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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골목 - 진해 ㅣ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평점 :
가벼운 천 소재의 숄더백을 샀다.
천으로 만든 숄더백이 갖고 싶었던 터라 남편에게 설레발을 치며 자랑을 했더니,
남편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너를 피하지 않니?"
"왜?"
"도를 아십니까 인 줄 알고."
봄을 맞이하여 좀 걸어보겠다고 편안한 신발과 가벼운 숄더백을 장만한걸 가지고 놀려대는 남편이라니~--;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일뿐만 아니라, 산책의 계절인가 보다.
내가 참 좋아하는 김탁환 또한 고향인 진해를 걷고 책을 낸걸 보면 말이다.
혼자 걸은게 아니고 엄마와 함께 걷는데, 가끔 남동생이 식사자리에 합류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글로 옮겼다.
아니 책으로 나올걸 계획한게 먼저이겠다.
매일 하모니카를 부는 엄마가 하모니카를 밟고 다치셔서 한번,
그리고 김탁환이 중간에 세월호 관련 책들을 만드는라 또 한번,
엄마와의 산책은 연기되기도 하고 중단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용은 뜨문뜨문하거나 단절된 기색이 없는 것이,
한편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적당한 온기를 지닌 것이 따뜻했다.
책 겉표지 안쪽에 등장하는 지도는 동생의 찬조 작품이다.
엄마의 골목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 가족의 골목이라고 해야 할까, 가족의 거리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 자신의 일로는 입을 앙 다물고 눈물을 참지만, 책을 읽다가 우는 일은 흔하다.
보통은 책 내용과는 상관없는 상념이 몰려오고, 그런 상념들이 연결되어 눈물이 나올라치면 책을 빙자하여 울게 된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아름다워서 울때도 있다.
이 책의 경우, 처음엔 상념이 눈물을 불러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후자였다.
함께 골목들을 걸으며 엄마는 얘기를 하고 아들은 글을 쓴다.
그러니 글은 아들이 쓰지만 엄마의 인생을 대필하는 것이다.
이런 글들을 보면 가족의 인생을 대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가족의 인생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러웠고 약이 올랐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계획도를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어도, 매일매일을 그대로 지키긴 어렵다. 몇 번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후 친구들과 놀러 다니다가 들키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벾에 세웠다. 창원군에 살 땐 집 앞에 나무들이 무성한 언덕이 있었다. 어둠이 깔린 숲을 혼자 보고 있노라면, 무서웠다. 먼저 낯선 소리들이 밀려왔고 뒤이어 알아보기 힘든 형체들이 일렁거렸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아도 그 소리와 형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벌을 설 때도 있었는데, 동생은 15분도 넘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ㆍㆍㆍㆍㆍㆍ나는 견뎠다. 겨울에는 추위와도 싸워야 했지만, 엄마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진 않았다. 차라리 숲으로 들어가서, 그 숲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엄마 대신 문을 열고 나와선 나란히 섰다. 내 눈길을 따라 어둠을 쳐다보며, 아버지는 짧게 물었다. 그럴 땐 이상하게도 평안도 사투리가 슬쩍 얹혔다.
"뭐이가 있나?"
니는 피하지 않고 견디는 중이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단정한 문장이 떠오르진 않았다. 아버지가 내 야윈 어깨를 감싸며 덧붙였다.
"담부턴 그러지 말라우."(35~36쪽)
그래서 때로 글들은 필자의 인생만큼이 아니라 화자의 인생만큼의 통찰이 담겨 있다.
엄마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일을 만들어가는 대신, 말을 아끼고 일을 지우는 쪽을 택했다. 하모니타를 배우기 시작한 것 외에 일흔 살을 넘긴 후 엄마가 벌인 일은 없었다.(59쪽)
나도 무언가를 사고 들이고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버리고 나눠주고 일을 줄이고 잉여로워지는 쪽을 택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롭게 살고싶지만 현실적으론 힘들겠고, 가방 하나에 들어갈 정도였으면 좋겠다.
언제고, 어디고 상관없으니 가벼운 산책 하듯 그렇게 움직일 수 있게 말이다.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만 살았어요?"
"하고픈 이야길 다 하고 살아, 그럼?"
"그건 아니지만ㆍㆍㆍㆍㆍㆍ"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ㆍㆍㆍㆍㆍㆍ"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단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ㆍㆍㆍㆍㆍㆍ그렇게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 그럼 이야길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고."(156~157쪽)
나 또한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는게,
아니 어른신들이 하는 얘기를 듣는게, 직업이다 보니,
(엄밀하게 말하면 얘기의 행간을 파악하는 거지만~.)
어르신들을 좀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분들도 계시다니 놀랍다.
때론 어르신들의 얘기에 '네에~.', '그래서요~?' 따위의 추임새를 넣기만 할뿐,
제대로 된 문장을 발음해보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이야기를 품고 살고 싶지는 않다.
예전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상대방이 불편할 얘기는 하지 않고 말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상태에 집중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일단 하고 본다.
대신 감정적으로 앙금을 남기진 않는다.
사람에게 할 수 없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숲에라도 털어놓는다.
여기서 나는,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의 농담 아닌 진담을 슬쩍 끼워넣었다.
"정글에서 자연사는 잡아먹히는 겁니다. 엄마는 절대 자연사하실 일 없습니다."
"그게 그렇게 되니?"
"네, 그렇게 되니까, 살 만큼 살았으니 죽고 싶단 소린 하지 마세요."
"ㆍㆍㆍㆍㆍㆍ맘에 걸렸어?"
"살 만큼 살았단 엄마 이야길 듣고 맘 편한 아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170쪽)
사실 나이로 따진다면 나는 엄마보다는 아들에 가깝다.
두살 정도 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보다는 엄마 신자 여사가 한 말들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겠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를 만나고 인연을 만드는 것 또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이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아. 깃털처럼, 그래 깃털처럼. 만나긴 분명 만났는데, 만나고 나면 그의 표정도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떠오르질 않아. 만나 다행이지만 만나지 않았대도 불행하진 않다는 그런 느낌도 들고."
"곧 올게요, 정말."
"난 요즘 내가 꼭 낙엽이랑 비슷하단 생각을해. 특히 노란 은행잎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땐 참 고와서 눈을 뗄 수 없는데, 땅에 떨어진 노란 것들은 쳐다보기도 힘들어지더라고."(172쪽)
나이가 한살 더 먹을때마다 좀 더 홀가분해질 수 있기를,
그래서 산책하듯 가볍게 떠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그 산책은 걸어서 할 수도 있지만,
때론 이런 책 한권을 통해서 글 속을 누비듯 일 수도 있겠다.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