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문학은 현실 속에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어 독자 혹은 청중을 일깨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단일한 결정이나 믿음 또는 규칙이라기보다 인생의 변곡점이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찾아야 할 ‘길‘ 혹은 ‘방향‘에 가깝다.

지혜는 겸손하고 신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삶의 방식이다.

성경은 고통과 축복에 관해 단일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적인 신정론은 하나가 아닌 다수가 존재하는 셈인데, 성경을 저술하고 편찬한 이들은 이러한 긴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듯하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거창한 말들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갖다 대기 전에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맥락에서?" "왜?"를 물어야 한다.

지혜의 쓸모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 말하느냐가 중요하며, 무엇이 사실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 그것이 사실이 되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성경의 지혜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다변적인 지혜의 속성을 부인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동일한 처방만을 내리는 인생 지침서 같은 성경은 복잡다단한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반듯하게 정리된 정답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랜 세월 다양한 상황을 거치며 검증된, 영감이 깃든 다양한 문서의 모음집을 주셨다.

오늘날 독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쉽게 간과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성경의 시대적 배경에는 언제나 엄청난 부와 군사력을 자랑하는 제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성경은 제국의 압제 아래 살던, 신앙적인 한 소수 민족에 의해 쓰여졌다.

구약 성경의 배경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이고,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려한 로마 제국이 그 배경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수 세기에 걸쳐 자신들과 점렴 당한 다른 민족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이 제국들을 바빌론으로 통칭해 불렀다.

우리에게 성경을 선사해 준 이스라엘 민족이 직면했던 중대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지 못하게 가로막고, 안으로는 우리를 회유하여 제국을 모방하고 제국에 동화되라고 하는 바빌론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들은 이야기와 시, 예언과 경고가 담긴 책들을 저술했다.

예언자의 비판의 칼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를 겨눈다.

제국의 폭정은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이스라엘이 사회적으로 탐욕과 성적 착취에 빠져 있거나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경시할 때 예언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동화는 허구보다 실제에 훨씬 가깝다. 무서운 용이 존재한다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우리가 용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예언자들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용과 짐승이 어슬렁거린다.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승리는 결국 저항하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둠은 밝아 오는 빛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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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영원히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그가 영원히 신체가 없이 편재하는 우주의 창조자이자 보존자이고, 전선하며, 도덕적 의무의 기원이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론은 신이라는 존재가 단지 이러한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자유로운 속성들을 영원히 가지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유신론은 신이 이러한 속성들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바, 이를 신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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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이 선명한 정의의 끈을 붙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핍박당하는 사람을 놓아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그들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유구한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새삼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탄생시킨 특수한 상황과 초기 독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오래된 성경 이야기를 현대의 문맥에 맞게 다시 해석하는 시도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오래되고 중요한 전통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는가(히브리서 4:12). 곧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서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 말씀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조율해가며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위로하고 도전하고 깨우쳤다.

결론적으로, 성경 이야기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석될 필요가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이 목사님의 설교와 교회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그저 도덕적인 관점으로만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고 격려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기득권자들에게는 도전이 되었다.

유월절 만찬상에 오른 음식과 흑인 영가의 가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진리를 말할 것이며, 모두의 해방을 추구할 때 그저 그런 이야기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히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어떤 기간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랜 고난과 기다림과 방랑의 시간을 상징한다.

무언가 시작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최소한의 기간. 이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광야를 헤맨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광야를.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성경 속 이야기에서도 그리고 실제 우리의 삶에서도, 구원의 길은 언제나 우회한다.

광야를 지나지 않고 약속의 땅에 다다른 하나님의 백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해방, 광야의 시간, 황소와 효모와 피에 관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노예주뿐 아니라 노예에게도 자유를 선사하는 계명이다. 사랑은 구원 이야기의 최종편이다.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저자가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바라보고 있다면, 역대기의 저자는 역사의 치유와 민족의 단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정 시대를 향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두 가지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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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이야기기 우리의 문화와 삶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경 속 기원 이야기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진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자신의 신전으로 만드신 창세기 1장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넘어 우리의 가슴에도 다가온다.

돌로 지어진 건물 없이도 하나님은 통치하신다.

그분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가난한 자의 마음 속에 거하신다.

정체성이 무너지고, 의지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라가 분열되고, 성전이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하신다는 진리를 변함이 없다. 이 이야기는 2천 년 전만큼이나 지금도 사실이다.

창세기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 폐허에서 건져 낸 고고학적 성과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이 모든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완고한 근본주의자나 공격적인 무신론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기원 이야기에 신화나 과장의 흔적 또는 문화적 영향이 보일 때 결코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문학 양식을 크게 오해한 결과다.

성경의 기원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오래된 대가족, 창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가족에 속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독자의 기준에 맞지 않을 때 문서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버리고 성경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즐기는 태도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생기는 긴장과 질문을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주고받는 대화로의 초대라고 생각한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이 위대한 대화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을 해석하는 미드라시는 성경 해석이 꼭 제로섬 게임과 같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좋은 이야기가 그렇듯 성경도 무궁무진한 통찰을 제공하며 새로운 도전을 불러온다.

관계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성경을 주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곧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회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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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학자와 시인들, 성경을 바라보는 여러 전통과 관습을 통해 나의 성경은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유대인의 성경 해석법은 내게 성경 속 수수께끼와 모순에 맞서 싸우지 말고 대범하게 품으라고, 성경은 본질적으로 읽는 이가 씨름하며 의심하고 상상하며 토론하게 만드는 책임을 가르쳐 주었다.

성경은 다양한 이야기의 모음집이기에 각각의 이야기는 그 쓰인 의도를 파악할 때 거기서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예술가라면 마법보다 영감을 선호한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영감은 행운아나 인기 많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영감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와 창조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작은 창조자가 동역하는 과정이며,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협업이다.

기원 이야기는 흑백 사진보다는 천연색 사진에 가깝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실과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향수와 경각심을 일으키는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 이야기 중 어떤 것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가려져 있다가 특정한 시점에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오해하는 바와 달리, 이스라엘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는 우주의 탄생이나 인류의 진화 같은 21세기 과학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본성이나 하나님과 창조물의 관계처럼 당시 사람들이 초미의 관심을 두었던 문제에 답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인류의 기원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착과 불순종, 추방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패턴을 원시적 배경으로 그려 낸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빌려 왔는지 밝히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한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들과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며 유사한 문학 장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관계처럼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그것은 고결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정겨운 대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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