적인 언급이 나올 수 있겠지만 차치하고,

산책이 주는 풋풋함이랄까, 삶의 활력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로베르트 발저의 이 책 '산책자'를 읽었다.

 

실은 책을 읽다가 몇번을 집어던질뻔 하였다.

뭐, 특별하게 바쁜 일도 없고,

그렇다고 '바빠~'를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사는 부류도 아닌데,

독백조의 너무 느린 호흡이 답답했다.

그걸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읊조리듯이 쏟아낸다.

호흡이 느리긴 하지만 생각의 전개방식과 어조가 느긋한 것이고,

내용은 뒷부분의 '산책'을 제외하고는 한호흡에 내달린 것처럼 짧다.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을 해야지 하고 페이지를 넘기면 어느새 끝이다.

중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변죽을 울리는 꼴이다.

글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읽는 내가 그러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벌써 끝이 나 있다.

 

 

로베르토 발저는 어찌보면 이솝우화를 닮았다.

간결하면서도 해학적이다.

독일어 특유의 어떤 운율을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글만을 놓고봤을때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저자는 때때로 우울한것 같고,

어떤 때는 우울이 몰고온 슬픔 속에 침잠하는 것 같다.

이 책 속의 글들은 소설집이라고 되어있지만, 어찌보면 수필같기도 하고 꽁트 같기도 한데,

정작 발저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시인'이었나 보다.

ㆍㆍㆍㆍㆍㆍ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무모한 무용수처럼 구석진 내 방으로 불쑥 뛰어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8쪽)

이 글의 제목은 '시인'이고, 곳곳에 보이게 보이지않게 '시인'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그는 '시인'에서.

자연이나 시간,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8쪽)

고 표현하고 있다.

 

아무려나,

그는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들을 구사하지만,

그래서 글들이 가볍고 경쾌하지만,

글 속에 담긴 내용은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있어서 산책이란 단순히 발을 내딛어 걷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붓 가는대로 쓰는' 수필이라는 형식의 결과물로 등장한다.

 

발저에게 있어서 산책은 '여러 가지의 번쩍이는 발상이 번개처럼 동시에 떠올라 한꺼번에 마구 밀려오는 것이 보통이니까. 그래서 생각을 차분히 정리를 좀 해보려고(309쪽)' 하는 것이다.

 

'산책'의 앞부분엔 이런 구절도 나온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로지 내 길을 갈 뿐입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당사자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외양이란 진실과는 다른 모습일 경우가 흔하고, 그러니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그 사람 자신에게 맡겨두는 편이 가장 좋겠지요. 어떤 사람을, 더구나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식견을 쌓은 사람을 그 사람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자신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나는 종종 안개 속에 갇힌 채 불안에 휩싸이고 수천 가지의 곤경을 겪으며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비참하게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투쟁의 시간을 소중하다고 여깁니다. 남자가 긍지를 얻는 원천은 기쁨이나 쾌락이 아닙니다. 남자가 영혼 깊숙이 긍지와 희열을 느끼는 것은 큰 어려움을 담대하게 극복하고 끈질긴 집념으로 고통을 견뎌냈을 때뿐입니다. (289쪽)

그가 글을 쓰는 이유, 산책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책이 충분히 좋기는 하지만,

그의 이력을 잘 모르거나,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서 사전지식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좀 지루할 수도 있겠다.

 

무릇 산책이란 어떤 목적도 띠지 않는 것이고,

그리하여 좀 지루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하면,

내 또 할말은 없다만~--;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16 21:33   좋아요 1 | URL
내 길 알아서 잘 가고 있는데, 그거 대해서 말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가는 길에 의심이 생겨요.

양철나무꾼 2017-05-17 14:33   좋아요 1 | URL
전 때론 고집불통이고 때론 팔랑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은건 오지랖 넓은, 바꾸어 말하면 말 많은 그 사람들 때문인것 같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랬는데, 자꾸 반대로 하고 싶어져 큰일이예요~--;

서니데이 2017-05-17 15:2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즐거운 오후 되세요.^^

양철나무꾼 2017-05-23 17:10   좋아요 1 | URL
오후되니까 좀 꾸물거리고 빗방울이 떨어져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이라서 그런가 봐요~--;

2017-05-2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3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3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방 예찬 -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남자의 기록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과 보대끼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생활하는 내게,

공방은 거창하고 추상적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꿈이라고 쓰고 숨을 쉬는 통로라고 읽는다.

 

공방을 꿈꾸긴 하지만,

공방과 관련된 무엇을 펼쳐놓을 여건은 안되어 주시고,

시간을 쪼개 할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다.

리뷰는 글의 형태일때도 있고, 어쭙잖게 그림이나 수공예품 따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책 '공방예찬'을 읽기 시작하게 된게,

'공방'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는지,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남자의 기록'이라는 부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다듬고 꿰매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게 나랑 닮아서 인지, 잘 모르겠다.

책 날개 안쪽을 보게 되면 바늘에 실을 꿰는 섬세한 손이 나오는데, 한참을 쳐다봐 주시고, ㅋ~.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글을 쓰는 남자라니 '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송의 '목수일기'를 떠올렸었는데 내가 너무 앞서간듯 여겨지기도 하지만서도~--;

 

사진 바로 그 밑에,

나무꾼도 갖바치도 아닌데 가구와 가방을 만든다. 아무것도 속일 수 없는 정직한 직업이다. 가장 원초적인 근육을 움직이면서 창조적 노동에 참여하는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정한 기쁨이다. 무엇보다 내 몸이 바뀌었다는 것, 내 노동과 능력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다. 가끔은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고, 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친다.

라고 되어있는 프로필도 멋지다.

 

'작가의 말'을 보게 되면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때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상처를 주기도 했다. 좋은 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이 너무 힘들어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맸다. 무언가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진짜 좋은 날이 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내 삶의 가장 빛났을 수도, 가장 어두웠을 수도 있었을 10년을 견뎌냈다. 몸이 녹초가 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니. 공방은 내 오랜 견딤의 동반자였다.(9쪽)

이 구절을 읽는데 내가 엄청 좋아하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났다.

'지옥은 신의 부재'가 왜 생각났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를 놓고보면,

직장이란 것이 공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취미활동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밑천이 된다.

직장이 있기에 취미활동을 통하여 쉴 수도 있고, 위로받을 수도 있고, 재충전의 필요성도 느끼는 것이지,

공방활동만을 하거나 공방활동이 직업이 된다면 쉬거나 위로받는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부재가 곧 지옥이라는 명제만큼의 울림이었다.

 

암튼 그는 그런 글들을, 그리고 사진들을...블로그에 일상을 올리듯 덤덤히 늘어놓는다.

일기라고 하기엔 덜 사사롭고,

수필이라고 하기엔 주제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뿐 더러 지나치게 사변적이다.

글쓰기 방식도 문장 단위로가 아니라, 읽기 좋게 끊어놓는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간간이 메모해놓은 글들을 펼쳐놓는다.

글의 밑그림을 그린다.

쪽글과 쪽글을 실로 꿰듯이 연결한다.

불필요한 문장은 과감하게 깎아버린다.

깎고, 다듬고, 꿰매서 글을 완성한다.

 

가구와 가방을 만드는 일은 글쓰는 일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만들고 짓는 일은 얼추 비슷하게 진행된다.

ㆍㆍㆍㆍㆍㆍ

『혼불』의 작가 최명희였다.

평생 대하 장편소설 『혼불』에만 매달렸던 작가는

원고 쓰는 일을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일이자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

온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글을 파나가는 것이라 말했다.(36쪽)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선생님, 바느질은 에르메스급이야!

물론 그 칭찬 속에는 다른 과정도 꼼꼼히 하라는

속 깊은 충고가 담겨 있었을 게다.

조사 중에서 하필이면 '은'을 썼으니 말이다.

원장님의 농담 같은 칭찬을 듣고 난 후

나의 바느질은 춤을 췄다.(105쪽)

이런 글들을 보게 되면 작가가 섬세하고 결이 고운 사람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프로이트 박물관을 구경하는 내내 조금 음산하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통가죽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프로이트의 여행가방과 - 물론 왕진 가방일 수도 있겠으나 - 휴대용 술병 케이스를 보았다. 우울한 프로이트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쫌 놀 줄도 알았겠군, 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S.F.'라는 이니셜을 보고 픽 웃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 알겠다고요, 프로이트 선생님. 그런데 나는 자꾸 불경스럽게도 'Science Fiction('공상' 과학 소설)'이 떠올랐다.(10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참을 낄낄거렸는데,

'S.F.'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Science Fiction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로버트 실버버그의 두개골의 서'를 읽었던 나는,

역자 최내현처럼 social fantasy 라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걸 꾹 참게 된다.

그러고 보면 모든 Science Fiction은 어떤 의미로는 social fantasy 가 되는게 아닐까 싶다.

 

작가가 어떤 목공에품과 가죽 작품을 지향했는지는,

한스 베그네르를 인용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는 의자가 아니라 앉는 의자'를 추구했단다.

예술이 아니라 실용을 중시했다는 말일 테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의자는 에술 작품이 되었다.

한스 베그네르는 자신의 의자가 대량 생산될 수 있게 고안했다.

아무리 대량 생산될 수 있는 그의 의자라지만

서민들이 쉽게 넘보기는 어려운 의자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의자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그의 정신만은 값지다.

북유럽 스타일의 정신만은 고이 간직할 일이다.(215쪽)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모든게 완벽하지는 않다.

상처는 죽 떠먹은 자리처럼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처는 마음 깊은 곳에

겹겹의 나이테가 되어 또렷이 자리 잡는다.(111쪽)

이 문장은 그럴듯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상처가 났던 자리엔 옹이가 남는다.

나이테는 상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계절에 따라 세포분열의 속도가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이 부분을 캡쳐한 이유는 '바느질의 정석'을 표현한 저부분이 맘에 들어서 이기도 하지만,

책의 제본상태가 불량하여 벌어지고 급기야 낱장으로 떨어진다.

책이 소모품이긴 하지만,

책을 소중히 다루는 내게 와서 이 정도이면 허술해도 한참 허술한 것이다.

 

220쪽 안데르센 마을을 보러 가잖다.

이 부분은 '가잔다'의 오타이다.

 

사진들은 그가 만든 목공예품이나 가죽 작품들을 많이 보여줬으면 싶은데, 작품 사진에 가깝다.

책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좋다고 설레발치는 것은,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남자 특유의 섬세함과 고운 성정이 글 곳곳에 묻어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손으로 매만지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고,

우리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예감적으루다가 들기 때문이다, ㅋ~.

 

아내가 망가뜨린 물건을 차일피일 미루며 내버려두자

그녀는 공방까지 다니면서 뭘 이런 것도 고치지 못하냐며 투덜댄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쏟아낸다.

장인이 뭐 별거야.

물건만 잘 만들면 장인이야?

장인은 우리의 망가진 삶을

우리의 찢어진 마음을 꿰매고 수선하는 게 장인이야.

물건을 고치고 수선하는 것은

단순히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안야.

그건 그 물건을 사용하던 사람의

삶을 생명을 마음을 꿰매고 수선하는 거야.

알았어?

 

아내의 말을 찬찬히 들어보니,

다 옳다.

누구에겐가 자랑하려고 가구나 가방을 만들지는 않았다.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망가진 물건이 되살아나는 느낌도 좋았다.

저마다의 물건에는 저마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ㆍㆍㆍㆍㆍㆍ

그래도 어쩌겠나.

아내는 나를 '자기만의 맥가이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얄밉지만,

그래도 가끔은 뿌듯하다.

나는 때로는 목수가 되고,

때로는 갖바치가 되고,

때로는 신기료장수가 되고,

때로는 무두장이가 되어,

누군가의 망가진 추억을

다독이고 매만지고 위로하고 싶은 게다.(258~259쪽)

 

무엇보다 저자는 이 모두를 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글로 치유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7-05-11 16:41   좋아요 0 | URL
그야 말로 저술이 겸비되는 장인이었군요.^^..

양철나무꾼 2017-05-11 17:35   좋아요 1 | URL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 본업이고,
나무랑 가죽은 겸업인 셈이니까,
어째 살짝 바뀐것 같은데죠.^^

어쨌거나 전 님의 글과 시진들이 좀 그립습니다.
시험 어여 끝내고 왠만하면 빨랑 복귀하시죠~!

박균호 2017-05-11 16:44   좋아요 1 | URL
호기심이 가는 책이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2017-05-11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1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1 1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5-11 19:10   좋아요 2 | URL
하마터면 살뻔 ㅎㅎ
 

 

 

 

 노자 도덕경, 그 선의 향기
 노자 지음, 감산덕청 주석, 심재원 옮김 /

 정우서적 / 2010년 12월

 

요번 주에 부처님 오신 날이 있어서 그런가 책도 그 feel로 읽어주신다.

책 제목은 '노자 도덕경, 그 선의 향기'이다.

혹 제목만을 보고 '노자 도덕경'인데 부처님 오신날과 무슨 연관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쓴 감산덕청이 스님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은 '능엄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노자라고 하면 무위자연을 떠 올리지만, 그게 노자의 정치 덕목이기도 하다.

다음주 선거랑 관련하여서 생각해볼 구절도 있고,두루두루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감산덕청은 명대의 4대 선승 중 한명인데 유불선 3교 일치를 주장하였단다.

노장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선불교는 송대, 명대 시대가 바뀔때마다 동일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차이점을 부각시키기도 하다가, 감산덕청에 이르러서는 차이점은 부정하고 일치점만 내세웠다고 한다.

 

감산덕청이 의의가 있는 것은 이 책의 주석 작업만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주석 작업을 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 막히면 좌선을 하면서 깨달음이 올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선사상과 노장 사상 간의 일치된 깨달음을 언어로 드러내려고 노력을 하였단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는데,

읽은 부분에서 그동안 내가 알던 내용과 달랐던 부분이 있었다.

보통 '풀강아지 인형'으로 해석하는 5장을 왕필처럼 '풀'과 '개'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풀과 개를 우주만물의 에코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들로 보고 이러한 사물의 생성에 있어 도는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다는,

즉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설명하고 있다.(101쪽)

 

어찌되었건 5장에 내가 좋아하고 새기는 대목이 등장한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하게 되니, 중심을 지킴만 못하다.

 

또 한구절 7장의 '天長. 地久.' 또한 天과 地를 각각 따로 언급하였듯이 함부로 붙여서 '천지'라고 명명하면서 마치 하나의 단어인양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天에 長을 地에 久를 서술어로 달리 붙여 설명한 것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노자의 우주론에서 天은 시간을, 地는 공간을 상징하는 개념이란다.

 

또 한구절 8장의 上善若水로 얘기되어지는 부분이다.

여기서 政善治, 정치할때는 물처럼 잘 다스려라 가 나온다.

아무래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어서 눈에 띈 대목같다.

 

책 곳곳에 잠깐씩 심재원의 역주가 등장하는데 새겨볼 만하다.

 

암튼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는 것이 짬뽕공에 버금가는 난,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천장지구유시진 차한면면무절기

천지는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마음속에 품은 이 한이야 길이 끊일 때가 없으리.

 

라고 하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한대목이 떠올랐을 뿐이고~--;

오래간만에 영화 '천장지구'가 보고싶기도 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균호 2017-05-02 12:30   좋아요 0 | URL
까만것은 글씨라는 것 밖에ㅡㅎ

양철나무꾼 2017-05-02 13:37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자와 장자를 좋아해서 많이 보긴 했지만,
깊이 본건 아니라서 제 자신만의 주관을 갖지 못했습니다.
불교, 능엄경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다만 더듬이를 열어두고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책 쓰시느라 봄을 즐기실 새도 없는건 아니신지...
쉬엄 쉬엄, 빨랑 하세요.
다음 책도 기대만발입니다~^^

cyrus 2017-05-02 13:18   좋아요 0 | URL
감산대사가 노자를 풀이한 책이 새로 나온 적이 있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나온지 꽤 오래된 책을 샀어요. ^^;;

양철나무꾼 2017-05-02 13:41   좋아요 0 | URL
저도 감산대사 예전 것도 가지고 잇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먹지를 못해 집어던지기를 여러번,
요번 심재원 번역은 당신의 주관이 좀 개입되어 그렇지,
좀 좋더라구요~^^

전에 노자 공부하셨다는 글, 봤었는데,
감산덕청을 아시다니 동지를 만난듯 반가워요~^^

hnine 2017-05-02 14:11   좋아요 0 | URL
잘은 몰라도 노자 관련 글을 읽다보면 <무(無)> 자의 행진이라는 것은 알아요 ^^
마음 속 품은 한이 천장지구에 버금가는군요.

양철나무꾼 2017-05-02 14:26   좋아요 0 | URL
없을 ‘무‘가 아니라 無라는 자리값이라는걸 깨닫기까지,
고정관념에 빠져 있어서 어려웠어요.^^

저는 한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천장지구에 버금간다고 하고 싶지만서도~--;

AgalmA 2017-05-04 23:11   좋아요 0 | URL
존 그레이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는 중국 제사에서 태우던 ˝지푸라기개˝가 이 책에서는 ˝풀강아지 인형˝으로 풀이되었네요. 어감이 덜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양철나무꾼 2017-05-06 09: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존 그레이에서 본 것 같아요~^^
근데 감산덕청은 왕필을 따라서 풀 따로 강아지 따로 이렇게 놓고 접근해요.
뭐, 저야 토를 달 깜냥은 아니어주시고,
학설로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벼운 천 소재의 숄더백을 샀다.

천으로 만든 숄더백이 갖고 싶었던 터라 남편에게 설레발을 치며 자랑을 했더니,

남편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너를 피하지 않니?"

"왜?"

"도를 아십니까 인 줄 알고."

봄을 맞이하여 좀 걸어보겠다고 편안한 신발과 가벼운 숄더백을 장만한걸 가지고 놀려대는 남편이라니~--;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일뿐만 아니라, 산책의 계절인가 보다.

내가 참 좋아하는 김탁환 또한 고향인 진해를 걷고 책을 낸걸 보면 말이다.

혼자 걸은게 아니고 엄마와 함께 걷는데, 가끔 남동생이 식사자리에 합류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글로 옮겼다.

아니 책으로 나올걸 계획한게 먼저이겠다.

매일 하모니카를 부는 엄마가 하모니카를 밟고 다치셔서 한번,

그리고 김탁환이 중간에 세월호 관련 책들을 만드는라 또 한번,

엄마와의 산책은 연기되기도 하고 중단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용은 뜨문뜨문하거나 단절된 기색이 없는 것이,

한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적당한 온기를 지닌 것이 따뜻했다.

책 겉표지 안쪽에 등장하는 지도는 동생의 찬조 작품이다.

엄마의 골목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 가족의 골목이라고 해야 할까, 가족의 거리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 자신의 일로는 입을 앙 다물고 눈물을 참지만, 책을 읽다가 우는 일은 흔하다.

보통은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상념이 몰려오고, 그런 상념들이 연결되어 눈물이 나올라치면 책을 빙자하여 울게 된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아름다워서 울때도 있다.

이 책의 경우, 처음엔 상념이 눈물을 불러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후자였다.

 

함께 골목들을 걸으며 엄마는 얘기를 하고 아들은 글을 쓴다.

그러니 글은 아들이 쓰지만 엄마의 인생을 대필하는 것이다.

이런 글들을 보면 가족의 인생을 대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가족의 인생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러웠고 약이 올랐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계획도를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어도, 매일매일을 그대로 지키긴 어렵다. 몇 번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후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가 들키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벾에 세웠다. 창원군에 살 땐 집 앞에 나무들이 무성한 언덕이 있었다. 어둠이 깔린 숲을 혼자 보고 있노라면, 무서웠다. 먼저 낯선 소리들이 밀려왔고 뒤이어 알아보기 힘든 형체들이 일렁거렸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아도 그 소리와 형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벌을 설 때도 있었는데, 동생은 15분도 넘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ㆍㆍㆍㆍㆍㆍ나는 견뎠다. 겨울에는 추위와도 싸워야 했지만, 엄마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진 않았다. 차라리 숲으로 들어가서, 그 숲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엄마 대신 문을 열고 나와선 나란히 섰다. 내 눈길을 따라 어둠을 쳐다보며, 아버지는 짧게 물었다. 그럴 땐 이상하게도 평안도 사투리가 슬쩍 얹혔다.

"뭐이가 있나?"

니는 피하지 않고 견디는 중이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단정한 문장이 떠오르진 않았다. 아버지가 내 야윈 어깨를 감싸며 덧붙였다.

"담부턴 그러지 말라우."(35~36쪽)

 

그래서 때로 글들은 필자의 인생만큼이 아니라 화자의 인생만큼의 통찰이 담겨 있다.

 

엄마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일을 만들어가는 대신, 말을 아끼고 일을 지우는 쪽을 택했다. 하모니타를 배우기 시작한 것 외에 일흔 살을 넘긴 후 엄마가 벌인 일은 없었다.(59쪽)

나도 무언가를 사고 들이고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버리고 나눠주고 일을 줄이고 잉여로워지는 쪽을 택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롭게 살고싶지만 현실적으론 힘들겠고, 가방 하나에 들어갈 정도였으면 좋겠다.

언제고, 어디고 상관없으니 가벼운 산책 하듯 그렇게 움직일 수 있게 말이다.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만 살았어요?"

"하고픈 이야길 다 하고 살아, 그럼?"

"그건 아니지만ㆍㆍㆍㆍㆍㆍ"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ㆍㆍㆍㆍㆍㆍ"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ㆍㆍㆍㆍㆍㆍ그렇게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 그럼 이야길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고."(156~157쪽)

 

나 또한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는게,

아니 어른신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게, 직업이다 보니,

(엄밀하게 말하면 얘기의 행간을 파악하는 거지만~.)

어르신들을 좀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분들도 계시다니 놀랍다.

 

때론 어르신들의 얘기에 '네에~.', '그래서요~?' 따위의 추임새를 넣기만 할뿐,

제대로 된 문장을 발음해보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이야기를 품고 살고 싶지는 않다.

예전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상대방이 불편할 얘기는 하지 않고 말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상태에 집중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일단 하고 본다.

대신 감정적으로 앙금을 남기진 않는다.

사람에게 할 수 없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숲에라도 털어놓는다.

 

여기서 나는,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의 농담 아닌 진담을 슬쩍 끼워넣었다.

"정글에서 자연사는 잡아먹히는 겁니다. 엄마는 절대 자연사하실 일 없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니?"

"네, 그렇게 되니까, 살 만큼 살았으니 죽고 싶단 소린 하지 마세요."

"ㆍㆍㆍㆍㆍㆍ맘에 걸렸어?"

"살 만큼 살았단 엄마 이야길 듣고 맘 편한 아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170쪽)

 

사실 나이로 따진다면 나는 엄마보다는 아들에 가깝다.

두살 정도 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보다는 엄마 신자 여사가 한 말들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겠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을 만드는 것 또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이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아. 깃털처럼, 그래 깃털처럼. 만나긴 분명 만났는데, 만나고 나면 그의 표정도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떠오르질 않아. 만나 다행이지만 만나지 않았대도 불행하진 않다는 그런 느낌도 들고."

"곧 올게요, 정말."

"난 요즘 내가 꼭 낙엽이랑 비슷하단 생각을해. 특히 노란 은행잎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땐 참 고와서 눈을 뗄 수 없는데, 땅에 떨어진 노란 것들은 쳐다보기도 힘들어지더라고."(172쪽)

 

나이가 한살 더 먹을때마다 좀 더 홀가분해질 수 있기를,

그래서 산책하듯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 산책은 걸어서 할 수도 있지만,

때론 이런 책 한권을 통해서 글 속을 누비듯 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랬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7-04-26 16:03   좋아요 0 | URL
패브릭 소재 가방 편하고 좋아요. 일단 가벼워서 좋고요. 나중에 세탁도 가능해서 좋아요.^^
봄에 잘 어울리는 밝은 색 신발과 가방도 잘 어올릴것 같은데, 갑자기 도를 아시는 분(?)으로.^^;
책 표지가 벚꽃핀 날의 밤 같네요.
양철나무꾼님 좋은하루되세요.^^

양철나무꾼 2017-04-26 16:24   좋아요 1 | URL
리뷰 본문에서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지만,
제가 어릴때부터 엄마 없이 커서 그런가,
엄마와의 케미 그 부분이 완전 좋았고,
저도 아들이랑 그런 관계가 되어야지 ‘불끈~!‘했습니다.

서니데이 님표 가방들도 귀요미 조카가 잘 쓰고 있습니다~^^

yureka01 2017-04-26 16:3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양철나무꾼님도 이렇게 서재에 이야기를 풀어내시지 않습니까요..
이야기는 풀어야지 품어서 쌓이게 하면 답답해지잖아요.ㅎㅎㅎ
오늘도 잘 풀어 내셨습니다..휘리릭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7-04-29 10:27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풀어야 하는게 맞죠.
그런데 자기안에 품어두지 않는다고,
품으면 병이 된다 싶어서,
자기 할 말만 마구 하면,
할때는 모르겠는데...나중에 괜히 공허해 지더라구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건,
어찌보면 사랑처럼 밀고 당기는 ‘밀.당.‘이 묘미인것 같아요~^^

서니데이 2017-04-26 16:46   좋아요 0 | URL
1.중간에 인용이 있는 글은 서재에 다시 와서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부분이 인용인지 잘 모를 때도 있거든요.
2.리뷰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룽잉타이의 책이 생각납니다.
3.우리는 자연사하지 않는 사람들일거예요. 그러니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원하는 인생을 즐겁게 살면 좋겠습니다.^^


양철나무꾼 2017-04-29 10:34   좋아요 0 | URL
1.그런 의미에서 북플도 서재에서처럼 보여졌으면 좋겠어요.
그게 힘들다면 인용문을 돌출시키는 방법을 쓰던지 말예요.^^
2.저도 룽잉타이 책 3권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어버지 못해서,
코멘트는 좀~--;
3.심장이 뛰는 방향이라는 말을 들으니,
‘바람 피기 좋은 날‘이란 영화가 생각났어요.
거기서 윤진서가 막 뛰던 장면 말예요. 저도 그렇게 심장 두근거리게 뛰어본 적이 언제던가 싶어서 말예요.
4. 날이 너무 좋아요.
다들 밖으로 소풍 나가 버려서,
조용한 것이...공부하기에 딱 좋은 날들입니다~^^


2017-05-01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