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고전 -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하여 상냥한 지성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외 지음, 정지인 옮김 / 유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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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희소식. 스스로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과정으로 독학을 해야 하는지, 배움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지 등. 공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한정식 느낌. 배고픈 자 와서 먹으라! 목마른 자 와서 마시라!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공부에 관한 고전들을 추렸다. 저자들의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상당한데, 그 내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과거의 글이 현재에 유의미할까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시대를 꿰뚫고 현재 우리에게 답하고 질문한다. 무엇 때문에 배우는가? 그 배움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가?라고.


한 명의 저자가 목적과 개요를 가지고 쓴 책. 어떠한 흐름을 가진 책을 선호한다. 저자가 여러 명이거나 더군다나 살아온 시대까지 다른 저자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라면. 그러한 책을 읽고 실패한 경험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매우 세심하게 편집했다. 물론 짧은 글 하나에 담긴 깊이도 남다르지만. 


즉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공부에 대한 여러 저자의 글을 수집하고 편집한 책이니만큼 출판사와 편집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만 매우 탁월하다. 세심하고 꼼꼼하다. 예를 들어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칼럼 첫 문장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그 인용문이 포함된 베이컨의「공부와 독서」가 존슨의 글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다. 즉 독자들은 베이컨의 글을 읽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바로 존슨의 글을 대할 수 있다. 


그 외에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다. 각각의 글 앞에 저자에 대한 소개와 그 글의 간략한 내용, 어떤 맥락 가운데 쓰였는지 등. 좋은 글을 이리저리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느낌. 그래서 저자들의 통찰력과 안목에 놀라고, 독자를 배려한 역자와 출판사, 편집자의 세심함에 가슴 따뜻해지는 책이다.

누구에게나 지식을 키워 가는 수단으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곧 읽기와 명상이다. 물론 교육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읽기이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그 규칙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읽기에 관해서이다. 읽기를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무엇을 처음에 읽고 무엇을 나중에 읽을지 알아야 하며, 셋째,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P19

모든 학문에서 그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학문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인정된 것이다. 나중에 그대가 그 학문들을 다 공부하고 또 논쟁과 비교를 통해 각 학문 고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 연후에야, 각각의 원리를 다른 나머지 원리에 적용해 보거나 각 학문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깊이 탐구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심이 되는 큰길을 알기도 전에 여러 샛길로 들어가지 말라.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때라야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다 - P28

미처 지혜로워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지혜로워 보이고 싶은 욕망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자신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자신의 본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즉 지혜로운 정도가 아니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만큼 더 지혜에서 멀어진다 - P38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꼼꼼한 탐구는 진지한 숙고를 뜻한다. 공들이는 노력과 사랑은 그대가 과제를 끝까지 해내게 만들고, 염려와 경계는 그대를 신중하게 만든다. 그대는 공들이는 노력으로써 공부를 지속하고, 사랑으로써 공부를 완벽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 또한 염려로써 미리 조심하고, 기민한 경계로써 면밀히 주의를 기울인다 - P49

나는 그가 그 지혜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기억하고, 일단 지혜를 받았으면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지혜를 마치 빌린 물건인 것처럼 오직 신의 것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알았다면, 자기만족이라는 위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려 눈을 내리깔지도 말아야 하며, 오직 자신의 훌륭함만으로 업적을 이룬 듯 자화자찬해서도 안 된다. - P115

군주를 칭송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도 찬사는 다소 인색하게 해야 하고, 마치 그들의 삶이 이미 끝난 것처럼 찬가를 불러 주기보다는 행동에 자극을 주는 훈계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라면 악덕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비판해야 하는데 단, 적개심이나 분노를 초래하지는 않을 정도로만 해야 한다. 만약 그대의 말이 증오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그런 소용없는 일은 삼가는 편이 낫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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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지식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정말 제대로 된 것이기만 한다면 지식 자체가 그 지식의 보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정신이 지닌 특질이지요. - P212

지식이 선善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모호하거나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처럼 엄밀하고 탁월하여 더욱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 P226

그러므로 나는 지식이 철학적일 때, 그리고 철학적인 한에서만 자유롭고, 모든 외부와 이면의 대상과 분리된 그 자체로 충분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P226

나는 다만 지식이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에 비례하여 점점 더 지식 자체에서는 멀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P228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사용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고, 우리의 본성을 원래대로 되돌림으로써가 아니라, 본성 이상의 것을 본성에 추가함으로써, 그리고 본성을 그 자신의 목적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본성을 완성합니다. - P247

내가 앞에서 언급한 각종 심란한 징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 결함은, 우리가 학생에게 ‘과목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대체로 성공하지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전반적으로 통탄스러울 정도로 실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은 온갖걸 다 배우지만, 배움의 기술만은 배우지 못하지요.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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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
다니엘 보야린 지음, 이학영 옮김 / 감은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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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는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에 이견이 거의 없지만,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당대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명확한 분별이 가능했을까?


분별이 가능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유대교라는 배경으로 초기 기독교를 분석하고,

복음서와 서신서의 배경과 문맥을 이해하는 작업을 

계속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책.

예수께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오셨는데, 그것은 곧 두 번째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 성육신한 것이다. 당시에 문제는 ‘신적 메시아가 오는 것인가?’가 아니라, 단지 ‘나사렛에서 온 이 목수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그분[the one]이 맞는가?’였다 - P30

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신적 메시아- 역시 유대인임을 보게 되길 바란다. 기독록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개념들 또한 유대적인 이야기이며 -훨씬 이후까지도- 이는 결코 반-유대적인[anti-Jewish]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시대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아가 신[적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형태로 이 땅에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하는 생각들로부터 삼위일체와 성육신 개념 모두가 -예수가 태어난 바로 그 세계 안에서, 또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에 관해 처음으로 기록된 세계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 P35

적어도 법률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4세기에 완전히 구별된 종교가 된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물론 하나님은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유대인인지 아닌지, 혹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말할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둘 모두를 택했다. 예수 시대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모두-심지어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사람들조차-유대인이었다!" - P46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왕, 곧 다윗의 왕위에 앉은 현세의 왕을 가리키고, "사람의 아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아닌 천상의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메시아 왕으로서의 지위를 가리킨다."
- P62

히브리 성경을 통틀어, 백성들이 구했던 것은 여전히, 현세의 실제적인 왕이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처럼, 다윗의 가문을 회복시켜줄 현세의 왕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그럼에도 부재한 왕의 자리를 위한 기도,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새로운 왕을 위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보내실 새로운 다윗 왕, 약속된 구원자 개념이 심겨져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제2성전기에 성취되었다.
마가복음 1:1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다윗 가문의 왕을 가리키는 옛 칭호로서, 인간 메시아를 의미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의미한다 - P68

"사람의 아들"이 한 개인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었을 때에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마가복음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의 세계 안에서 알려지고 받아들여지는 칭호일 때에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칭호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모든 용례는 다니엘서 안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7장을 암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 P75

내 견해로는 제2위의 구원자 하나님 개념은 이스라엘 종교의 초기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메시아 개념이 우리가 다니엘 7장에서 발견한 더 젊은 신적 존재와 결합되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 또한 그에게 붙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한 보좌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이 차지하고 있고, 또 다른 보좌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 존재가 차지하고 있다. 더 늙은 존재는 영원무궁히 땅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세를 더 젊은 자에게 주며 홀을 건넨다. 이때 다윗 계열 이스라엘의 왕 역할을 하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오래된 용례를 차용하고, 그것을 더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과 사람의 아들과의 동등한 신성 표지로 받아들이는 일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의 신적 본성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 - P88

내가 주장하는 바는 치료를 위한 안식일 위반은 허용(지금은 받아들여진 관습)하는 쪽의 논의 위에 여러 주장들이 덧씌워지고, 또 다윗의 행동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시되는 더 묵시적인 시각으로 인해 급진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 P123

현대 정치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통치자는, 필요하다고 사료될 때, 혹 적합하다고 판단될 때 법에 예외를 둘 수 있는 자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 통치권을 받은 것도 정확히 그러한 판단을 위해서이다. 그 통치권은, 다른 안식일 준수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위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허용을 더욱 더 확장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메시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제한되었던 허용 범위를]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하셨다. - P129

나는 권세를 부여 받은 이 신적 존재가 다니엘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이 구원자 왕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 계열 메시아와 동일화되기에 적합하다. 그 존재가 복음서 안에서뿐 아니라 동시대 비-기독교 유대문헌, 이를테면 『에녹서』, 『에스라4서』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서 안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아들"의 용례는, "사람의 아들"이 그와 같은 식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고대 유대문헌들에서 나타나는 용례와 연결되어 있다(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제2위 신 개념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유대교의 모습-보편적이라거나 경쟁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은 이미 예수 이전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 P130

이제 우리는 두 개의 평행하는 에녹 전승 곧 『에녹1서』 14장과, 다니엘서 7장에서 발전해 나온 전승들을 보게 된다. 한쪽에는 승귀하여 신격화된 인간에 대한 전승이 있으며, 또 다른 한쪽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내려온, 제2위의 하나님 같은 구원자에 대한 전승이 있다. 아직은 마가복음과 그 이후의 복음서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인간화된 신〔anthropized divinity〕과 신격화된 인간〔divinized human〕의 통합 혹은 동일화까지는 발견하기 힘들다.
이것이 한데 모이는 곳이 바로 「에녹의 비유」 70-71장이며, 이는 아주 오래된 전승의 독립적인 줄기로 봐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념들, 본래 개별적이었던 두 개념이 합쳐진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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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 특정한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 P111

어떤 것은 현재 유용하게 쓸 내용이어서 다시 찾아볼 수 있고, 어떤 것은 현재의 노고를 덜어 줄 수 있어서 찾아볼 수도 있다. - P112

진심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뭔가를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서든 그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P112

진심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뭔가를 가르쳐 줄 수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서든 그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P113

나는 그가 그 지혜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기억하고, 일단 지혜를 받았으면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지혜를 마치 빌린 물건인 것처럼 오직 신의 것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 P115

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알았다면, 자기만족이라는 위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려 눈을 내리깔지도 말아야 하며, 오직 자신의 훌륭함만으로 업적을 이룬 듯 자화자찬해서도 안 된다. - P115

깊은 학식에는 타고난 역량, 판단력, 기억, 적용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 P116

이 중 앞의 세 가지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 보라. 신이 아니라면 과연 배움이 어디서 온단 말인가? - P116

그러니 학식 있는 사람을 칭송한다면 마지막 요소인 적용에 대해서만 해야 할 것이다. - P116

이 요소는 넷 중 가장 낮고 가장 미미한 것이며, 그조차 무겁거나 둔하지 않고 건강한 신체를 지녔다는 사실에서 대단히 큰 덕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신체 상태 역시 신의 선물이 아니던가? - P116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을 향한 찬사가 들려오더라도 스스로 거룩하고 신성한 지혜를 성찰하는 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잡을 것이다. - P116

사람들이 지혜의 작은 한 방울만 보고도 그렇게 크게 감동한다면, 모든 지혜의 물결이 흘러나오는 영원한 샘 전체를 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아야 한다. - P117

그러니 우리는 공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성인이 그렇게 했듯이 기도부터 하고 공부를 시작하자. - P118

우리의 공부가 건전한 것이기를, 누구에게도 어떤 해도 입히지 않는 것이기를,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 전체의 건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 P118

우리가 살면서 하는 행위들 각각의 목적을 정해 두어야 한다면, 공부에 관해서는 특히 더 목적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노고를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할지 정할 수 있다. - P119

지식과 배움의 영광을 훼손하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모든 것 가운데, 누구에게나 그러지만 특히 군주에게 끊임없이 아첨하고, 오래 알았던 사람보다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더욱 들러붙는 피상적 지식인의 경박만 한 것이 없다. - P122

군주를 칭송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도 찬사는 다소 인색하게 해야 하고, 마치 그들의 삶이 이미 끝난 것처럼 찬가를 불러 주기보다는 행동에 자극을 주는 훈계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 P124

만약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라면 악덕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비판해야 하는데 단, 적개심이나 분노를 초래하지는 않을 정도로만 해야 한다. - P124

만약 그대의 말이 증오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그런 소용없는 일은 삼가는 편이 낫다. - P124

신께서 위대한 선물들을 나누어 주셨으니 그 선물을 받은 이들은 누구나 공동체 전체를 위해 쓰임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P130

신은 우리가 조건 없이 받은 것을 조건 없이 나눠 주기를 바란다. - P130

공부와 독서는 사유의 기쁨을 안겨 주고, 유창한 언변의 도구와 일을 더 잘 처리하게 도와주는 밑바탕을 마련해 준다. - P137

공부와 독서가 기쁨을 준다는 것은 무엇보다 홀로 물러나 있는 한가로운 시간에 가장 잘 느낄 수 있으며, 언변의 도구로 쓰이는 때는 친밀한 것이든 진지한 것이든 대화를 나눌 때이며,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상황에 대한 더욱 정확한 판단과 일처리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 P137

학문은 타고난 재능을 완벽하게 다듬어 주고, 경험은 학문을 완벽하게 다듬어 준다. - P138

더 깊이 배우고 신중하게 숙고하며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기 위해 책을 읽어라. - P138

가볍게 맛만 보듯 읽기에 적합한 책들이 있고 꿀꺽 삼키듯이 재빨리 훑어보아야 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계속 곱씹고 낱낱이 소화하는 것이 적절한 책도 있다. - P139

다시 말해서 어떤 책들은 일부만 살펴보면 되고 어떤 책들은 끝까지 읽기는 하되 그 책을 읽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 - P139

반면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어떤 책들은 특별히 주의를 집중해 열심히 읽어야 한다. - P139

독서는 풍부한 지식과 훌륭한 가르침으로 보상하고, 토론과 대화는 언제나 쉽게 나서서 말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며, 글을 쓰는 일과 읽은 것을 요약해서 기록하는 일은 잘 검토된 내용을 정신 깊숙이 새겨 확고히 자리 잡게 해 준다. - P139

그러므로 글쓰기를 싫어해 게을리하는 사람이라면 기억력이 대단히 좋아야 할 것이고, 토론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매우 총명하고 재치 있어야 할 것이며, 독서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무언가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139

사람은 자신이 거의 직관적으로 진실이라고 파악한 것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완강히 부인될 수도 있다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 P154

너무나 명백한 명제조차 그 명제의 새로움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어쩌다 갖게 된 편견으로 그 명제에 강경한 반대 의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려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 P154

하나의 입장을 다양한 형식으로 바꿔 볼 수 있는 힘은 오랜 습관과 빈번한 실험에서만 나온다. - P155

서로 다른 여러 관점에서 그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미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진리와 연결하며, 잘 이해될 수 있는 주장들로 그 입장을 보강하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해야 한다. - P155

그러니 홀로 지식을 쌓은 사람이라면 사람들과 어울림으로써 그 지식을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P155

부정확과 혼란이 박식함과 재능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P156

생각을 글로써 확실히 기록해 두고 그것을 자주 검증하고 검토하는 것이 자기 정신의 궤변을 감지해 내고 틀린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156

대화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생각을 퍼뜨리고, 글을 쓸 때는 생각을 모은다. - P156

글쓰기의 탁월함은 체계성이며, 대화의 장점은 자유로움이다. - P156

나는 타락한 인간 본성에 대한 형벌로 미흡한 언어, 의견에 사로잡힌 정신, 격정에 휘둘리는 영혼을 꼽았습니다. - P169

그러니 그에 대한 구제책은 유창함과 지식과 덕이겠지요. 학문과 지혜는 이 세 가지 점을 감싸는 하나의 구球와도 같습니다. - P169

모든 지혜는 가장 탁월한 이 세 가지, 즉 품격 있게 말하는 것, 확실히 아는 것, 바르게 행동하는 것 안에 들어 있습니다. - P169

자신의 착오에 대해 부끄러워할 일도, 악한 행동에 대해 뉘우칠 일도,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말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할 일도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P170

지혜의 의무는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유창한 말로써 어리석은 자의 성급함을 다스리는 것, 신중함으로써 그들을 오류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 덕으로써 그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지요. - P170

배움의 진정한 기능은 정신을 진리에 익숙하게 만들어 그 진리를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 P184

사람은 진리를 원하므로 진리에 익숙해지면 선을 더 쉽게 행할 수 있고, 선을 행하는 습관이 들면 다른 무엇보다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좋은 일을, 다시 말해 덕과 정신의 선행을 선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정신의 신성함을 함양하게 되고 바로 그러한 정신을 통해 신께 닿게 되는 것입니다. - P184

추상적 지식과 현명함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과학에서 빼어난 지성이란 다수의 자연현상에서 하나의 원인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인 반면, 현명함의 영역에서 탁월함이란 하나의 결과에 대해 그것을 끌어냈을만한 원인을 최대한 많이 찾아낼 수 있고, 또한 그중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 P190

지혜로운 사람은 인간 행위와 사건들의 모든 모호함과 불확실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진리에 시선을 굳건히 고정하고 있으며, 곧이곧대로 나아갈 수 없을 때는 언제나 우회로로 갈 수 있다. - P191

또한 그 과정에서 행위에 대한 결정들을 내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정들은 자연히 허락하는 한 가장 유용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 P192

영혼의 격동, 인간의 내면에서 욕망이라는 단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는 그 병폐를 좋은 쪽으로 활용할 능력을 지닌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혜로운 이들의 영혼에서 열정을 다스려 그 열정을 덕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철학이며,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이들에게 그러한 열정의 불을 붙여 그들이 덕의 의무를 행하도록 만드는 유창함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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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과 알고자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P18

모르는 것은 분명 빈약한 능력에서 비롯하지만, 앎에 대한 경멸은 사악한 의지에서 비롯한다. - P18

누구에게나 지식을 키워 가는 수단으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곧 읽기와 명상이다. - P19

물론 교육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읽기이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그 규칙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읽기에 관해서이다. - P19

읽기를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무엇을 처음에 읽고 무엇을 나중에 읽을지 알아야 하며, 셋째,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P19

추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선의 현상을 담고 있는 지혜이다. - P20

지혜는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그들이 자신을 인식하게 해 준다. - P20

오늘날의 학생은 무지해서든 의지가 없어서든, 적합한 공부 방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 P22

공부하는 사람은 많으나 지혜로운 사람이 드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학생들이 유용한 공부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쓸모없는 공부에 노력을 낭비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2

모든 학문에서 그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학문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인정된 것이다. - P28

나중에 그대가 그 학문들을 다 공부하고 또 논쟁과 비교를 통해 각 학문 고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 연후에야, 각각의 원리를 다른 나머지 원리에 적용해 보거나 각 학문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깊이 탐구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 P28

중심이 되는 큰길을 알기도 전에 여러 샛길로 들어가지 말라. - P28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때라야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다. - P29

배움에 나설 때 우리는 더 잘 알려져 있고 더 잘 정의되어 있으며 더 포괄적인, 보편적인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 차츰 더 내려가면서 분석을 통해 개별적인 것들을 구별함으로써 보편적인 것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들의 본성을 탐구해야 한다. - P33

미처 지혜로워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지혜로워 보이고 싶은 욕망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 P38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자신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자신의 본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 P38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즉 지혜로운 정도가 아니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만큼 더 지혜에서 멀어진다. - P38

처음부터 모든 것에 대한 앎을 부여받은 이는 아무도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에게서 자신만의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지 못한 이 역시 아무도 없다. - P39

그러므로 지혜로운 학생이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읽도록 하고, 어떤 글도, 어떤 사람도, 어떤 가르침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 P39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것에서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구하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아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생각하는 이가 지혜로운 학생이다. - P39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꼼꼼한 탐구는 진지한 숙고를 뜻한다. - P49

공들이는 노력과 사랑은 그대가 과제를 끝까지 해내게 만들고, 염려와 경계는 그대를 신중하게 만든다. - P49

그대는 공들이는 노력으로써 공부를 지속하고, 사랑으로써 공부를 완벽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 또한 염려로써 미리 조심하고, 기민한 경계로써 면밀히 주의를 기울인다. - P49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더 알고자 하는 이 욕망 역시 일종의 무절제라네. 왜 그럴까? 자유학문을 이렇게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은 불필요한 것을 배우느라 필수적인 것을 배우지 못한 탓에 성가지고 말 많고 시와 때를 가리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따분한 자들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네. - P75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물론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의로움이 가져오는 좋은 일은 오직 자신에게만 이롭거나 기껏해야 함께 살아가는 몇몇에게만 이롭습니다. - P92

그 사람의 의로운 삶에 배움이 더해진다면, 그의 덕이 지닌 힘은 더욱 커질 것이고, 마치 그 앞에 횃불을 비춘 듯 더욱 찬란해지고 더욱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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