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컬렉션 박스 세트 (리커버 특별판, 전4권) - 뉴욕 3부작 + 달의 궁전 + 빵 굽는 타자기 + 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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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물 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폴 오스터의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 정말. 오스터 씨, 또 시작이네!" 하고 헛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수님도 아니고 대체 뭐람... 말이 되냐구...!

하지만 나는 폴 오스터 이 작가를 너무 좋아한다.  작가가 그렇다면 나는 그냥 무턱대고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평소엔 그가 들려주는 환상적이고 이상한 이야기 속으로 기꺼이 빠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은 십 수년 전에 사놓고 안 읽고 의심하고 이러기를 여러번.  폴 오스터의 컬렉션 박스를 구입하게 되면서 그 동안 미뤄두었던 그의 책을 홀린 듯이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남겨놓을 생각은 없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독후 활동이 책을 읽고 줄거리를 남기는 거다. 으악 진짜 싫어ㅠㅠ).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영문 M이라는 글자를 연상케 하는 인생의 굴곡을 여러 번 그리는데, 거기에 또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우연이 겹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재밌어진다.  이건 줄거리로 남긴다고 해서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느꼈던 즐거움과 감동을 제대로 표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책은 무조건 읽어봐야만 진정한 재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원더 보이 월트(월터 롤리)는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공중에 떠올라 원을 그리며 곡예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계단을 오르는 듯한 곡예를 공중에서 보여주는 ㅡ 실제로 이런 공연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가서 보고 싶네.  공연의 구성을 읽기만 해도 굉장히 멋질 거 같다 ㅡ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를 조련하는 것은 예후디 사부님. 33 개의 어렵고 힘든, 그리고 조금은 황당하기도 한 단계를 거쳐 공중 부양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당연히 이 사람이 미친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당연히 떠 오른다. 말도 안되는 걸 알지만 이게 또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ㅎㅎ   

   중력을 거스르는 월트의 능력은 사춘기가 되면서 엄청난 두통을 동반하는 고통으로 인하여 공중 부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3K(큐 클럭스 클랜)의 폭도들에게 사랑하는 형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살해 당하고, 예후디 사부님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비범한 능력을 지닌 월트의 삶은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긴 어느 인생인들 예측할 수 있을 것이며 예측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언제나 의연하게 시련을 대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전력투구하는 월트의 자세는 나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시련 사이 사이마다 월트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또한 위트 넘친다. 이런 삶의 자세를 갖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그의 비범함ㅡ 혹은 위대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ㅡ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재미와 감동만이 아니라 독자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독자를 끌어들이는 폴 오스터의 작품 세계는, 문학 작품(특히, 소설)이 지녀야 할 궁극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오스터가 나에게 선사하는 궁극의 가치, 작품성, 재미와 감동. 나는 여기에 앞으로도 계속 빠져 있지 싶다.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이건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집중만 한다면 누구라도 내가 원더 보이 월트로서 달성했던 것과 똑같은 위업을 다시 이루어 낼 수 있다. 


물론 그러러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근육에서 힘을 빼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 다음, 눈을 감아보라. 그것이 요령이다. 그러면 당신 몸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팔을 펼치고, 당신 자신을 증발시켜 보라.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은 땅 위로 떠오른다.

   그런 식으로." (376쪽)



   그래서 나도 침대에 앉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봤다.   

당신 자신이기를 멈추고, 자신을 증발시켜야 하고, 근육에서 힘을 빼고(이건 된다).... 나의 영혼이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다구?... 아무리 해도 내 몸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가벼워지지 않는다. 물론 떠오르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ㅋㅋㅋ

침대에 가만히 앉아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요가 자세나 취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하다 역시... ㅎㅎㅎ



   오늘 아침에 서가가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서 폴 오스터의 책이 몇 권인가 보니 전집 포함해서 총 16 권이다. 그 중 3 권은 겹치는 거니까 13 종 16 권이 되는 셈이다. 그 중 반은 읽었고 반은 아직이다.  그래서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뒤적뒤적하다가 <거대한 괴물>과 coolcat329님 리뷰 보고 지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여 <롤리타> 찾아 들고 내려왔다. 

<리바이어던>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데 나는 열린책들에서 간행된 <거대한 괴물>로 가지고 있다. 먼저 읽고 있는 책들 정리가 되면 읽어야 하나... 어느 날 갑자기 동해서 읽어버릴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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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31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폴 오스터 찐팬이시군요~ 저는 십여 년 전 <뉴욕삼부작>으로 오스터를 처음 만났는데 이해가 안 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후에 읽은 <달의 궁전>은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죠.
그러고 보니 올해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네요. 작가의 입담에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은하수 2023-05-31 08:41   좋아요 0 | URL
저와 비슷한 경로를~~~하하하하
저도 어느 라디오 프로에서 신간소개하는 <뉴욕3부작> 처음 듣고 바로 읽었었거든요. 그땐 정말 이게 뭔가... 그러고 한동안 손이 안가다가 <달의 궁전>부터 완전 빠져서 줄줄이 찾아 읽게 됐죠! 어차피 전집에 있어서 <빵굽는 타자기> 곧 읽게 될거 같네요. 일단 <거대한 괴물>부터 시작했습니다^^