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마가는 토라와, 바리새인들에 의해 드러난 구전 전승들과 혁신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P196

예수(마가)에게 있어서 기록된 토라는 신적인 것인 반면에, "장로들의 전통"은 인간의 창조물이다. - P196

이것은 단연코 율법의 폐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단지 율법을 제자리에 두는 것뿐이다. - P201

예수께서 말씀하신 설명은 토라의 규율들이 가진 깊은 의미를 해석한 것이지,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P201

예수께서 크게 기여하신 것은 율법을 이처럼 깊이 있게 해석한 것이지, 소위 말하는 율법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 P201

이는 토라를 버리라는 훈계가 아니라, 토라를 실천하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 진정으로 더 깊이 헌신하라는 부르심이다. - P201

예수의 유명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종교 세계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녹 문헌에도 다니엘서와 거의 똑같은 표현으로 두 신적 존재가 나타난다. 곧 늙은 존재와, 사람의 모습을 가진 이-즉 "사람의 아들" 같은 이, 혹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the Ancient One]과 대조되는 젊은 인물-가 언급된다. - P137

사람의 아들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제2성전기 말에 이르러, 널리 받아들여지는 유대인의 신앙 표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P140

「에녹의 비유」는 어떤 고립된 분파의 산물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유대인의 사고 체계와 저술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 P140

그리스도 교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측면들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한 존재로 결합〔combination〕된다는 점이다. - P144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개념조차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 P144

거의 동시대 문헌인 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녹의 비유」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지상에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현현) 개념, 그리고 사람이 신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지게 되었다는 (신격화) 개념 사이에 강한 연속성 혹은 종합이 발견된다. - P146

본래 메시아 개념은 오랫동안 갈망했던 왕조를 회복시킨 다윗 가문의 한 평범한 인간 왕에 초점을 두었던 반면에, 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은 이와 개별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 P149

이제 우리는 두 개의 평행하는 에녹 전승 곧 『에녹1서』 14장과, 다니엘서 7장에서 발전해 나온 전승들을 보게 된다. - P151

한쪽에는 승귀하여 신격화된 인간에 대한 전승이 있으며, 또 다른 한쪽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내려온, 제2위의 하나님 같은 구원자에 대한 전승이 있다. - P151

아직은 마가복음과 그 이후의 복음서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인간화된 신〔anthropized divinity〕과 신격화된 인간〔divinized human〕의 통합 혹은 동일화까지는 발견하기 힘들다. - P152

이것이 한데 모이는 곳이 바로 「에녹의 비유」 70-71장이며, 이는 아주 오래된 전승의 독립적인 줄기로 봐야 한다. - P152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념들, 본래 개별적이었던 두 개념이 합쳐진다. - P152

두 전승이 「에녹의 비유」에서 합쳐진다. 선재한 제2위의 하나님, 다니엘서의 구원자는 이제 그 사람의 아들처럼 묘사될 뿐 아니라, 그렇게 불리기까지 한다. - P154

그리고 노아 홍수 전 고양된 일곱 번째 현인〔sage〕 에녹은 하늘로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 P155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며, 〔세상에〕 있지 않다. 이 한 땀 한 땀이 때를 맞춰 꿰어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문헌이, 에녹은 처음부터 메시아였고 처음에는 감춰졌던 그 사람의 아들이었으며 이후 인간의 형태로 지상에 보내졌다가 다시 그가 전에 머물던 곳으로 승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 P155

분명히 에녹 버전에서 강조점은 신격화에 있고 복음서에서 강조점은 신의 현현에 있는데, 이는 이후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P156

하지만 내 생각엔 ‘유대적인 그 사람의 아들‘ 전승의 두 버전 모두에, 두 요소 모두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P156

1세기와 2세기 초반-심지어 그 이후까지- 예수 운동이 보였던 개념들과 관습들 9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당시 유대교의〔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과 관습들의 일부로 무리없이 이해될 수 있다. - P171

삼위일체와 성육신이란 개념 혹은 이 개념들의 기원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직접 무대에 등장하시기 전부터-말하자면 예수께서 메시아적 소명을 시작하셔서 그러한 신학 개념들을 드러내 보이시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존재했었다. - P171

예수께서는 토라의 관습들과 율법들을 버리신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바리새파로부터 오는 토라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여 그것을 확고하게 지켜내셨다. - P173

예수의 유대신앙〔Judaism〕은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파에서 나온 율법에 대한 일부 급진적인 변화들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반응을 보였다. - P174

기독교가 유대교 안에 있는 한 유형〔variation〕이라는 견해, 심지어 예수께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전통주의자이셨다고 말하는 견해는, 2세기, 3세기, 4세기 소위 유대 기독교〔Jewish Christianity〕와 그 초기 라이벌이었던 이방 기독교〔Gentile Christianity〕- 몇 세기 후 결국 승리를 거두는-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안이다. - P175

탈무드에 따르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이는 부정하거나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을 도입한 것은 바로 랍비들(혹은 유명한 바리새인들)이었다. - P193

따라서 예수께서 꾸짖으신 것은 코셔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억지로 떠맡기려 했던 혁신〔변화〕들이었다. - P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의 아들"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 P75

"사람의 아들"이 마가복음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의 세계 안에서 알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칭호일 때에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P75

이 칭호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모든 용례는 다니엘서 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7장을 암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 P75

만일 예수께서 ("역사적" 예수이든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이든)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생각하셨다면,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아들이시지, 어느 한 순간에만 사람의 아들이실 수는 없다. - P77

곧 사람의 아들이란 내러티브 전체를 가리키고 또 그 속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용어라 할 수 있다. - P77

다니엘서 저자가 다니엘이 환상을 가지고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한 분 그 이상의 하나님에 대한 고대의 증거들을 감추기 원했다는 것이다. - P84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신학적인 논쟁은, 사실상 이미 예수께서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유대교 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 P84

메시아-그리스도는 아기 예수가 나사렛에서 나기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의 사상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P85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2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안에 가장 오래된 신학 개념들 중 하나이다. - P85

내 견해로는 제2위의 구원자 하나님 개념은 이스라엘 종교의 초기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 P88

메시아 개념이 우리가 다니엘 7장에서 발견한 더 젊은 신적 존재와 결합되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 또한 그에게 붙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 P88

한 보좌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보좌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 존재가 차지하고 있다. - P88

더 늙은 존재는 영원무궁히 땅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세를 더 젊은 자에게 주며 홀을 건넨다. - P88

이때 다윗 계열 이스라엘의 왕 역할을 하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오래된 용례를 차용하고, 그것을 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과 사람의 아들과의 동등한 신성 표지로 받아들이는 일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P88

이렇게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 이는 모두 유대 전통과의 어떠한 단절도 없이 이뤄진 일이다. - P88

다니엘 7장으로 인해 우리는 두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천상의 구원자를 가리키는 용어, "사람의 아들"의 궁극적인 원천이란 유산이고, 또 하나는 제2성전기에 깊이 파고든 고대 이스라엘의 이위일체 신학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란 유산이다. - P98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믿게 된 이유는 그들이 이미 이전부터 메시아/그리스도는 신-인[god-man]일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유대 전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 P104

그 사람의 아들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분명히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세를 가지고 있다. - P106

이러한 주장은 다니엘 7:14에서 나온 것인데, 거기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권세[authority]-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권세이다-와 영광과 왕위"가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 P106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께서 신의 특권으로 보이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세’)를 주장하실 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의 "엑수시아"(ἐξουσία" ‘권세’)이다. 이는 곧 다니엘 7장을 상세히 읽은 것에 근거를 둔 성경적인 권세이다. - P108

내가 주장하는 바는 치료를 위한 안식일 위반은 허용(지금은 받아들여진 관습)하는 쪽의 논의 위에 여러 주장들이 덧씌워지고, 또 다윗의 행동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시되는 더 묵시적인 시각으로 인해 급진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 P123

성경의 다양한 전례들과 논증들을 통해 안식일에 치료가 허용된다는 논쟁적인 개념을, 예수께서는 더 확장시켜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신다. - P124

그것은 곧 안식일에 생명이 위험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을 토라가 허용할 뿐만 아니라, 메시아 곧 그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 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얼마나 더 확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 P124

오히려 메시아를 예표하는 다윗은 율법의 일부를 제쳐놓을 수 있는 권한을 누렸고 새로운 다윗이자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기꺼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P125

이것은 율법이나 혹은 바리새파의 율법주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새로운 주 곧 그 사람의 아들이 율법 위에 세워져 역사상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묵시적인 선언이다. - P125

현대 정치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통치자는, 필요하다고 사료될 때, 혹 적합하다고 판단될 때 법에 예외를 둘 수 있는 자이다. - P129

그 사람의 아들이 통치권을 받은 것도 정확히 그러한 판단을 위해서이다. - P130

그 통치권은, 다른 안식일 준수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위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허용을 더욱 더 확장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 P130

메시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제한되었던 허용 범위를]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하셨다. - P130

나는 권세를 부여 받은 이 신적 존재가 다니엘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이 구원자 왕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 P130

따라서 그는 다윗 계열 메시아와 동일화되기에 적합하다. 그 존재가 복음서 안에서뿐 아니라 동시대 비-기독교 유대문헌, 이를테면 『에녹서』, 『에스라4서』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 P130

복음서 안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의 용례는, "사람의 아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고대 유대문헌들에서 나타나는 용례와 연결되어 있다(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제2위 신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 P130

널리 알려진 유대교의 모습-보편적이라거나 경쟁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은 이미 예수 이전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께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오셨는데, 그것은 곧 두 번째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 성육신한 것이다. - P30

당시에 문제는 ‘신적 메시아가 오는 것인가?’가 아니라, 단지 ‘나사렛에서 온 이 목수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그분[the one]이 맞는가?’였다. - P30

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신적 메시아- 역시 유대인임을 보게 되길 바란다. - P35

기독론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개념들 또한 유대적인 이야기이며 -훨씬 이후까지도- 이는 결코 반-유대적인[anti-Jewish] 이야기가 아니다. - P35

예수 시대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아가 신[적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형태로 이 땅에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 P35

따라서 [유대인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하는 생각들로부터 삼위일체와 성육신 개념 모두가 -예수가 태어난 바로 그 세계 안에서, 또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된 세계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 P35

적어도 법률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4세기에 완전히 구별된 종교가 된다. - P46

그 이전에는 누구도 (물론 하나님은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유대인인지 아닌지, 혹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말할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 P46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둘 모두를 택했다. 예수 시대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모두-심지어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사람들조차-유대인이었다! - P46

가족 유사성이라는 모델은 초기 기독교까지 포함하는 유대교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인다. - P56

이처럼 ‘유대교’에 대한 확장된 이해 방식은 그 이해의 범위 안에 가장 초기의 복음서 문학도 온전히 포함시키는데, 이는 곧 가장 초기의 -또 어떤 면에선- 가장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텍스트를 유대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P56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 곧 다윗의 왕위에 앉은 현세의 왕을 가리키고, "사람의 아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아닌 천상의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 P62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메시아 왕으로서의 지위를 가리킨다. - P62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미래의 신적 왕 역시 그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특별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암시되지 않는다. - P64

히브리성경에 나타난 마쉬아흐라는 용어는 더도 덜도 아닌, 그저 역사적으로 실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인간 왕을 의미한다. - P64

히브리 성경을 통틀어, 백성들이 구했던 것은 여전히, 현세의 실제적인 왕이었다. - P68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처럼, 다윗의 가문을 회복시켜줄 현세의 왕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 P68

그럼에도 부재한 왕의 자리를 위한 기도,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새로운 왕을 위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보내실 새로운 다윗 왕, 약속된 구원자 개념이 심겨져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제2성전기에 성취되었다. - P68

마가복음 1:1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다윗 가문의 왕을 가리키는 옛 칭호로서, 인간 메시아를 의미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의미한다. - P68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기대되었던 구원자가 이중적인 신이자 신-인 연합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P72

따라서 예수 이전의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오래된 개념들과, 예수께서 자신에 대하여 주장하셨던 개념들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P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음의 확신 세계기독교고전 40
헤르만 바빙크 지음, 임경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갈수록 더욱 불확실하다.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변화도.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해 요동치고 있다.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불확실성이 가중된다. 이는 우리의 종교, 세계관이나 학문에도 동일하다. 급변하는 세상 가운데 적실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 종교나 철학, 학문은 우리의 삶에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년)의 『믿음의 확신』이 출간되었다. 바빙크는 네덜란드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로  방대한『개혁교의학』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줄곧 자신의 학문보다는 오직 신앙이 자신을 구원함을 강조했었다. 그렇기에 『믿음의 확신』은 그러한 그의 신앙 고백의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일 것이다. 1901년에 저술한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해설과 작가의 생애, 해제 등을 제하면 130여 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 


1장에서 바빙크는 객관성과 보편성이 사라지고 주체성이 강조된 시대의 변화로 인해 확신 또한 상실되었음을 짧게 언급한다. 2장에서는 '확신'의 개념을 정리한다. '믿음의 확신'은 학문적이고 신학적이지만 실천적이고 신앙적으로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구원의 확신은 이 땅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 즉 상속받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근원적인 질문들(우리의 기원, 본질, 종착지 등)에 답을 줄 수 없다. 반대로 신학은 영혼의 문제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확신의 토대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이다. 즉 계시다. 과학이나 철학은 변한다. 과학의 방식은 가장 깊은 확신을 주지 못한다. 비록 과학적 합리성이 보편적 토대를 줄 수 있겠지만, 각 개인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믿음의 확신이 더욱 중요하다. 믿음의 확신은 우리의 실존에 깊게 뿌리내린다. 참된 믿음의 확신 가운데 우리는 자유와 안식을 누린다.


3장 '확신에 대한 탐구'에서는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의 확신의 문제를 짧게 다룬다. 다음으로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에서의 확신을 다룬다. 이후에 경건주의의 반발로서 생겼던 운동에서의 확신 또한 다룬다. 저자는 종교개혁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운동들이 오히려 더욱 큰 불확신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들은 기독교적 비전을 협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능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1,2,3장을 읽으면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신에 이를 수 있는가?" 저자는 마치 우리가 그동안 기울였던 모든 신앙적 노력들과 믿음의 확신은 관계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반대했던 많은 전통들 중에 우리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자연스럽게 이 책의 핵심인 4장으로 독자를 이끈다.


4장에서 저자는 다시금 과학과 종교의 차이를 말하며 시작한다. 즉 인간적 확신보다 신적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계시는 종교의 전제며 토대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만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성경의 계시는 생명이다(93)." 저자는 믿음의 확신에 강력한 토대로 계시를 온전함을 강조한다. 결국 믿음의 확신에 근거는 우리의 경험이나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온전한 계시라는 것이다. 믿음의 확신은 우리의 신앙의 종착지가 아니다. 믿음의 확신은 우리 신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소망의 토대 위에, 은혜의 약속 위에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성이 사라진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는 불안과 염려, 두려움으로 살아간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성서학자 피터 엔즈(Peter Enns)는 『확신의 죄』(비아토르, 2018)에서 '확신' 자체를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는 '믿음의 내용'보다 '믿음의 대상'에 집중하기를 강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통찰과 함께 바빙크의 이 책을 충분히 숙고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영혼에 큰 버팀목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이러한 상황은 점차 변화되었다. 행위 주체(subject)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권리들, 또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고 여긴 권리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과거에 묶어두는 모든 속박들을 서서히 깨뜨렸다. 행위 주체들은 과거에신성하다고 여겨진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그야말로 무제한적으로 해방시켰다 - P14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 양심의 고발들과 죄의 무게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 모든 점에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다. 우리는 흔히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이다. - P23

우리에게 존재하는 각각의 기능은 자신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것 속에서 쉼(안식)을 얻는다. 의지는 오직 선에서만 완벽한 쉼을 얻고, 우리의 감각은 아름다운 것들에서 완벽한 쉼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지성은 오직 참된 것,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진리이신 하나님에게서만 쉼을 얻는다 - P32

과학적 확신은 합리성에 의거하기 때문에 믿음의 확신보다 더 보편적인 토대를 지니지만, 개인에게 미치는 힘, 즉 영혼이 믿음 안에서 자신의 대상을 받아들여서 서로 결합되는 힘에 있어서는 후자(믿음의 확신)가 전자(과학적 확신)보다 월등하게 앞선다 - P4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 밖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노예상태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세계는 두려움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신뢰와 안식의 목소리도 낸다 - P51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조차도 언제나 믿음의 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믿음 대신에 의심을, 변함없는 신뢰 대신에 염려를, 열심과 찬송 대신에 불평을 발견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 P55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예수의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이고, 영원토록 그럴 것임을 단호하게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순전히 은혜로써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의와 구원을 수여받았다는 것을 어린아이처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살아간다.
이 신앙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한 음성을 듣는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지닌 자유 안에 서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의 영과 더불어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한다. 그는 그것을 믿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독립성을 얻었다. 그의 삶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만 묶여 있다. 여기에서 믿음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발견한다 - P62

믿음은 처음에는 역사적 지식이고, 나중에 신뢰나 사랑에 의해 보완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처음부터 종교적인 상태, 실천적인 지식, 내 자신에게 적용되는 지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들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P114

믿음은 위로부터 우리 자신의 본성에 덧씌워진 선물이어서 언제나 우리의 본성에 이질적인 것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것이고, 평범한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이다 - P117

모든 참된 경험과 모든 미덕의 행위들은 믿음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들이다. 복음의 약속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야 우리의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된다. - P125

구원의 여정은 믿음의 확신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거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들 위에 서 있다. 그의 소망의 토대들은 자기 밖에 있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확실하고 확고하다 - P129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쉐프 2020-05-25 0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형님! 짱이에요! ^^ 항상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