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물적 인과성과 인격적 인과성은 상호작용한다. 때때로 한 인과성이 다른 인과성에 포함된 요소들의 존재와 작용을 설명한다.

무생물적 인과성과 인격적 인과성은 상호작용한다. 무생물적 요인들이 우리의 선택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듯이 우리의 선택 역시 무생물적 세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건에 대한 완전한 설명 중 일부는 사건에 포함된 모든 요인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이전의 원인들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데, 나는 앞으로 이러한 설명을 사건에 대한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이라고 부를 것이다.

‘설명‘에 대한 인류의 탐구는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설명, 곧 다른 모든 대상이 자신의 존재와 속성을 의존하는 실체 혹은 실체들을 추구한다.

신은 자연법칙이 효력이 있도록 유지시켜 준다. 그리고 그는 이 우주에 있는 물질적 대상들의 존재를 보존하는 방편으로 물질보존의 법칙이 작용하도록 한다.

유신론에 따르면 신은 또한 인간을 존재하게 하며, 그의 존재를 매 순간마다 보존한다. 그리고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능력과 믿음을 소유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유물론자들에 의하면 만약 우주에 시작이 없었을 경우에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극적 설명은 셀 수 없이 많은 기본 입자의 힘과 성향, 혹은 기본 입자를 존재하게 하는 물질-에너지 덩어리와 같은 물질적 실체의 힘과 성향을 바탕으로 진술한다.

유신론은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이 한 실체, 곧 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또한 신에 의해 그 존재가 보존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신론은 모든 실체가 가지는 모든 속성들은 신이 발생시켰거나 신이 허용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설명‘의 특징은 바로 적은 수의 원인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직 하나의 원인을 가정하는 설명보다 더 단순한 설명은 없다.

유물론적 가설에 의하면 물질적 대상들이 서로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유신론은 그 기준들을 잘 충족시키기 때문에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규칙적인 행동은 신의 존재를 주장함에 있어서 타당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 동물과 사람의 복잡한 신체가 왜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다윈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오래 전에 특정한 화학물질들이 지구상에 있었고, 주어진 진화의 법칙(예컨대, 약간의 변이를 동반한 재생산)에 따라 복잡한 유기체가 창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복잡한 유기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분명히 사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full explanation이지만, 궁극적 설명ultimate explanation은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 설명이 되기 위해서는 왜 다른 법칙이 아니라 진화의 법칙이 작용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러한 화학물질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동물과 사람을 진화시키도록 이끄는 방식으로(또는 그러한 특징으로 묘사되는 영원성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히 과학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에서 과학은 멈추게 된다.

우주의 생성과 진화 현상은 과학의 틀 자체를 구성한다. 나는 과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설명도 멈춘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와 법칙의 적응성과 우주의 진화적 잠재력에 대한 인격적 설명personal explanation을 추구해야 하는데, 유신론은 바로 그러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이 세계의 존재와 질서와 미세조정과, 이 세계 안에 있는 의식적 존재인 인간과, 인간이 자신과 타인과 세계에 대해 관계를 형성할 수 잇게 하는 섭리적 기회와, 인간의 필요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또한 특별히 기독교의 토대로써 주어지는 기적들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과,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견적 경험들과,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견적 경험들을 통틀어 볼 때, 이 모든 사실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 확률보다 신이 존재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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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담요처럼 자아를 덮어 주는 두꺼운 최신 신학책을 안고 소파에 몸을 누이면, 하나님을 어떤 개념이나 철학 혹은 사상 체계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충격적인 사건은, 우리가 신학 서적에서 보던 하나님, 종교적 논쟁의 대상으로 삼던 하나님이 어느 날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매력은 이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풍성한 잔칫상을 좋아했던 그분은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잘하는 분이었다. 물론 사람들 역시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해했다.

신약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상징과 예언을 구체적인 행위로 ‘실연‘하신다.

그분은 구약 말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는 동시에 자신이 최종적으로 예언을 성취하는 분임을 드러내신다.

구원이라는 주제를 관념화하는 대신 살을 붙여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이야기[나병환자, 혈루증 여인, 야이로의 딸]의 방점은 예수님이 이들을 치유하셨다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이 이들을 만지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분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정치 ·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람들 곧 창녀와 세리, 사마리아인, 이방인, 병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들을 끌어안으셨던 것처럼, 이들도 두 팔 벌려 끌어안으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고통과 죽음, 낙인, 배척, 혼란이 없는 미래를 예시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고 포용하며 치유와 화해, 사랑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바로 오늘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맛보라고 권유하신다.

예수님의 기적은 개종자를 얻기 위한 마술이 아니며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도 아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명령이며 도전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소망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믿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언젠가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원수를 사랑하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고 비폭력의 길을 걸음으로써 이 사치스럽고 포악스러운 제국을 한낱 조롱거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종교적인 위선과 배척을 마음껏 비웃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도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지 우리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

서신서는 예수님을 따랐던 최초의 제자들이 외적으로 박해에 시달리고 내적으로 논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적용했는지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현대 독자들에게 엄청난 유익을 안겨 준다.

어떤 면에서 서신서는 지혜 문학을 쏙 빼닮았다.

지혜는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것이 참이 되는지를 아는 것이다.

서신서의 지혜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적용하기 위해 보편적인 진리와 엉켜 있는 문화적 요소를 풀어내는 일이 현대 해석학의 임무일진대,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서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가 교회 안에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실제 삶 속에 어떻게 드러났는지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바울은 교회나 도시의 상황에 따라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 약화하기도 한다.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여성의 리더십을 권장하는 반면, 분열과 혼란을 야기할 때는 만류했다.

우리는 답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좀처럼 답을 주시지 않는다. 그 대신, 그분은 부드럽고 편안한 당신의 품에 우리를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자, 내가 이야기 하나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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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같은 자연철학자들이 우주의 복잡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지적 설계를 발견해나갈수록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더욱더 불필요해졌다. 사실상 이런 신적 개입은 비합리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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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단지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살기 위해 오셨다.

가르치고, 치유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항의하고, 탁자를 뒤엎고, 불결하다 여겨진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빵을 떼고, 포도주를 붓고, 발을 씻기고, 유혹에 맞서고, 권력자들을 꾸짖고, 율법을 완성하고, 용서하고, 전혀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알리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직접 보여 주고,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원수를 사랑하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음을 이기러 오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만큼 그분의 삶도 우리를 죄에서 구한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를 해방의 길로 이끈다.

모든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큰 이야기를 이루고, 매일의 평범한 삶이 비범한 운동을 이루는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분주히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교회는 모두 똑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같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중심에 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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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으로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칸앤메리.박명준 옮김 / 바람이불어오는곳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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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이 돌아왔다. 시종일관 흥미로운 전개에 울고 웃다를 반복한다. 성경 이야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하다니.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연구했는데. 이 책을 통해 미처 보지 못했던 성경 곳곳에 숨어 있던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된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 말이다. 저자의 통찰과 적실한 표현으로 성경 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레이첼 헬드 에반스(Rachel Held Evans, 1981~2019)는 『교회를 찾아서』(비아, 2018)를 통해 처음 만났다. 자신의 서사 가운데서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서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그 책은 교회의 배타적 모습에 실망했던 그녀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과정을 그리는 그녀의 이야기다. 


『다시, 성경으로』는 성경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며, 본문의 행간에 담긴 미묘한 감정, 본문을 둘러싼 문화적 맥락 등을 다양한 시각으로 풍성하게 풀어내고 있다.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가 가미되어 더욱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전히 신학적으로 논쟁 중인 까다로운 본문들이나 주제에도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이 해석의 작업에 동참하자고 손을 내민다. 


매 챕터는 거의 비슷한 구성이다. 시작은 성경 이야기의 재해석이다. 행간에 있는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말, 감정 등을 묘사한다. 이 부분만 따로 모아서 소책자를 내도 사서 읽고 싶을 정도다. 매우 흥미롭고, 새롭다. 놀라운 통찰 앞에 그저 감탄만 할 때도 있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저자의 표현력과 상상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매 챕터의 성경 이야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각각의 주제를 논한다. 각 주제는 기원, 구원, 전쟁, 지혜, 저항, 복음, 기적, 교회 이야기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그 이야기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더불어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해석 작업과 실제적인 적용으로 우리를 이끈다. 산뜻하고 신선한 문체지만 내용은 단단하다. 그녀의 질문은 정직하고 날카롭다.  


책의 말미에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그녀는 무엇보다 이 책이 자신의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읽히고 토론하고 창의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리딩 가이드'와 '토론을 위한 질문'은 우리가 이 책을 함께 읽도록 독려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에 피하지 말라 한다. 더불어 함께 상상해 보자 한다.  


국외 저자의 책을 읽을 때 간혹 경험하는 작은 뿌듯함은 국내 저자나 회사, 명칭 등을 발견하게 될 때다. 이 책에서도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딜런 루프가 현대 엘란트라를 탔다는 것인데, 사실 썩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이보다 더 자부심을 느끼게 했던 것은 4장에 등장하는 라승찬 교수다. 꽤 비중 있게 그의 책을 인용한다. 


아, 이 책의 '들어가며'만 읽었는데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과 디자인 등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 읽은 뒤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진다. 앞으로 이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은 믿고 봐도 되겠구나 생각된다. 그래서 이 출판사를 인터넷 서점에 알림 등록해뒀다. 번역도 매끄럽다(역시 알림 등록^^). 저자와 역자, 내용과 편집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책이다. 심지어 책의 크기와 무게까지도.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이 저자의 출간 알림은 듣기 어렵겠다. 그녀는 작년 이 맘 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불과 37세로. 그녀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데. 다양한 성경의 이야기들과 신학적 주제들을 그녀가 어떻게 풀어낼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실하게 적용할지 기대되는데.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이 헛헛했다. 너무도 아쉽기에 더욱 소중한 이 책이다.

다양한 학자와 시인들, 성경을 바라보는 여러 전통과 관습을 통해 나의 성경은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유대인의 성경 해석법은 내게 성경 속 수수께끼와 모순에 맞서 싸우지 말고 대범하게 품으라고, 성경은 본질적으로 읽는 이가 씨름하며 의심하고 상상하며 토론하게 만드는 책임을 가르쳐 주었다. - P28

성경은 다양한 이야기의 모음집이기에 각각의 이야기는 그 쓰인 의도를 파악할 때 거기서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 P31

"예술가라면 마법보다 영감을 선호한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영감은 행운아나 인기 많은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 영감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와 창조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작은 창조자가 동역하는 과정이며,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협업이다." - P33

"기원 이야기는 흑백 사진보다는 천연색 사진에 가깝다. 거기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실과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향수와 경각심을 일으키는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그 이야기 중 어떤 것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가려져 있다가 특정한 시점에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 P48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빌려 왔는지 밝히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한 이스라엘이 이웃 민족들과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며 유사한 문학 장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 P50

"창세기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발견, 폐허에서 건져 낸 고고학적 성과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이 모든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완고한 근본주의자나 공격적인 무신론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기원 이야기에 신화나 과장의 흔적 또는 문화적 영향이 보일 때 결코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문학 양식을 크게 오해한 결과다." - P63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을 해석하는 미드라시는 성경 해석이 꼭 제로섬 게임과 같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좋은 이야기가 그렇듯 성경도 무궁무진한 통찰을 제공하며 새로운 도전을 불러온다. 관계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성경을 주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곧 옳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회복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 P71

"어느 시대에나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이 선명한 정의의 끈을 붙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핍박당하는 사람을 놓아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그들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 P93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기득권자들에게는 도전이 되었다. 유월절 만찬상에 오른 음식과 흑인 영가의 가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진리를 말할 것이며, 모두의 해방을 추구할 때 그저 그런 이야기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 P99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저자가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바라보고 있다면, 역대기의 저자는 역사의 치유와 민족의 단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정 시대를 향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두 가지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 P140

"내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예언자들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용과 짐승이 어슬렁거린다. 비록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승리는 결국 저항하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둠은 밝아 오는 빛을 막을 수 없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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