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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 예찬 -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남자의 기록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7년 5월
평점 :
사람들과 보대끼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생활하는 내게,
공방은 거창하고 추상적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꿈이라고 쓰고 숨을 쉬는 통로라고 읽는다.
공방을 꿈꾸긴 하지만,
공방과 관련된 무엇을 펼쳐놓을 여건은 안되어 주시고,
시간을 쪼개 할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이다.
리뷰는 글의 형태일때도 있고, 어쭙잖게 그림이나 수공예품 따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책 '공방예찬'을 읽기 시작하게 된게,
'공방'이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는지,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남자의 기록'이라는 부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다듬고 꿰매고 글을 쓰기도 하는 게 나랑 닮아서 인지, 잘 모르겠다.
책 날개 안쪽을 보게 되면 바늘에 실을 꿰는 섬세한 손이 나오는데, 한참을 쳐다봐 주시고, ㅋ~.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글을 쓰는 남자라니 '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진송의 '목수일기'를 떠올렸었는데 내가 너무 앞서간듯 여겨지기도 하지만서도~--;
사진 바로 그 밑에,
나무꾼도 갖바치도 아닌데 가구와 가방을 만든다. 아무것도 속일 수 없는 정직한 직업이다. 가장 원초적인 근육을 움직이면서 창조적 노동에 참여하는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정한 기쁨이다. 무엇보다 내 몸이 바뀌었다는 것, 내 노동과 능력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다. 가끔은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고, 주로는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친다.
라고 되어있는 프로필도 멋지다.
'작가의 말'을 보게 되면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때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상처를 주기도 했다. 좋은 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이 너무 힘들어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맸다. 무언가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러다 보면 진짜 좋은 날이 올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렇게 나는 어쩌면 내 삶의 가장 빛났을 수도, 가장 어두웠을 수도 있었을 10년을 견뎌냈다. 몸이 녹초가 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니. 공방은 내 오랜 견딤의 동반자였다.(9쪽)
이 구절을 읽는데 내가 엄청 좋아하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났다.
'지옥은 신의 부재'가 왜 생각났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를 놓고보면,
직장이란 것이 공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취미활동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밑천이 된다.
직장이 있기에 취미활동을 통하여 쉴 수도 있고, 위로받을 수도 있고, 재충전의 필요성도 느끼는 것이지,
공방활동만을 하거나 공방활동이 직업이 된다면 쉬거나 위로받는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부재가 곧 지옥이라는 명제만큼의 울림이었다.
암튼 그는 그런 글들을, 그리고 사진들을...블로그에 일상을 올리듯 덤덤히 늘어놓는다.
일기라고 하기엔 덜 사사롭고,
수필이라고 하기엔 주제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뿐 더러 지나치게 사변적이다.
글쓰기 방식도 문장 단위로가 아니라, 읽기 좋게 끊어놓는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간간이 메모해놓은 글들을 펼쳐놓는다.
글의 밑그림을 그린다.
쪽글과 쪽글을 실로 꿰듯이 연결한다.
불필요한 문장은 과감하게 깎아버린다.
깎고, 다듬고, 꿰매서 글을 완성한다.
가구와 가방을 만드는 일은 글쓰는 일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만들고 짓는 일은 얼추 비슷하게 진행된다.
ㆍㆍㆍㆍㆍㆍ
『혼불』의 작가 최명희였다.
평생 대하 장편소설 『혼불』에만 매달렸던 작가는
원고 쓰는 일을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일이자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
온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글을 파나가는 것이라 말했다.(36쪽)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선생님, 바느질은 에르메스급이야!
물론 그 칭찬 속에는 다른 과정도 꼼꼼히 하라는
속 깊은 충고가 담겨 있었을 게다.
조사 중에서 하필이면 '은'을 썼으니 말이다.
원장님의 농담 같은 칭찬을 듣고 난 후
나의 바느질은 춤을 췄다.(105쪽)
이런 글들을 보게 되면 작가가 섬세하고 결이 고운 사람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프로이트 박물관을 구경하는 내내 조금 음산하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통가죽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프로이트의 여행가방과 - 물론 왕진 가방일 수도 있겠으나 - 휴대용 술병 케이스를 보았다. 우울한 프로이트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쫌 놀 줄도 알았겠군, 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S.F.'라는 이니셜을 보고 픽 웃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 알겠다고요, 프로이트 선생님. 그런데 나는 자꾸 불경스럽게도 'Science Fiction('공상' 과학 소설)'이 떠올랐다.(108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참을 낄낄거렸는데,
'S.F.'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Science Fiction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로버트 실버버그의 두개골의 서'를 읽었던 나는,
역자 최내현처럼 social fantasy 라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걸 꾹 참게 된다.
그러고 보면 모든 Science Fiction은 어떤 의미로는 social fantasy 가 되는게 아닐까 싶다.
작가가 어떤 목공에품과 가죽 작품을 지향했는지는,
한스 베그네르를 인용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는 의자가 아니라 앉는 의자'를 추구했단다.
예술이 아니라 실용을 중시했다는 말일 테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의자는 에술 작품이 되었다.
한스 베그네르는 자신의 의자가 대량 생산될 수 있게 고안했다.
아무리 대량 생산될 수 있는 그의 의자라지만
서민들이 쉽게 넘보기는 어려운 의자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의자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그의 정신만은 값지다.
북유럽 스타일의 정신만은 고이 간직할 일이다.(215쪽)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고 모든게 완벽하지는 않다.
상처는 죽 떠먹은 자리처럼 흔적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처는 마음 깊은 곳에
겹겹의 나이테가 되어 또렷이 자리 잡는다.(111쪽)
이 문장은 그럴듯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상처가 났던 자리엔 옹이가 남는다.
나이테는 상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계절에 따라 세포분열의 속도가 달라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이 부분을 캡쳐한 이유는 '바느질의 정석'을 표현한 저부분이 맘에 들어서 이기도 하지만,
책의 제본상태가 불량하여 벌어지고 급기야 낱장으로 떨어진다.
책이 소모품이긴 하지만,
책을 소중히 다루는 내게 와서 이 정도이면 허술해도 한참 허술한 것이다.
220쪽 안데르센 마을을 보러 가잖다.
이 부분은 '가잔다'의 오타이다.
사진들은 그가 만든 목공예품이나 가죽 작품들을 많이 보여줬으면 싶은데, 작품 사진에 가깝다.
책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좋다고 설레발치는 것은,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남자 특유의 섬세함과 고운 성정이 글 곳곳에 묻어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손으로 매만지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지고,
우리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예감적으루다가 들기 때문이다, ㅋ~.
아내가 망가뜨린 물건을 차일피일 미루며 내버려두자
그녀는 공방까지 다니면서 뭘 이런 것도 고치지 못하냐며 투덜댄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쏟아낸다.
장인이 뭐 별거야.
물건만 잘 만들면 장인이야?
장인은 우리의 망가진 삶을
우리의 찢어진 마음을 꿰매고 수선하는 게 장인이야.
물건을 고치고 수선하는 것은
단순히 물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안야.
그건 그 물건을 사용하던 사람의
삶을 생명을 마음을 꿰매고 수선하는 거야.
알았어?
아내의 말을 찬찬히 들어보니,
다 옳다.
누구에겐가 자랑하려고 가구나 가방을 만들지는 않았다.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망가진 물건이 되살아나는 느낌도 좋았다.
저마다의 물건에는 저마다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ㆍㆍㆍㆍㆍㆍ
그래도 어쩌겠나.
아내는 나를 '자기만의 맥가이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얄밉지만,
그래도 가끔은 뿌듯하다.
나는 때로는 목수가 되고,
때로는 갖바치가 되고,
때로는 신기료장수가 되고,
때로는 무두장이가 되어,
누군가의 망가진 추억을
다독이고 매만지고 위로하고 싶은 게다.(258~259쪽)
무엇보다 저자는 이 모두를 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글로 치유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