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9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철학이 말하는 신은 역사 안으로 침투하여 들어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한 철학의 신은 자신을 나Ich로서 지칭하시며, 그리고 이런 나로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너Du로서 존재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사유를 통해 형성된 신은 인간의 사유를 통해 도출된 하나의 사유대상일 뿐이지요.

이는 지식을 위한 운동이며,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운동과 자발성이 여기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고안해낸 정신의 일부이지, 결코 하나님의 일부에 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닌 사유능력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하나님은 전혀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이 지닌 사유의 능력 밖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과 운동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사유 능력의 범위를 깨뜨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상이 만들어낸 신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고안된 신일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결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정하여야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다스리는 하나님이며,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영광이 돌아가도록 두지 않으시며, 오직 당신 한 분만이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성서의 주요 동기Haupmotiv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Herrschaft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가속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역사의 걸음은 느리기 이를 데 없다.

많은 이들이 현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인간의 소명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따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다. 심고 물 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건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대체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세상에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용 전달, 즉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이면서도 황홀하게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문장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로의 힘은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느끼는 안도감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아무 조건 없이 걱정해주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위로의 본질은 누군가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면의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임을.

책을 읽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은 스스로 한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최고의 창조성을 오직 문장의 힘만으로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코트 부인은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을 한국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유일신론으로 보았다.

한국인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결코 일본의 물질주의나 다신교인 신도(神道)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의 역사와 언어와 영성에 밀착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물질주의에 맞선 한국의 민족주의와 영성주의에 연결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9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